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04 19:54최종 업데이트 25.01.0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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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므로, 임시정부의 헌법재판 역시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으로 수렴된다. 바로 그 임시정부 헌법재판에 참여한 인물 중 하나가 전직 일제 경찰 출신인 최석순이었다.

지금은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심판뿐 아니라 탄핵심판 등도 담당하지만, 제3공화국 헌법인 1963년 헌법(1962.12.개정)에는 탄핵만 담당하는 탄핵심판위원회가 있었다. 임시정부에도 특정인 탄핵을 위해 설치된 특별 탄핵기구가 있었다. 1925년의 이승만심판위원회가 그에 해당한다.


이승만심판위원회는 5인으로 구성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 제7권은 그 5인이 나창헌(위원장)·곽헌·김현구(김기형)·채원개·최석순이라고 알려준다.

1963년 헌법의 제62조 제2항은 대법원장(위원장), 대법원판사 3인, 국회의원 5인을 탄핵심판위원으로 규정했다. 탄핵의 대상이 된 고위 인사를 재판하려면 법률 지식은 물론이고 국민적 지지라는 민주적 정통성도 있어야 하므로, 국회의원이 9인 중 과반수를 차지한 이유는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이승만심판위원 5명의 이름도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 의원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45권 - 총목차>에 따르면, 이승만 탄핵이 진행된 1925년 3월은 제13회 임시의정원 회기였다. 이때 의장은 최창식이고 부의장은 여운형이고 전원위원장은 최석순이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10명 중에 나창헌·곽헌·채원개·김현구가 있었다.

일제 경찰로 신분 위장하고 독립운동가 도왔던 최석순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기념 사진.오마이TV

당시 39세인 여운형과 함께 임시의정원에서 일한 30대 중후반의 최석순(崔錫淳)은 그전까지는 일제 형사인 동시에 임시정부의 '블랙 요원'이었다. 시아버지 김가진 및 남편 김의한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정정화(정묘희, 1900~1991)의 회고록에 최석순의 정체가 소개돼 있다.

정정화는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1월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2개월 뒤 자금 모집의 특명을 받고 국내에 잠입했다. 이때 그를 도운 인물 중 하나가 압록강 북쪽 안동(지금의 단둥)의 최석순이다. 정정화는 <장강일기>에 이렇게 썼다.

"당시 안동에는 우강 최석순이 임정의 연락 업무를 띠고 상주하고 있었다. 그는 신분 위장을 위하여 한편(으로) 왜경의 형사로 있으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내왕을 도왔다. 배로 안동에 닿자마자 나는 임정의 지시대로 우강을 찾았다. 우강은 나와는 첫 대면이었고, 상해에서 젊은 여자가 나왔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내 신분을 확인하고 신의주로 안전하게 넘어갈 방도를 생각해 보자고 했다."

기혼자인 최석순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진 정정화는 그의 동생으로 위장해서 압록강철교를 넘었다. 이를 계기로 정정화는 그와 의남매가 됐다. <장강일기>는 "우강과의 이런 첫 해후가 있고 나서 그 후에도 내가 같은 방법으로 안동과 신의주를 내왕하는 동안 우리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우강을 오라버니로 섬기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최석순은 1920년과 1921년에 정정화의 국내 출입국을 도왔다. 두 번째 출입국 뒤에 일제는 그가 임시정부 블랙요원임을 확인했다. "우강은 왜경에게 정체가 탄로나자 가족을 데리고 안동현을 탈출하여 상해로 왔다"고 정정화는 회고했다.

일제의 보복을 피해 상하이로 이동한 최석순의 앞에는 훨씬 무서운 호랑이가 버티고 있었다. 그를 일경으로만 아는 임시정부 경무국장(경찰청장) 백범 김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하이로 들어간 그는 40대 중반인 김구의 손에 붙들렸다.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김구의 공로는 매우 크지만, 그는 인명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명성황후 시해 이듬해인 1896년, 스무 살의 김구는 여관에서 처음 만난 일본인이 칼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국모 시해범이거나 그 일당일 거라고 단정하고 일본인을 죽였다. "설사 이도 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하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백범일지>는 전한다.

