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당 창당대회가 열린 부민관 (현 서울시의회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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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본의 행태를 친일파들도 모방했다. 조직폭력배 출신 박춘금 등과 함께 대의당을 결성한 김사연(金思演) 역시 그 같은 일제의 악습을 한국화시키는 데 가담한 인물이다. 1949년 2월에 간행돼 친일 분야의 대표적 문헌이 된 <민족정기의 심판>은 1945년 6월 24일 창립된 대의당의 당수는 박춘금이고, 김사연은 문인 이광수 및 재벌 박흥식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됐다고 알려준다.
이 책에 소개된 대의당의 강령은 일제강점기판 반국가세력에 대한 친일파들의 적개심을 반영한다. 강령 제5조는 "오등(吾等)은 모든 비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하여는 단연 이를 분쇄하고 필승태세의 완벽을 기함"이라고 선언했다. 결전 수행을 방해하는 반전운동의 현상들을 분쇄하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일제 침략전쟁에 저항하는 세력이 반국가세력이었던 것이다.
위 책은 대의당이 일제로부터 '30만 예비검속 및 학살'을 지시받았다고 알려준다. "군·관 당국과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고 마침내 조선 내외 항일·반전 조선민중 30만 명을 학살할 것을 하청부맡아"라고 말한다. 한국인 제노사이드의 지령이 김사연 등에게 하달됐던 것이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2년 뒤인 1896년 한성부에서 출생한 김사연은 경성고등보통학교(중등) 졸업과 게이오의숙 예과 중퇴 이후로 한동안 기업 경영인으로 살았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사연 편은 "1918년부터 1924년까지 한일은행 부지배인으로 일했다"고 알려준다.
직업을 바꾼 것은 28세 때 은행을 나와 경성학교비(學校費)평의회 평의원으로 선출되면서였다. 서울 지역 학교 운영비 문제의 자문위원이 된 그는 식민지 학부모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평을 받는다. 2017년도 <한국문화> 제77호에 실린 최병택 공주교육대 교수의 논문 '1920년대 부(府) 학교평의회의 구성과 학교비 논란'은 "국고보조 증액, 학교 증설에 관심을 두고 의견을 펼친 평의원은 김사연·김창두·박해돈·박준호·이범승·이정규 등 소수에 그쳤다"라고 말한다.
그처럼 한국인의 입장에 섰던 그가 그 뒤 경성부협의회·경기도평의회 의원(시도의원), 일본인을 위한 잡지사인 조선공론사 사장, 중추원 참의(국회의원급) 등으로 활약하면서 친일 활동에 열성을 바쳤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2권 김사연 편은 중추원·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유도(儒道)연합회에서 부역한 것과 더불어 그의 핵심적 친일행위의 하나를 이렇게 제시한다.
"1941년 일제의 전쟁협력을 위해 결성한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임전대책협의회 준비위원, 임전대책협력회의 상임위원·기획부장으로서 채권가두판매대원으로 활약하였고,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준비위원·발기인·이사·상임이사로 활동함. 또한 1940년부터 참정권 청원운동에 참여하였고, 방송과 간담회 등을 통해 식민통치와 침략정책에 협력함."
학교비 평의원으로 일하면서 한국 학생과 학부모의 이익을 대변하는 듯했던 그는 친일파가 된 뒤에는 학병 지원을 선동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43년 11월에는 임시육군특별지원병익찬회 동대문위원회를 조직해 학병 지원을 독려했고, 1944년 1월 20일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학병에게 부탁 - 실력을 발휘하라'에서 학생들의 결단을 촉구했다. 학생들의 교육비 문제에 신경을 썼던 그가 이 시기에는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의 친일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점은 위기의식을 확산시키는 데 참여했다는 점이다. 중일전쟁 발발 12일 뒤 발행된 1937년 7월 19일 자 <매일신보>는 "총독부 중추원에서는 일반 지방민에게 비상시국의 인식을 충분히 여(與)하기 위하여 각지에 강사를 파견하여 가지고 시국인식을 하게 되었는데, 평북에는 중추원 참의 김사연 씨가 내도(來道)하여 20일 신의주, 21일 정주, 22일 강계에서 강연회를 개최하게 되었다"라고 보도했다. 이듬해 11월 13일 자 <조선일보> 3면 하단에는 그가 김포군에서 시국강연을 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처벌받지 않은 친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