25.01.07 13:21최종 업데이트 25.01.0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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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7일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 등 문화계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서초구 국정원 정문 앞에서 블랙리스트작성 국가정보원 고발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이희훈

국가범죄는 권력이 저지른 범죄이다 보니 국가의 범행 당시에 법적인 이의 제기를 하기 쉽지 않다. 민주화가 이뤄져야 뒤늦게 국가범죄를 다룰 수 있는 점에서 시효가 문제 되기 일쑤다. 특히 국가가 저지른 범죄여서 민주화 이후에도 국가권력은 과거의 국가범죄를 인정하거나 국가범죄 관련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국가폭력 피해자를 구제하는 일에 인색하기 십상이다.

블랙리스트 국가범죄는 특히 법·제도·정책·프로그램·행정 등의 공적 수단을 활용하여 합법의 탈을 쓰는 경우가 적지 않은 점에서 그 범죄성을 규명하기 어려워 관련자의 형사처벌이나 징계벌 또는 피해자의 민사소송에 의한 손해배상 등에서 적절한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따라 다른 국가범죄와 마찬가디로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관련자의 형사처벌 관련 공소시효나 징계 시효 또는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 등이 문제다.


시효는 일정한 사실 상태가 일정 기간 지속하면 그 사실 상태가 진정한 권리관계와 합치하는지를 묻지 않고 법률상 사실 상태에 대응하는 법률효과를 인정하는 제도다. 그에 따라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법률상 권리의 취득 또는 권리의 소멸이 일어난다. 시효는 정의보다 법적 안정성을 우선하는 제도다. 그러다 보니 이행기 정의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물론 참을 수 없는 정도의 불법과 부정의는 시효가 적용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행기 정의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국가권력은 시효 제도를 통해 국가의 책임을 회피한다. 시효 제도에 대해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우곤 하는데, 국가범죄에 대해서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이행기 정의를 구현하려면 단어 그대로 법보다 정의가 우선해야 한다. 시효 제도나 소급효 금지 등 시민 간의 관계 또는 국가권력에 대해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는 이행기 정의의 시기에는 오히려 시효 배제 또는 소급효 인정의 원칙이 정의의 법리로서 작동해야 한다. 국가범죄는 국가 본연의 책무를 근본적으로 저버린 것이기 때문에 시효 없이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공화국은 회생하지 않는다.

국가범죄는 집단적 범죄

윤석열의 12․3 내란 이후 문재인 정권의 적폐 청산에 대한 비판 의견들이 보인다. 적폐 청산이 검찰의 권력을 강화하여 윤석열 정권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적폐 청산 그 자체가 아니다. 검찰 권력에 의존한 방법이 문제였다. 그것은 이행기 정의도 법치주의도 아니었다.

적폐는 누적된 부정의의 산물이므로 대증요법 아닌 원인요법이 필요하다. 윤석열 정권은 문재인 정권의 적폐 청산 성공 아닌 실패에 따른 결과물이다. 국민이 여당에 압도적 국회 의석수까지 확보해서 적폐 청산과 함께 국가 체제를 개혁하도록 추동했음에도 문재인 정권은 개혁에 무지했거나 아니면 반개혁적이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해서도 문재인 정권은 법률적 뒷받침을 통해 블랙리스트가 작동할 수 있었던 시스템 자체를 개혁해야 했는데, 국가 전체를 보지 못했다. 국가범죄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명확히 하고, 진실 규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 책임을 감경해야 했는데, 관련 공무원에 대해 미리 '면죄부'를 주는 언행을 보임으로써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친 개혁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나마 문화예술인들이 주축이 된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의 민간 위원과 조사관들의 노력으로 일정한 진상조사와 제도개선안 마련 등 활동과 함께 위원회 활동 이후 '블랙리스트 재발방지 제도개선 이행 협치 추진단'을 꾸리는 등 일정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문재인 정권은 이명박 정권에서의 블랙리스트 사건은 손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블랙리스트 국가범죄의 경우 문화예술계뿐 아니라 노동계, 인권 부문, 사법부 등에서도 광범위한 블랙리스트가 있었는데, 문재인 정권의 대처는 블랙리스트 국가범죄라는 빙산의 일각에 대해 겉핥기식 적폐 청산이었다.

그 결과 윤석열 정권에서는 노골적인 검열은 물론 예산을 통한 '포괄적 배제'의 블랙리스트 작동, 블랙리스트 범죄자들의 귀환, '책임 심의관제' 같은 국가 직할 관리의 재등장 등 새로운 방식의 블랙리스트가 작동하고 있다.

