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29 11:43최종 업데이트 24.12.2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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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수괴 혐의로 국회에서 탄핵을 당해 직무 정지가 된 윤석열은 대통령 취임 초기, 반도체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국무회의에 참여한 장관들에게 반도체에 대해 "각자 더 공부해서 수준을 높여 달라. 과외선생을 붙여서라도 공부를 더 해서 오시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손을 대는 것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핵심 산업인 반도체까지 망치는 건 반도체 산업 종사자로서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시작한 것이 <대통령을 위한 반도체 특별과외> 연재였습니다.


반도체에 대한 기본 지식부터 잘못 알려진 사실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등을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아는 게 없는 사람이 열심히 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대통령에게 반도체를 설명했습니다.

2년 동안 총 39개의 특별과외 연재 기사를 썼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23년 3월에 쓴 '반도체마저? 윤 대통령님, 이러다 나라 망가집니다' 편입니다.

300조 시스템반도체클러스터 발표의 비현실성에 대한 지적을 한 기사오마이뉴스

당시 대통령은 제14차 비상경제민생회의 모두 발언을 통해 "300조 원에 달하는 대규모 민간 투자를 바탕으로 수도권에 세계 최대 규모의 신규 '첨단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라고 발표했습니다.

정부가 용인에 국가산단을 조성하고 거기에 민간투자, 즉 삼성이 돈을 내서 2042년까지 시스템 반도체를 만드는 팹 다섯 개를 짓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 해당 기사를 통해 삼성전자가 2019년에 이미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며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는데, 그런 웅대한 계획과는 달리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점유율이 크게 하락하고 있다는 걸 지적했습니다.

또한 당시 삼성전자는 미국의 대형 팹리스업체들이 주문을 하지 않아 팹을 지어도 생산할 게 없으며, 한국에는 그 팹 다섯 개를 가동시킬만큼의 반도체를 주문할 팹리스업체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그때 기사를 통해 대통령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첨단산업 생태계 구축을 위해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핑계로 토건개발업자들의 오랜 숙원인 개발제한구역을 풀고, 수도권 공장 총량제를 무너뜨리고, 재벌 기업들을 대상으로 세액공제를 확대하겠다는 게 주목적인 것 같습니다. 300조 원으로 세계 최대의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든다는 걸로 바람을 잡고, 실상은 수도권에 대규모 국가산단을 개발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무너져 가는 삼성전자

대통령은 답이 없었고, 300조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발표 후 1년 반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지금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에 타격을 받고, 첨단 기술이 필요한 HBM 메모리는 SK하이닉스에 밀려 고전하고 있으며, 파운드리에서는 대형 고객사를 잃고 한 자릿수 점유율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삼성전자는 한 때 8만 원대까지 올랐던 주가는 4만 원대까지 떨어졌다가 현재 5만 원 선에 거래가 되며 온 국민의 걱정거리가 된 상태입니다.

3분기 실적과 함께 발표한 삼성전자의 사과문.삼성전자 뉴스룸 갈무리

이 같은 상황을 바꿔 보겠다고 지난봄, 삼성전자의 반도체 수장이 교체됐습니다. 그럼에도 3분기에 받아든 충격적인 실적에 삼성전자는 공개 사과문을 발표하며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쳤다"라며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사과문 한 장으로 회사 사정이 갑자기 좋아질 리는 없습니다. 당장 투자를 진행 중인 반도체 팹들이 골칫거리입니다. 2021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평택의 팹4는 지금도 완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원래 파운드리와 메모리를 동시에 생산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파운드리 업황이 안 좋아지면서 파운드리 대신 메모리를 먼저 생산하는 걸로 계획이 바뀌었고, 그마저도 언제 완공이 가능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작년부터 터 닦기 작업이 시작된 팹5 역시 공사가 중단된 상황입니다.

2021년부터 미국 테일러에 짓고 있는 파운드리 팹도 마찬가지입니다. 계획대로라면 진작에 완공되어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어야 하지만, 주문을 맡기는 고객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완공도 2026년으로 미뤄진 상태입니다.

