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07 11:01최종 업데이트 25.01.07 11:01
  • 본문듣기
1960년 12월 7일 국회 본회의에 출석해 연설을 하고 있는 장면 총리.연합뉴스

장면 총리의 민주당 정권은 4·19혁명을 지켜내지 못했다. 근 4개월 간의 권한대행 체제를 지나 장면 내각이 출범한 날은 1960년 8월 23일이다. 이로부터 9개월이 채 안 되는 이듬해 5월 16일, 민주당 정권은 붕괴했다. 피 흘려 4·19를 쟁취한 한국인들은 '이승만 12년'보다 6년 더 긴 암흑의 터널로 들어갔다.

민주당은 4·19의 최대 수혜자이지만, 기여자는 아니다. 마산의 민주당원들이 3·15 마산의거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이는 지방 당원들의 일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제5권은 "중앙당 간부들은 4월 6일 장면을 포함해 딱 한번 시위를 했는데, 이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고 볼 수 없다"라며 "자신들이 정한 구역을 약간 돌고 끝냈다"고 기술한다. 이들은 4·19 시위대를 보며 기득권을 염려했다. 이 책은 "이거 해방 직후에 있었던 혼란, 좌파의 움직임 같은 게 또 일어나는 게 아니냐"라는 우려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4·19의 최대 요구사항은 3·15 부정선거를 무효화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요구는 장면정권 출범 이후로도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들은 이 정권을 상대로도 시위를 해야 했다.

그해 10월 8일, 서울지방법원이 부정선거 및 4·19 발포를 포함한 6대 사건에 대해 판결을 선고했다. 피고 48명 중 1명에게는 사형, 1명에게는 무기징역, 그 외에는 징역 5년 이하나 무죄가 선고됐다. 이런 솜방망이 처벌은 국민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사흘 뒤 마샬 그린 주한미국대사는 크리스천 허터 국무장관에게 이 상황을 보고했다. 그린 대사는 4·19 부상자를 포함한 40~50명의 학생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청 옆 서울시의회)으로 쳐들어가고, 그중 일부가 목발을 든 채 의장석 책상에 뛰어올라 '장면 총리와 국회의원 전원의 사퇴'를 요구했다고 보고서를 썼다.

본문에 인용된 주한미국대사 보고서.미국 국무부

그린은 이 상황의 원인을 "3월 선거와 4월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이승만 정부의 노력과 관련된 범법을 처벌하는 데 마땅한 법규가 없는 현행 법률상의 구멍"이라고 요약했다. 부정선거 및 발포 책임자를 처벌할 법규가 4·19혁명 6개월이 다 돼가는 시점에도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4·19 당시의 국회 제1당은 과반수 의석을 점한 자유당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하야성명 이틀 뒤인 4월 27일에 구성된 국회 내각책임제개헌안기초위원회 내에서 자유당의 몫은 9석 중 4석이었다. 민주당은 넷, 무소속은 하나였다. 민주당의 핵심 요구사항인 내각책임제가 위원회 명칭에 들어간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민주당이 절반쯤 이긴 상태에서 개헌 작업이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6월 15일 공포된 개헌안에는 부정선거 및 발포 책임자 처벌을 위한 소급 입법의 근거 조항이 없었다. 대신, 민주당의 최대 숙원인 내각제가 들어갔다. 4·19의 최대 수혜 세력이 조기 총선을 통해 자유당을 축출할 생각은 않고, 자유당과 머리를 맞대고 새 시대를 설계하면서 국민들의 핵심 요구를 외면했던 것이다. 4·19 부상자들이 목발을 들고 의장석에 올라간 근본 원인은 여기 있었다.

민주당이 책임을 방기하는 사이에 이승만은 수사나 재판도 받지 않고 하와이로 달아났다. 그런 뒤 7·29 총선 이후인 11월 29일에 가서야 새로운 개헌을 통해 소급 처벌의 근거가 마련됐다. 이승만 하야성명으로부터 7개월이나 되는 시간을 허비했다. 이로부터 6개월이 조금 안 돼 박정희가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나 4·19혁명을 짓밟았다.

민주주의 억압한 이승만 폭정에 대한 투쟁

박정희의 등장과 함께 민주당도 몰락했다. 이승만 몰락 1년 뒤의 일이다. 1963년에 박순천이 민주당을 재건했지만, 1955년에 창당된 민주당의 맥은 1961년에 일단 끊겼다. 이승만 정권 청산에 소극적이었다는 것과 이승만과 비슷한 시점에 몰락했다는 것 이외에 그 이전인 1950년대 상황까지 감안하면, 민주당과 자유당은 일종의 적대적 공존관계였다. 적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적이 아닌 관계였다.

