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28 12:19최종 업데이트 24.12.28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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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노래 하나로 혜성처럼 등장한 세 명의 청년이 우리나라 청소년 문화의 흐름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았다. 1992년에 '난 알아요'를 발표하며 등장한 힙합댄스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이들이 일으킨 작은 물결이 한 세대 후 K-pop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파도가 되어 세계인의 귀와 눈을 사로잡고 있다.

서태지가 등장했던 1992년은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에서 카푸치노가 신문 광고에 첫선을 보인 해로 기억된다. 카푸치노(Cappuccino)는 에스프레소 위에 우유 거품을 얹은 커피로, 카페라테보다는 우유의 양이 적은 것이 보통이다. 대부분의 카페 메뉴에 올라 있는 인기 제품이다. 1988년경 새로 등장한 '쟈뎅'과 '도토루' 등 신형 카페의 메뉴에 올랐지만,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1992년에 한국네슬레가 '네스카페 카푸치노'를 신제품으로 출시하며 대대적인 신문 광고를 시작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문 광고의 카피는 '커피의 새로운 패션, 이탈리안 패션의 커피, 네스카페 카푸치노'였다. 네스카페 카푸치노 한 봉지를 뜯어 커피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며 가볍게 저어주면 카푸치노를 즐길 수 있는 제품이었다. 일종의 믹스커피였던 셈인데 이 제품이 커피시장에 끼친 영향은 생각만큼 크지는 않았다.

캔커피 열풍의 시작

한 경찰 지원 공시생이 15일 새벽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윌비스 신광은 경찰학원앞에서 한정된 고정자리 배정을 기다리며 학원측이 제공한 캔커피로 언 손을 녹이고 있다. 2017.1.15연합뉴스

카푸치노가 등장했던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로 초 커피 시장의 지각변동을 주도했던 것은 캔커피였다. 액체로 된 커피를 캔에 넣어 판매하는 제품을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인스턴트커피의 유행과 함께 커피도 병에 넣어 판매하는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병커피는 불편했다. 오프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잠시 유행했던 병커피는 1960년대 들어 캔음료로 진화하였다. 특히 1962년에 이지 오픈 엔드, 즉 캔 상부에 있는 작은 고리에 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 돌리면 캔이 열리는 방식이 등장하면서 캔음료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병커피는 사라지고 캔커피가 속속 등장하였다. 특히 자동판매기에서 판매하기에 적합하다는 이점 때문에 잠시 유행하였다. 그러나 캔커피의 유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맛이 문제였다. 유럽과 북미 커피 애호가들의 입맛에 캔커피는 맛과 향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캔커피의 유행을 가져온 것은 일본의 우에시마커피(UCC)였다. 1969년 UCC에서 캔커피를 발매하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의 자동판매기 유행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했다. 1975년에는 일본 코카콜라에서 조지아라는 캔커피를 출시하면서 시장점유율을 점차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초반에 이르자 캔커피가 음료 시장의 30% 이상을 점유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UCC의 영향으로 1977년에 씨스코에서 타임커피라는 브랜드의 캔커피를 출시했지만,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캔커피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등장한 것은 1986년이었다. 당시 국내 커피 시장의 최강자였던 동서식품이 맥스웰하우스 캔커피를 내놓은 것이 계기였다. 대대적인 광고를 타고 캔에 담긴 맥스웰커피와 맥스웰카페오레는 커피자판기와 식품점 매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음료가 되었다.

캔커피가 이른바 '신세대 음료'로 불리며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1990년에 비해 1991년에는 118%의 성장을 보이더니, 1992년에 들어서도 80% 가까운 성장을 지속하였다. 캔커피 소비의 확대는 두 개의 도전자 덕분이었다. 1991년에 등장한 롯데칠성음료가 내놓은 '레쓰비,' 그리고 같은 해에 등장한 코카콜라와 네슬레 합작 기업 CCNR이 내놓은 '네스카페'가 주인공이다. 동서식품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민 이 두 기업의 공격적인 마케팅 덕분에 캔커피의 인기는 폭발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1992년 들어 캔커피 시장은 이들의 3파전으로 뜨거웠다.

