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26 11:48최종 업데이트 24.12.2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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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저녁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계엄군이 점령을 시도한 국회앞에서 시민들이 집결해 계엄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일부 시민들이 국회 담장에 올라가 있다.권우성

폭퐁우 속에서 어지럽게 항해를 해오던 대한민국호가 선장의 사악한 명령으로 인해 느닷없이 기관실이 폭파되었다. 그 바람에 내수가 얼어붙고 대외 신인도는 곤두박질치면서 예전에 미처 경험해 보지 못한 거대한 파도가 함선을 백척간두로 밀어 올려놓았다.

선원들은 직분을 잃고 우왕좌왕 싸움질만 하고, 타고 있던 승객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 밤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까지 대양을 누비며 신세계를 개척해 오던 대한민국이 왜 난파선의 위기에 처했는가? 남 탓 이전에 반성부터 하게 된다.

상시적 거짓말, 무너진 신뢰, 예견된 돌발행동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국민들은 정부의 끝없는 거짓말을 목도하는 괴로움을 견뎌야 했다. 특히 지난 1년 간 고속도로 노선이 느닷없이 휘어진 이유에 대한 구차한 설명, 명품백 수수를 둘러싼 수준 낮고 구차한 변명, 앞에서는 역사에 남는 과학대통령이 되겠다면서 실제적으로는 연구개발비를 삭감하여 과학인재를 내동댕이치는 정책적 무지와 뻔뻔함, 아직도 진행 중인 '항명수괴죄' 논란, 비합리적인 의대 정원 확대가 가져온 의료체계 붕괴...


국민들은 이미 실체적 진실을 알고 있는데 지도자와 그 보좌진들은 논리에 닿지 않는 거짓말과 궤변으로 매 사태를 설명하느라 스스로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바라보는 국민들의 울화만 치밀게 만들었다.

신뢰와 책임을 민주적 리더십의 핵심으로 파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지도자가 거짓말이나 기만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잃으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약화시킬 수 있으며 전체주의로 기울어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과거와 미래 사이> Between Past and Future, 1961). 그녀의 예리한 학문적 식견은 2024년 한국의 정치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해 낸다.

거듭된 거짓말이 야기한 신뢰의 상실은 낮은 정치적 지지도로 나타나고, 낮은 지지도에 허둥대던 무지한 지도자는 상식을 벗어난 돌발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고 많은 이들이 우려해 왔다. 그러한 우려는 12월 3일 저녁 비상계엄 선포라는 시대착오적 조치로 현실화되었다.

군이 시행 주축이 되는 비상계엄은 적법성 여부를 떠나 일단 발동되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 힘에 의존하여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정치적 결정을 임의대로 하겠다는 망상이 21세기 문명국가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 선포로 나타난 것이다.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민주시민이 지킨다

지난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2차 표결이 재적의원 300명 중 204명 찬성, 85명 반대, 기권 3표, 무효 8표로 가결되자, 시민들이 환호하며 기뻐하고 있다.유성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에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나치 관료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 악은 개인의 비범한 악한 의도에서 나오기보다는, 책임을 회피하며 기계적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작동됨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 히틀러에 의한 독재정치나 아우슈비츠의 대량학살이 가능했던 것은 독재자의 불법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한 평범한 사람들의 무책임성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국가가 온전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명령에 대해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항거할 개인의 책임성이 중요하다.

지난 12월 3일 저녁 비상계엄의 이름을 빌린 친위쿠데타는 놀랍게도 악의 평범성을 뛰어넘은 민주시민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모든 정치적 행위를 금지한다는 '포고령 1호'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에 국회로 몰려들어 계엄군의 국회 진입을 막은 국민들은 위대한 민주시민이다. 그 의도가 불법적임을 직감한 일반 시민들이 '포고령 1호'라는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행정명령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계엄군의 국회 진입을 막아선 것이다.

계엄을 모의하고 주도한 고위장성들이 내린 국회 침탈 명령을 의도적 해태로 맞선 일선 지휘관들과 젊은 장병들도 기계적 명령 수행을 거부한 깨어있는 민주시민이다. 시민들에 가로막힌 무장병력을 보면서 복무 중인 자녀를 둔 부모들의 심정은 얼마나 애탔을까? 무장한 군병력과 이를 저지하는 시민 간의 파국적 상황 전개를 저지한 원동력은 군인이기에 앞서 시민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있는 젊은 사병들의 높은 민주의식이었다.