1954년 11월 29일 이승만에 한해 3선 금지의 예외를 인정하는 개헌안이 공포됐다.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한해 3선 이상을 허용한다는 부칙 규정에 의해 이승만은 사실상의 군주가 될 기회를 갖게 됐다.

너무 노골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이 개헌은 거대한 정계 개편을 촉발시켰다. 이승만 견제라는 대의명분하에 야권이 통합을 모색했다. 그 결과가 민주당 창당이다. 친일세력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을 계승한 민주국민당, 자유당 이탈파, 흥사단 세력 등이 1955년 9월 18일 이 당으로 모여들었다.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다른 세력들이 한데 뭉친 것과 관련해 유홍렬 당시 서울대 교수는 1961년 8월 27일 자 <경향신문>에 기고한 '해방에서 군혁(軍革)에 이르기까지 민족·정치·역사' 제20회에서 "자유당의 전횡을 배격한다는 소극적인 조건에 공통"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자유당에 대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이 없었다면 1955년의 민주당 창당이 쉽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설명이다.

이처럼 이승만 견제라는 대의명분하에 뭉쳤지만, 이들의 반(反)이승만 투쟁은 한계를 띠었다.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이승만의 폭정에 대한 투쟁이었으므로, 이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선명하지 않았다.

민주당 창당 이듬해인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선이 실시됐다. 그로부터 열흘 전,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급서했다. 이랬기 때문에 반이승만 진영인 무소속(창당 중인 진보당 소속) 조봉암에게 표를 몰아주는 게 사리에 맞았다. 하지만 민주당은 '우리는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며 신익희를 찍도록 유도했다. 조봉암을 찍느니 차라리 무효표를 던지라고 권유한 셈이다.

이승만은 504만 6437표를 얻고, 조봉암은 216만 3808표를 얻었다. 신익희를 찍은 무효표는 185만 6818장이었다. 조봉암이 신익희 표 전부를 얻었다 해도 이승만 표에 부족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조봉암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이승만 표가 줄거나 조봉암 표가 늘었으리라 볼 수 있다.

민주당의 막판 선거 전략은 사실상 이승만 당선 전략이었다. 반이승만 기치를 내걸면서도, 진보진영 앞에서는 이승만과 한편이 됐던 것이다. 이승만의 한반도 냉전정책을 가장 열렬히 반대하는 세력이 자유당과 민주당의 연합 공격을 받은 셈이다.

이승만 비판하면서도 당선 돕는 적대적 공생

이승만의 냉전정책을 돕는 태도는 민주당의 집권 뒤에도 나타났다. 4·19 이후의 진보진영(당시 표현은 혁신계)은 한반도 평화와 반민주·반민족 악법의 철폐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장면 내각은 외면했다.

1961년 3월 12일 자 <경향신문>은 반공법 철폐를 요구하는 혁신계의 움직임을 소개하면서 이들이 장면 정권을 상대로 "장면 민주당정권은 자기들의 무능부패한 정치를 은폐하는 수단으로서 반공임시특별법 및 데모규제법 등 일련의 민권을 송두리째 뽑아버릴 우려가 있는 악법 제정을 기도하고 있다"고 비판한 일을 보도했다.

당시의 민주당은 이승만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당선을 돕고 냉전정책을 지지했다. 이 같은 적대적 공생은 4·19 직후 상황에서도 느껴진다.

민주당은 이승만이 사라지자마자 분열 조짐을 보였다. 1960년 6월 22일 자 <조선일보> 기사 '민주당 분열 위기' 등에서 확인되듯이, 이 당의 신·구 양파는 4·19 직후부터 분당 조짐을 보였다. 공동의 적인 이승만이 무너지자, 한민당 및 민국당파(구파)와 자유당 탈당파 및 흥사단 출신 등이 헤어질 결심을 했다. 더 이상 같이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아 그 상태로 7·29 총선에 나섰다. 이때도 대립은 계속됐다. 두 파벌은 선거 자금도 각각 마련했다. 그런 상태로 총선 승리 뒤 구파 윤보선이 대통령을 맡고, 신파 장면이 총리를 맡았다.

그 뒤로도 양파의 대립은 계속돼 구파는 집권 중에 탈당해 신민당을 만들었다. 신파가 지키던 민주당은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령 제6호(1961.5.22.)에 의해 해산 조치를 당했다. 이 몰락은 불법적 쿠데타에 의한 것이지만, 정권을 획득하고도 4·19의 열망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해 민심을 얻지 못한 데도 어느 정도 기인했다.

이승만의 권력이 절정에 오른 1950년대 중반에 등장한 민주당은 자유당과 투쟁하다가 1년 간격을 두고 몰락했다. 민주당의 투쟁은 반독재 투쟁이라는 점에서는 역사적 의의가 크지만, 이승만을 철저히 배격하기보다는 적당히 공생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세력이 시민혁명의 최대 수혜자가 된 것은 한국 현대사의 불행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