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이화동 이화장(이승만 자택)의 집무실.
김종성
최석순의 이름이 임시의정원 명단에서 확인되는 것은 1923년 2월 15일 개회된 제11회 회의 때부터다. 위의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은 그가 평안도 대표로 의원이 됐다고 알려준다. 그런 뒤 그는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에 적극 참여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 2-조선민족운동연감>에 따르면, 그는 탄핵안을 발의한 10인 중 하나였다.
최석순을 포함한 5인의 심판위원은 이승만이 상하이 임정과 멀리 떨어진 하와이에 체류하면서 임시정부 헌법을 부인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임시정부를 방해한 일들을 열거하면서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 진행을 기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이승만 면직을 결정했다.
헌법재판관들이 이승만을 몰아낸 이 일은 국가보훈부가 편찬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서 곽헌·김현구·나창헌·채원개의 독립운동 공적들과 함께 소개돼 있다. '이승만 탄핵도 독립운동이다'라고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주요 독립운동 경력이 서술되는 대목에서 이승만 탄핵심판이 언급됐다. 안중근처럼 일제의 수괴를 응징하는 것 못지않게, 독립운동진영 내부를 교란하는 이를 탄핵하는 것 역시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최석순의 이름은 임시정부판 헌법재판뿐 아니라 약산 김원봉 스타일의 독립운동에서도 나타난다. 일례로, 1925년 9월 5일 자 <동아일보>는 일제 경기도경찰부가 "중국 상해에 잇든 최석순이가 지난달 하순경에 평안북도 잇는 오동진에게 암살용 폭발탄을 다수히 보내어 경성을 중심으로 하야 사용하기로 하엿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비 태세에 들어간 사실을 보도했다.
1935년 10월 15일 자 <조선일보>는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이 "그간 침체하여 잇든 xx운동이 근래 이 운동의 정예분자인 최석순 등을 중심으로 맹렬히 활동을 시작한 것을 보아, 혹시 조선 내지의 어떤 분자와 비밀련락을 가지고 잇는지도 알 수 업다"고 보고한 사실을 보도했다. 일제강점기 보도에서는 독립운동이 'xx운동' 등으로 표기되는 일이 많았다. 일제가 볼 때 최석순은 열혈 강성의 운동가였다.
최석순의 딸인 최동순은 계몽운동이나 집필 등이 아닌 의열운동 방식으로 투쟁하는 자기 아버지를 멋있게 생각했던 모양일까? 아버지와 비슷한 활동을 하면서 나이는 약간 적은 '돌싱' 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했다.
해방 뒤에 나온 1945년 12월 3일 자 <조선일보>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근황을 전하는 대목에서 "얼마 전에 전 임시정부 문화부장 최우강 씨 따님 동선 양과 결혼하야 최근에 득남을 하엿다 한다"라고 보도했다. 율곡 이이를 이율곡으로 부르는 데 익숙한 당시 사람들이 우강 최석순과 김원봉의 인연을 그렇게 보도했다. 정정화는 이 결혼 때문에 최석순의 집에서 소동이 났다면서 "우강은 딸보다 이십 년이나 연상인 약산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고 알려준다.
독립운동가들의 압록강 도강도 돕고, 임시정부에서 이승만도 몰아내고, 의열 활동도 수행한 최석순은 해방 뒤 남한을 거쳐 고향을 찾아갔다. "본국에 온 후 그는 가족과 함께 고향인 평안북도로 갔으나, 이제는 소식을 물을 길 없다"라고 정정화는 회고했다. 그는 고향으로 간 것이지만, 남한 반공정권이 볼 때는 월북이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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