계엄해제 의결을 하기 위해 군경의 저지를 뚫고 담장을 넘어 의사당으로 출석한 여야 국회의원들 역시 이 시대 민주시민의 대변자이다. 일신상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한다는 정치인들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계엄의 부당성과 해제의 필요성을 한 목소리로 주장하였다.

이처럼 절체절명의 위기 시에 악의 평범성을 극복하고 의회주의를 지켜낸 깨어있는 민주시민 의식은 3·1 독립운동, 4·19 의거, 5·18 광주민주항쟁으로 이어져 오는 유구한 민주 정신의 발로이며, 대한민국의 큰 자산이고 잠재력이다.

작은 불씨 하나가 모든 걸 불태운다

수많은 시민들이 지난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모여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2차 표결 가결을 촉구하며 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고 있다.유성호

2017년 촛불 시민혁명의 후배들이 이번에는 응원봉을 들고 선배들의 민주혁명에 동참하여 한국의 앞날을 밝게 비추었다. 탄핵요구 광장에 함께 모인 촛불과 응원봉은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옴을 생생하게 확인시켜 주면서 이 땅에 새로운 불꽃을 점화시켰다.

해학과 재치가 넘치는 깃발과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표상하는 단색의 응원봉들이 탄핵의 광장에 모여서는 형형색색 어울려 화려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연출해 낸다. 개별적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대의 앞에서 하나로 뭉치는 촛불과 응원봉의 대향연. 이는 자신이 나라의 주인임을 강조하는 민주성과 공동체를 배려하는 공화정신이 함께 깃들어 있는 민주공화정신의 불꽃이다. 2024년 탄핵광장에서 새롭게 발화된 불꽃이다.

계엄이 해제되고 그 배후에 국가반란의 추악한 음모가 있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도 그 사태의 엄중함을 인지하지 못한 책임자와 관련 정치집단이 뒤처리에 머뭇거리고 있다. 심지어 비상계엄 발령이 '거대 야당의 반국가적 패악을 알리고 이를 멈추도록 경고'하기 위한 것이고 '계엄의 형식을 빌려 작금의 위기 상황을 국민들께 호소하는 비상조치'였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러한 억지와 생떼는 이 땅에 새롭게 점화된 민주공화의 불꽃에 의해 깡그리 태워지고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작은 불꽃이지만 선한 의지와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기에 잡다한 궤변과 궁색한 변명을 잠재우고 새로운 도약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나와 이웃을 함께 중시하는 민주공화정신으로 진일보

기관실이 폭파된 채 억센 파도에 밀려 백척간두에 올려진 배.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 현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남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회의감도 든다. 그러나 되돌아 보면 작은 돛단배에서 거대한 함정으로 성장해 오기까지 대한민국은 언제나 거센 비바람을 견디고 몰아치는 파도와 싸워 왔다. 그리고 골이 깊으면 다음 산은 더 높게 올라왔다. 중요한 것은 깊은 골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 그 다음 산을 오를 지혜와 에너지로 환원하느냐이다.

무지와 불통, 궤변과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늘어 놓은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소수의 집단에게 한국을 백척간두의 위기로 밀어 넣은 1차적 책임을 물을 수 있겠지만 그들을 배태한 여건에 대해서도 살펴 보아야 한다. 그 중에는 양극화가 빚어낸 수많은 영역에서의 단절과 소통부재, 그리고 소외와 무력감으로 절어 있는 국민대중이 있지 않을까?

사회적 책임감과 깨어있는 시민정신이 없으면 악의 평범성을 극복하기 힘들다. 그 결과 경직된 사회, 독재국가로 추락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마찬가지로 기본생계가 불안전한 자에게 타인을 배려하는 공공의식을 기대하기 힘들다. 공익을 중시하는 공화정신은 경제적 안정 위에 고양된다.

주인의식의 민주정신과 타인배려의 공화정신을 동시에 보여 준 탄핵광장의 응원봉 시위는 질곡에 처한 2024년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금의 난국을 해결하고 다음의 산으로 올라야 할지 지혜를 주고 있다. 백척간두에서 민주공화정신으로 진일보 하는 것.

박능후 전 보건복지부 장관포럼 사의재

* 필자 소개 : 박능후 전 장관은 포럼 사의재 상임대표로 문재인 정부의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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