얼마 전 테일러 팹 투자를 이유로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로부터 약 6조 9000억 규모의 직접 보조금을 확정받았는데, 이는 애초 계획 대비 투자 규모가 줄어서 보조금 역시 2조 4000억 원가량 줄어든 액수입니다.

보조금이 줄어드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투자 규모를 줄이고, 양산 일정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있다는 건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상황을 보여줍니다. 팹을 지어도 팔 수 있는 게 없다는 겁니다.

지금 삼성전자의 상태라면 애초 계획대로 평택에 팹 6까지 마무리하고, 미국 테일러에 팹2를 완공하는 건 2030년이 지나야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계획대로 팹을 추가로 건설하는 게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팹도 파운드리 용으로 쓰는 건 매각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보도에 따르면 생산할 물량이 없어서 가동 중인 장비를 그냥 세워 두는 '셧다운'을 하는 중이라고 하니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적자가 쌓인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규 투자는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윤석열의 탄핵과 함께 300조 시스템반도체클러스터도 그렇게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국토부의 뜬금없는 국가산단 승인 발표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 지정에 대한 국토부의 보도자료.국토부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난 26일, 국토부는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의 산업단지계획 승인이 완료되었다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국토부가 360조 원의 민간투자를 유치해 시스템반도체 팹 6개와 3기의 발전소, 60개 이상의 소재·부품·장비 업체를 입주시키겠다는 건데, 보도자료에 따르면 "통상 4년 이상 소요되는 후보지 선정에서 산단 지정까지의 시간을 1년 9개월로 줄인 데 이어 내년부터 신속한 보상을 통해 착공 시기도 당초 2030년 6월에서 2026년 12월로 앞당긴다는 방침"이라고 합니다.

국토부가 말하는 시스템반도체 팹 6개는 삼성전자의 신규 파운드리 팹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국토부는 보도자료에서 첫 번째 팹의 가동을 2030년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때까지 도로, 용수, 전력 등의 인프라를 공급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겁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지금 삼성전자는 기존에 계획했던 팹도 다 규모를 축소하거나 투자를 중단해 완공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있습니다. 반도체 팹은 일단 완공이 되면 그때부터 생산할 게 있든 없든 상관없이 엄청난 운영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기존에 진행 중이던 평택과 미국의 반도체 단지를 그대로 두고 용인에 새로운 파운드리 팹을 지을 수 있을까요?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신규 파운드리 팹을 용인 국가산단에서 가동하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지난해 봄 다들 반도체 경기가 좋다고 하고, 삼성전자가 곧 10만 전자가 될 거라는 희망에 들떠 있을 때도 저는 용인 시스템반도체클러스터는 애초에 불가능한 프로젝트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모든 게 다 나빠진 최악의 상황입니다.

지난 26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 지정' 행사에서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삼성전자가 처해있는 상황에 비춰봐도 그렇고, 지역균형개발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RE100을 맞추지 못한다는 현실의 벽을 감안하더라도 용인 시스템반도체클러스터는 불가능한 프로젝트이며 해서도 안 되는 프로젝트입니다.

대통령이 내란 혐의로 탄핵당한 국가적 비상 상황에서 국토부가 일정을 급하게 당겨서 국가산단을 승인하는 무리수를 둔 이유가 뭘까요? 그래서 일 년 전에 대통령이던 윤석열에게 한 질문을 이번에는 박상우 국토부 장관에게 다시 하게 됩니다.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핑계로 수도권의 개발제한구역을 풀어 토건개발업자들의 이익에 복무하려는 것입니까?

국토부 장관은 이 말도 안 되는 사업을 윤석열이 물러난 후 새로 들어서는 정부에서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수 있도록 지금 당장 손 떼기를 바랍니다. 반도체에 무지한 채 토목 공사부터 하려는 지도자는 윤석열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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