국가범죄는 집단적 범죄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경우만 보더라도 청와대, 국가정보원, 문화체육관광부,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은 물론 시민사회의 일부 전문가까지도 관여된 점에서 그 범주가 넓은 집단적 범죄다. 이러한 국가범죄는 국가 체제 자체의 개혁을 통해서만 재발을 방지할 수 있으므로 시효가 있어서는 안 된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특별법' 제정 불가피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관련 시효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칭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구제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 불가피하다. 첫째,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피해자의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피해자 구제와 재발 방지 조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정지된다고 보아야 한다. 문재인 정권의 피해자 구제 조치 부재가 윤석열 정권의 블랙리스트로 이어짐에 따라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은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둘째,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검찰 권력의 힘을 빌리는 형사 처벌보다는 징계 또는 인사상의 배제 또는 불이익 조치를 통해 추궁해야 한다. 블랙리스트 관련자에 대한 공소시효 연장 또한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징계 등 인사상 조치다. 국가범죄의 특성상 징계에서 시효를 인정할 수 없지만, 특별법을 제정하여 명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 특별법을 제정하여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가 지속해서 이루어지도록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각종 협치 차원의 위원회의 구성에 문체부의 관여를 일체 배제하고, 위원회의 구성은 물론 위원의 탄핵에 대해서 문화예술인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각종 위원회의 위원은 문화예술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넷째, 블랙리스트 국가범죄는 비밀정보기관이 관여하게 마련이다. 내란에 대한 정보 수집과 배포는 국가정보원의 직무임에도 국가정보원은 12․3 내란 사건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이 시민을 위한 조직인지 아니면 정권 유지에 복무하는 기관인지가 그 본색이 다시 확인되었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검찰, 경찰, 군의 정보기구가 중요한 개혁 대상이 되어야 한다. 국가 영역뿐 아니라 민간 영역에서의 블랙리스트 또한 관련 입법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특별법의 제정과 관련자 처리 등에서 시효 논리를 동원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므로, 헌법을 개정하는 경우 관련 내용을 부칙에 포함해야 한다. 과거 1948년 헌법에서 반민족행위자 처벌 또는 4․19 혁명 이후 1960년 헌법에서 3․15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한 처벌 또는 공민권 제한 등의 사례를 참조할 수 있다.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소를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러한 헌법개정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외 국가범죄 일반에 대한 처리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관련 법률 제정 또는 개정이 더 중요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 1소위는 2024년 12월 19일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안'을 의결했다.

법안이 정의하는 '반인권적 국가범죄'는 공무원이 직무 수행 과정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범한 '형법'상 살인의 죄, 군의 지휘관·지휘자가 범한 '군형법' 제62조의 죄(사람을 중상해 또는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에 한정한다), 수사 또는 공소의 제기 및 유지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이 직무 수행 과정에서 사건의 실체를 조작·은폐하기 위하여 범한 '형법' 제123조부터 제125조까지, 제151조, 제152조, 제155조 및 '국가보안법' 제12조의 죄, 가목부터 다목까지의 죄로서 다른 법률에 따라 가중 처벌되는 죄다.

그런데 그 범위가 너무 협소하다. 이 법안에 따르면, 블랙리스트 국가범죄는 해당 사항이 없다.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사회적 참사에 관련된 공무원을 처벌하기 어렵다.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의 행태에 대응하기엔 한계가 있다. 형사 처벌 외에 징계 등 인사상 조치에 관한 내용도 필요하다. 인사권자의 솜방망이 징계를 방지하려면, 공무원 징계 법원을 따로 설치하는 것도 필요하다.

과거의 부정의 바로잡아 정의 세워야

국가범죄 또는 사회적 참사를 겪으면서 나타나는 국회의 고질병은 그때그때 '짜깁기 입법'이다. 입법은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하여 유사한 사건으로 확장하여 일반적이고 포괄적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이라고 재발 방지 효과가 있다. 예를 들면, 박근혜의 탄핵 과정과 윤석열의 탄핵 과정이 다르고,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의 블랙리스트 국가범죄가 각각 다르다. 역사는 되풀이되지만, 동일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으니, 짜깁기 입법은 사후약방문이 될 뿐이다.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관련하여 제대로 공무원의 반인권적 불법을 다루려면, 형법부터 개정해야 한다. 공무원 범죄가 직권남용죄 등 3개밖에 되지 않은 탓에 국가범죄에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다. 여기에 법원의 협소한 법 적용도 한몫한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의 책임 범위는 넓어지고 있는데, 공무원의 책임 범위는 그대로이고, 국가의 배상 또는 보상 책임 범위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대규모로 또는 매일 누적해서 목숨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국회의원의 임무 방기다.

폴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정의가 없으면 '과거'는 끝나지 않고, 영원히 현재인 고통이 된다'고 말한다(<한겨레> 2024. 9. 7. 구은정의 글). 블랙리스트 국가범죄가 그렇듯 해를 넘겨 지속되고 있는 내란 범죄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자 한 사람의 범죄가 아니라 국가기관의 동조 없이 성립되지 않는 집단적 범죄다.

시민의 저항과 일부 공무원의 불복종 덕분에 내란 상황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정의가 숨을 쉬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 존재하는 한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일은 여당 국회의원들, 국무위원들, 대통령 경호처 등이 보여주는 내란 관련 행태다. 그들은 법을 말하지만 그것은 법이 아니라 불법이다.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역시 합법의 탈을 쓰고 있으므로, 민주공화국을 유지하려면 이행기 정의의 과제는 끝이 있을 수 없다. 블랙리스트를 비롯한 모든 국가범죄에는 어떠한 시효도 없다. 과거의 부정의를 바로잡아 정의를 세워야 현재와 미래에 지속해서 정의가 살 수 있다. 이행기 정의는 민주공화국 주권자의 삶의 방식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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