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6월 30일 방한 중인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한.미 군대를 사열하며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카터가 그런 한계를 노정했다는 점과 더불어, 그 전에 그가 한국 인권 개선에 기여했다는 점도 함께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박정희에게 '국민을 올바로 대하라'라고 거듭 충고했다. 자국의 안보를 위해 한국 인권에 눈감는 여타의 미국 대통령들과는 달랐다.
버락 오바마와 조 바이든은 미국 내에서는 약자의 편에 섰다고 할 수 있지만,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바마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체결을 압박했다. 중국 견제를 위한 한미일 안보협력에만 매몰된 나머지, 한국 위안부들의 인권과 처지는 돌아보지 않았다. 바이든은 윤석열 대통령을 치켜세우며 그의 노동 탄압, 언론 탄압을 눈감았다. 바이든은 한국 민심을 무시하는 윤석열 정권의 최대 후원자였다.
카터는 자국의 이익과 더불어 한국의 인권도 한미동맹의 우선순위에 뒀다. <역사비평> 2009년 봄호에 실린 마상윤 가톨릭대 교수와 박원곤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의 논문 '데탕트기의 한미 갈등'은 "한국에 대한 카터의 도덕외교는 인권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1976년 대통령선거에서 카터는 '박정희의 정적 탄압과 관련하여 미국의 대(對)한국 안보 공약을 재검토하겠다'고 천명했고, 취임 직후 한국으로부터의 핵무기 철수를 검토하면서는 핵정책 결정 이전에 박정희의 인권관을 알고자 했다. 1977년 2월에는 '우리가 한국과의 관계, 특히 안보 분야에서의 관계를 보존하는 것처럼 한국도 인권 분야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관심을 보여줄 것을 요구합니다'라는 비공개 친서를 박정희에게 보냄으로써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카터는 박정희 면전에서 긴급조치 제9호(개헌 논의 및 헌법 비판 금지)의 폐기도 요구했다. 2018년에 국내 언론을 통해 공개된 1979년 6월 30일 자 한미정상회담 대화록에 따르면, 카터는 "내 개인적인 바람은 긴급조치 9호를 철폐하고 재소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석방하는 것"이라고 주문했다. 헌법 위의 헌법인 긴급조치를 앞세워 국민을 억압하는 박정희를 압박했던 것이다.
또한 카터 행정부는 1979년 10월의 민주화 투쟁에 대해서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권 비판이 담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문제 삼아 박 정권이 그의 의원직 박탈을 관철시키자(10.4), 미국 시각으로 다음날 카터는 글라이스틴 대사를 워싱턴으로 소환했다.
그달 6일 자 <경향신문> 1면 하단은 "제명 사태와 글라이스틴 대사의 소환을 연관시켜 말하고 싶지 않으나, 국무성이 4일의 이 사태 논평에 뒤이어 5일 주한대사에게 귀국을 요청했음을 지적해둔다"라는 호딩 카터 국무부 대변인의 논평을 실었다.
카터는 그달 16일 마산과 부산에서 시작된 부마민주항쟁도 도왔다. 박 정권의 내부 분열과 10·26사태를 촉발시킨 부마항쟁 당시, 카터는 박 정권의 돈줄을 막았다.
그달 20일 자 <조선일보> 1면 좌단은 "미국은 최근 한국의 정치사태와 관련, 아시아개발은행을 포함한 국제 금융기관들의 대한(對韓) 경제개발 차관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결정"했다면서 카터가 대사 소환과 친서 전달 등의 방법으로 한국 정치에 관심을 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부마항쟁 시위대와 한국 야당을 고무시켰다. 카터도 이 항쟁과 박정희 정권 몰락에 기여했다.
'국민을 올바로 대하라'와 더불어 카터가 박정희에게 해준 또 다른 조언은 '동족과 사이좋게 지내라'였다. 그는 박정희에게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적극 제안했다.
카터는 1979년 정상회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 전부터 그런 입장을 전 세계에 흘렸다. 그해 6월 29일 자 <경향신문> 1면 중간은 "카터 미 대통령은 오는 30일 박정희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 남북한 대화를 촉진시키고 미국과 남북한 간의 3자 회담을 추진할 의향임을 분명히 밝힐 것이라고 29일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했다"라고 전했다.
2013년도 <한국정치학회보> 제47집 제1호에 실린 공정식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논문 '1979년 카터 대통령의 남북미 3자회담 추진과 박정희 정부의 인식'은 "처음 카터의 구상은 정상회담 기간 서울에서 박정희·김일성과 3자회담을 갖는 것"이었다고 한 뒤 "한국판 캠프 데이비드 회담"이라는 미국 측 표현을 언급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한미일 정상회의를 열었지만, 카터는 한국판 캠프 데이비드에서 긴장을 완화시키는 남북미 정상회담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2019년 6월 30일의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은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인공이 되고 문재인 대통령은 한걸음 양보하는 형태로 열렸지만, 카터가 생각한 3자 정상회담은 남북이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위 논문은 "카터 행정부는 중국을 통한 북한 통제가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의 적극적인 역할에 기대를 걸고 남북미 3자회담을 추진했다"라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