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01 11:39최종 업데이트 25.01.0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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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15년 8월 20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카터 센터에서 언론에 자신의 암 진단 소식을 전하고 있는 모습.EPA/연합뉴스

한국 대통령을 옳은 길로 이끌고자 했던 미국 대통령은 사실상 지미 카터(재임 1977~1981)뿐이다. 미국 시각으로 지난달 29일 동남부 조지아주의 자택에서 향년 100세를 일기로 운명한 카터 전 대통령은 박정희를 거듭 바른길로 인도하고자 했다.

물론 카터 역시 미국 대통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을 종속적 한미관계의 하부에 두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 문제를 처리했다.


5.18 당시의 미국 대통령도 그였다. 미국이 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반미 색채가 강해지는 결정적 원인이었다. 미국은 항공모함 코럴시호와 기동타격대 등을 한반도에 파견해 전두환이 북한에 덜 신경 쓰고 광주 진압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하고 계엄군이 퇴각한 지 닷새 뒤인 그해 5월 26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으로부터 광주 재진입 작전에 관한 사전 통보를 받았다. 미국대사는 이를 말리지 않았고, 다음날 계엄군은 최후의 진압 작전을 벌였다.

금년 12월 3일 밤에는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필립 골드버그 미국대사의 전화를 받지 않아 워싱턴의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5·18 당시에는 이러지 않았다. 미국 진영에서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으로 부르는 '소련군의 아프간 쿠데타 개입'이 있은 1979년 12월 이후로 미국의 대외정책이 강경해지고 지미 카터의 입지가 약해진 뒤에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에서 그가 최정점에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오바마, 바이든과는 달랐던 카터의 행보

1977년 6월 30일 방한 중인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한.미 군대를 사열하며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있다.연합뉴스

카터가 그런 한계를 노정했다는 점과 더불어, 그 전에 그가 한국 인권 개선에 기여했다는 점도 함께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박정희에게 '국민을 올바로 대하라'라고 거듭 충고했다. 자국의 안보를 위해 한국 인권에 눈감는 여타의 미국 대통령들과는 달랐다.

버락 오바마와 조 바이든은 미국 내에서는 약자의 편에 섰다고 할 수 있지만,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바마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체결을 압박했다. 중국 견제를 위한 한미일 안보협력에만 매몰된 나머지, 한국 위안부들의 인권과 처지는 돌아보지 않았다. 바이든은 윤석열 대통령을 치켜세우며 그의 노동 탄압, 언론 탄압을 눈감았다. 바이든은 한국 민심을 무시하는 윤석열 정권의 최대 후원자였다.

카터는 자국의 이익과 더불어 한국의 인권도 한미동맹의 우선순위에 뒀다. <역사비평> 2009년 봄호에 실린 마상윤 가톨릭대 교수와 박원곤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의 논문 '데탕트기의 한미 갈등'은 "한국에 대한 카터의 도덕외교는 인권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1976년 대통령선거에서 카터는 '박정희의 정적 탄압과 관련하여 미국의 대(對)한국 안보 공약을 재검토하겠다'고 천명했고, 취임 직후 한국으로부터의 핵무기 철수를 검토하면서는 핵정책 결정 이전에 박정희의 인권관을 알고자 했다. 1977년 2월에는 '우리가 한국과의 관계, 특히 안보 분야에서의 관계를 보존하는 것처럼 한국도 인권 분야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관심을 보여줄 것을 요구합니다'라는 비공개 친서를 박정희에게 보냄으로써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카터는 박정희 면전에서 긴급조치 제9호(개헌 논의 및 헌법 비판 금지)의 폐기도 요구했다. 2018년에 국내 언론을 통해 공개된 1979년 6월 30일 자 한미정상회담 대화록에 따르면, 카터는 "내 개인적인 바람은 긴급조치 9호를 철폐하고 재소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석방하는 것"이라고 주문했다. 헌법 위의 헌법인 긴급조치를 앞세워 국민을 억압하는 박정희를 압박했던 것이다.

또한 카터 행정부는 1979년 10월의 민주화 투쟁에 대해서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권 비판이 담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문제 삼아 박 정권이 그의 의원직 박탈을 관철시키자(10.4), 미국 시각으로 다음날 카터는 글라이스틴 대사를 워싱턴으로 소환했다.

그달 6일 자 <경향신문> 1면 하단은 "제명 사태와 글라이스틴 대사의 소환을 연관시켜 말하고 싶지 않으나, 국무성이 4일의 이 사태 논평에 뒤이어 5일 주한대사에게 귀국을 요청했음을 지적해둔다"라는 호딩 카터 국무부 대변인의 논평을 실었다.