역사저술가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에는 "3년간 김구의 수행비서였던 여성 이화림은 김구가 일본 경찰의 밀정으로 의심되는 자를 직접 목 졸라 죽여 거주지의 마루 밑에 흙을 파고 묻어버리는 것을 돕기도 했다고 증언한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런 김구의 손에 일제 경찰 최석순이 붙들렸다. 소식을 듣고 뛰어간 정정화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다. 그 직전까지 최석순의 공포심은 대단했다. <장강일기>는 "우강은 나를 보더니 그만 어린아이같이 울어버렸다"고 말한다. 최석순을 구했다는 안도감과 별도로 '우는 모습이 나이와 맞지 않다'는 느낌도 정정화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아이처럼 울 정도로 그날 최석순은 위험에 빠졌다.

오해를 풀게 된 최석순은 상하이에 눌러앉게 됐다. "우강은 혐의가 풀렸고, 그 후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라며 "줄곧 우리와 중국에서 함께" 지냈다고 정정화는 회고했다.

대통령을 쫓아내다

서울시 이화동 이화장(이승만 자택)의 집무실. 김종성

최석순의 이름이 임시의정원 명단에서 확인되는 것은 1923년 2월 15일 개회된 제11회 회의 때부터다. 위의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은 그가 평안도 대표로 의원이 됐다고 알려준다. 그런 뒤 그는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에 적극 참여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 2-조선민족운동연감>에 따르면, 그는 탄핵안을 발의한 10인 중 하나였다.

최석순을 포함한 5인의 심판위원은 이승만이 상하이 임정과 멀리 떨어진 하와이에 체류하면서 임시정부 헌법을 부인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임시정부를 방해한 일들을 열거하면서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 진행을 기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이승만 면직을 결정했다.

헌법재판관들이 이승만을 몰아낸 이 일은 국가보훈부가 편찬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서 곽헌·김현구·나창헌·채원개의 독립운동 공적들과 함께 소개돼 있다. '이승만 탄핵도 독립운동이다'라고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주요 독립운동 경력이 서술되는 대목에서 이승만 탄핵심판이 언급됐다. 안중근처럼 일제의 수괴를 응징하는 것 못지않게, 독립운동진영 내부를 교란하는 이를 탄핵하는 것 역시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최석순의 이름은 임시정부판 헌법재판뿐 아니라 약산 김원봉 스타일의 독립운동에서도 나타난다. 일례로, 1925년 9월 5일 자 <동아일보>는 일제 경기도경찰부가 "중국 상해에 잇든 최석순이가 지난달 하순경에 평안북도 잇는 오동진에게 암살용 폭발탄을 다수히 보내어 경성을 중심으로 하야 사용하기로 하엿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비 태세에 들어간 사실을 보도했다.

1935년 10월 15일 자 <조선일보>는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이 "그간 침체하여 잇든 xx운동이 근래 이 운동의 정예분자인 최석순 등을 중심으로 맹렬히 활동을 시작한 것을 보아, 혹시 조선 내지의 어떤 분자와 비밀련락을 가지고 잇는지도 알 수 업다"고 보고한 사실을 보도했다. 일제강점기 보도에서는 독립운동이 'xx운동' 등으로 표기되는 일이 많았다. 일제가 볼 때 최석순은 열혈 강성의 운동가였다.

최석순의 딸인 최동순은 계몽운동이나 집필 등이 아닌 의열운동 방식으로 투쟁하는 자기 아버지를 멋있게 생각했던 모양일까? 아버지와 비슷한 활동을 하면서 나이는 약간 적은 '돌싱' 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했다.

해방 뒤에 나온 1945년 12월 3일 자 <조선일보>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근황을 전하는 대목에서 "얼마 전에 전 임시정부 문화부장 최우강 씨 따님 동선 양과 결혼하야 최근에 득남을 하엿다 한다"라고 보도했다. 율곡 이이를 이율곡으로 부르는 데 익숙한 당시 사람들이 우강 최석순과 김원봉의 인연을 그렇게 보도했다. 정정화는 이 결혼 때문에 최석순의 집에서 소동이 났다면서 "우강은 딸보다 이십 년이나 연상인 약산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고 알려준다.

독립운동가들의 압록강 도강도 돕고, 임시정부에서 이승만도 몰아내고, 의열 활동도 수행한 최석순은 해방 뒤 남한을 거쳐 고향을 찾아갔다. "본국에 온 후 그는 가족과 함께 고향인 평안북도로 갔으나, 이제는 소식을 물을 길 없다"라고 정정화는 회고했다. 그는 고향으로 간 것이지만, 남한 반공정권이 볼 때는 월북이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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