이 중에서 롯데칠성음료의 '레쓰비'는 콜롬비아 원두커피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이 소비자들의 취향을 사로잡는데 성공한 요인이었다. '네스카페'는 부드러운 커피 맛을 강조하며 시장 점유율을 높여갔다. 1992년 말에 이르자 캔커피 제조 업체는 10개로 증가하였고, 이들이 내놓은 캔커피 브랜드는 21개에 달할 정도였다. 물론 맥스웰하우스 캔커피, 레쓰비, 그리고 네스카페 등 3개 브랜드가 차지하는 시장 점유율이 93~94%에 이를 정도로 3파전 양상은 뚜렷했다.

캔커피는 1992년 상반기 중 우리나라 음료 시장 성장률 1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시장 진출 1년 만에 다국적 기업 한국네슬레의 '네스카페'가 시장 점유율 32.2%로 동서식품의 맥스웰을 따돌리는 작은 기적이 연출된 것도 큰 뉴스거리였다. 시장 점유율은 27.1%로 3위를 기록하였지만, 판매 신장률 1위를 달성한 것은 롯데칠성음료의 '레쓰비'였다.

쓰레기 분리수거에 앞장선 군대

1999년 12월 21일 당시 김명자 환경부 장관, 이연숙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명예회장과 회원 등 50여 명이 명동 한빛은행 앞에서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맞아 '불필요한 과대포장 줄이기' 가두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연합뉴스

캔커피의 유행이 한창이던 당시 신기한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른바 '과대포장 안 하기 운동'이었다. 정부와 소비자단체가 협력해서 각종 소비재 상품의 과대포장을 억제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흥미로운 전시회가 열려서 시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도 이즈음이었다. 1992년 9월 2일부터 명동의 YWCA에서 '과대포장 고발전시회'가 열렸다. 당시 선물세트로 인기가 높았던 커피도 과대포장을 하는 대표적 물품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환경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커지고, 쓰레기 분리수거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도입된 것이 1992년이었다. 서울시는 새로 제정된 <폐기물관리법>에 따라 1991년 9월 1일부터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린 사람에게 과태료를 부과하기 시작하였고, 1992년 3월 1일부터는 분리수거에 응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과태료를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시는 1992년 말까지 시내 주거지에 분리수거함 설치를 완료하였다.

서울시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리수거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 수준은 급격히 높아질 수는 없었다. 1992년 2월에 한국소비자보호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쓰레기 분리수거를 잘 모른다는 응답자가 72%에 달하였다.

정부 주도로 추진한 쓰레기 분리수거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앞장섰던 집단의 하나가 군대였다. 육군 2062부대는 1992년 2월 7일 '쓰레기 분리수거 시범대회'라는 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환경처(현 환경부) 장관은 환경보전과 폐기물 재활용에 군부대가 참여하는 것을 격려하고, 적극 앞장서 줄 것을 당부하였다. 1992년 3월 11일 환경처는 쓰레기 분리수거에 공이 많은 3군사령부를 방문하고 감사패를 전달하였다. 관공서조차 쓰레기 분리수거에 소극적이어서 언론의 질타를 받던 시절에 군부대가 솔선수범한 것은 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이런 솔선수범이 쌓이고 쌓여서 현재 우리나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쓰레기 분리수거 선진국이며, 쓰레기 재활용률이 83%에 이르고 있다.

'수거'의 사전적 의미는 '다 쓴 물건 따위를 거두어 감'이다. 사람은 수거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람은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아무리 능력이 없어 보여도, 그 누군가로부터 다 썼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는 아니다. 감히 사람을 수거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스스로 사람인지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의 저자,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이길상(2023).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역사비평사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매일경제 1992년 기사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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