카터는 그달 16일 마산과 부산에서 시작된 부마민주항쟁도 도왔다. 박 정권의 내부 분열과 10·26사태를 촉발시킨 부마항쟁 당시, 카터는 박 정권의 돈줄을 막았다.

그달 20일 자 <조선일보> 1면 좌단은 "미국은 최근 한국의 정치사태와 관련, 아시아개발은행을 포함한 국제 금융기관들의 대한(對韓) 경제개발 차관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결정"했다면서 카터가 대사 소환과 친서 전달 등의 방법으로 한국 정치에 관심을 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부마항쟁 시위대와 한국 야당을 고무시켰다. 카터도 이 항쟁과 박정희 정권 몰락에 기여했다.

'국민을 올바로 대하라'와 더불어 카터가 박정희에게 해준 또 다른 조언은 '동족과 사이좋게 지내라'였다. 그는 박정희에게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적극 제안했다.

카터는 1979년 정상회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 전부터 그런 입장을 전 세계에 흘렸다. 그해 6월 29일 자 <경향신문> 1면 중간은 "카터 미 대통령은 오는 30일 박정희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 남북한 대화를 촉진시키고 미국과 남북한 간의 3자 회담을 추진할 의향임을 분명히 밝힐 것이라고 29일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했다"라고 전했다.

2013년도 <한국정치학회보> 제47집 제1호에 실린 공정식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논문 '1979년 카터 대통령의 남북미 3자회담 추진과 박정희 정부의 인식'은 "처음 카터의 구상은 정상회담 기간 서울에서 박정희·김일성과 3자회담을 갖는 것"이었다고 한 뒤 "한국판 캠프 데이비드 회담"이라는 미국 측 표현을 언급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한미일 정상회의를 열었지만, 카터는 한국판 캠프 데이비드에서 긴장을 완화시키는 남북미 정상회담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2019년 6월 30일의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은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인공이 되고 문재인 대통령은 한걸음 양보하는 형태로 열렸지만, 카터가 생각한 3자 정상회담은 남북이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위 논문은 "카터 행정부는 중국을 통한 북한 통제가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의 적극적인 역할에 기대를 걸고 남북미 3자회담을 추진했다"라고 설명한다.

1976년 12월 5일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있는 자택에서 공식 초상화를 찍고 있는 모습.AP/연합뉴스

'미국 대통령'이라는 한계 분명하지만, 박정희에게 옳은 길 제시

카터는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민족 공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한국을 지렛대로 대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중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이었다.

카터는 박정희에게 '국민을 올바로 대하라', '동족과 사이좋게 지내라' 등등의 말을 해줬다. 그런 면에서, 박정희의 참스승이었다. 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 선생들이 아닌 지미 카터가 박정희에게 옳은 길을 제시했다.

하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박정희는 주한미군을 묶어둘 목적으로 카터의 조언에 귀 기울이는 척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식이었다. 1997년 11월 10일 자 <조선일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시리즈에 따르면, 1979년 정상회담 직전에는 통역관인 최광수 의전비서관에게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두어라'라는 취지의 사전 지시를 내렸다. 상황을 봐가며 카터를 조롱할 준비를 해뒀던 것이다.

정상회담 때는 무려 40분간이나 홀로 강의를 하며 도리어 카터를 설득하려 했다. 이 때문에 카터는 지루한 나머지 메모를 끄적였다. 위 시리즈는 해롤드 밴스 국무장관에게 건네진 그 쪽지에 "이 자가 2분 이내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나는 이 방을 나가 버리겠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알려준다.

카터는 한국을 떠나는 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박정희에게 '하느님을 믿으세요'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카터와 친분이 두터웠던 김장환 목사는 회고록 <섬기며 사는 기쁨>에서 1979년 8월 6일 자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에도 보도가 나왔다며 자신이 카터에게 "박정희 대통령에게 예수를 전해주세요"라고 부탁한 사실을 소개했다.

김장환 목사는 전도 목적으로 그런 말을 했지만, 박정희의 도덕성을 낮게 평가하는 카터의 입에서 나온 '하느님 믿으세요'는 의미가 다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착하게 살라는 의미도 어느 정도 포함됐다고 볼 수 있다.

카터는 미국 대통령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인권 문제를 한미동맹의 상위에 두고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제안한 흔치 않은 인물이다. 그런 미국 대통령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트럼프가 두 번이나 당선된 일은 그런 인물이 앞으로도 한동안 출현하기 힘들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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