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운동 시절 세운 새봄교회서울 금천구 시흥2동 산동네에 교회를 세우고 빈민운동을 했다. 허름한 교회건물 안에 예배당, 탁아소, 자취방 등이 있었다.
최창남
다시 교회로 돌아온 그는 1992년에 빛된교회를 설립하고, 2년 후 목사 안수를 받아 본격적으로 목사로서의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2007년 다시 교회를 떠난다. 그의 목사로서의 정체성이 궁금하다.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을 통해 혹은 저술을 통해 사람들과 교감하는 등의 활동도 광의의 목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페이스북에 매일 글을 올리는데, 저는 그것이 설교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글들을 사람들이 읽고 함께 교감하고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니, 예수니, 교회니 하는 말만 하지 않는 것이지 저는 이것을 설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도 많은 분이 저를 최 목사라고 불러주십니다."
최 목사와 대화를 하다 보면 그가 '가난한 이들' 혹은 '가난한 예수'를 자주 언급하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가난한 예수'를 따르는 삶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삶의 중심이 자기 밖에 있는 것이지요. 나의 목표나 성취, 이루고자 하는 것들이 내 삶의 중심에 있지 않고, 내 삶의 밖에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그들을 위해 죽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그런 삶이 저는 신앙인의 삶이고 운동가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에서 종교인이 제 역할을 못 하거나 외면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특히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이 위협 받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살기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을 종교인들이 눈 감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그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100% 동의합니다. 제가 교회를 떠난 가장 큰 이유는 교회에 대한 희망을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든 불교든 주류를 이루는 큰 교회나 사찰이 주도하는 교단에 속한 성직자는 거기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 구조 속에서 일하고 기여하게 됩니다. 지금 많은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돈을 숭배하고 있어서 돈이 하나님입니다. 이런 상태이니 민주주의를 거론할 필요도 없고 현실에 눈 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 목사는 신학생 시절 서울 원효로 제3재건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다. 이른바 넝마주이들과 함께하는 빈민운동이었다.
"재건대가 지금의 용산전자상가가 들어선 곳에 있었어요. 당시 재건대 넝마주이들은 호적도 없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하루에 고물 80㎏을 주워오면 만화책 10권 보고 소주 한 병 먹고 밥 3끼를 먹을 수 있었어요. 경험이 많은 애들은 새벽같이 나가면 하루 240㎏을 주워오는 겁니다. 남의 집 난로를 훔쳐 오기도 하고 말이죠. 240㎏을 주워오면 하루만 일하고 이틀을 노는 거죠. 그때 제가 한 일이 매일 일을 하게 하고 돈을 모아서 포장마차 같은 걸 만들어 독립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경찰이 그걸 못하게 막았어요. 왜냐면 미제사건이 발생하면 얘네들을 잡아넣어 해결한 것처럼 꾸몄거든요. 넝마주이들이 독립해서 건전하게 살면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재건대 넝마주이들과 함께 할 때는 그들처럼 커다란 스테인리스 밥그릇으로 소주를 마시며 녹슨 철길 위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어요. 고물 주우러 다니다 쥐약 먹고 죽은 개를 발견하면 일 멈추고 돌아와 내장을 긁어낸 후 종일 삶았습니다. 그런 날 밤은 별 쏟아져 내리는 철길에 걸터앉아 넝마주이 동료들과 함께 천국 같은 잔치를 벌였지요."
최 목사는 군대를 제대하고 신학교에 복학하면서는 서울역 앞 사창가로 유명했던 양동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신학교 졸업하자 집을 떠나 시흥2동 산동네로 갔다. 전도사가 돼 새봄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29살 청년 때의 일이었다. 양동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양동의 사창가는 주먹들이 워낙 많이 엮여 있어 여성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없었어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상담해주고 도와주는 역할 정도였어요. 또 당시에는 시각장애인이나 상이군인들이 지팡이 짚고 다니면 식당에도 못 들어갔어요. 재수 없다고 쫓아냈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이 오실 수 있는 식당도 만들어 밥을 먹을 수 있게 한 것이죠.
양동에도 재건대가 있었는데, 그들도 결혼해서 아이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동요는 하나도 몰라요. 아버지가 맨날 술 먹고 목포의 눈물 같은 노래만 부르니 트로트밖에 모르는 겁니다. 그때 탁아소를 만들어 아이들을 돌보았는데, 노래를 가르쳐도 따라부르지를 않습니다. 노래를 하는 게 어색하니까 입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탁아소를 지금 힐튼호텔 자리에 있던 5층짜리 건물 옥상에 만들었는데, 거기서 남산도서관이 잘 보입니다. 아이들에게 도서관에 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욕을 하게 했어요. 아이들이 욕은 잘하니까 입을 열게 하려고 한 것이지요. 15명쯤 되는 아이들에게 너는 "시팔놈아"를 '도'로 해라, 너는 '레'로 하고, 너는 '미'로 해라, 하는 식으로 정해주고 일제히 부르라고 하면 화음이 되니까 재미있어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나중엔 합창 공연도 했어요."
사람 중심
가난한 자들, 사회적 약자들 편에서 일관해온 그의 평생을 지탱해온 가치관이랄까 혹은 신념, 철학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근본적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고, 생명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의 중심이 밖에 있어야 하고, 내가 좀 희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경험이 쌓이다 보니 자기를 살리지 않으면 생명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더라고요. 내가 죽으면 어떻게 상생할 수 있겠어요. 이때부터 나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생명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지켜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저의 가장 기초적인 생각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쓰잘머리 없는 거대 담론에 마음 쓰지 않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라고 토로했다. 혹시 젊은 시절의 노동운동이나 빈민운동에 대해 후회스러운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노동운동이나 빈민운동 자체에 대해서 후회는 없어요. 저는 운동을 할 때 거대 담론보다 항상 사람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운동 할 때 후배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요. 저는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 어떻게 사람이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있냐는 반론을 폈는데, 당시는 거대 담론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주류였지요. 지금 제주도에서도 그런 문제를 느낍니다. 환경문제를 말하면서 '제주도, 있는 그대로'와 같은 거대한 주제를 강조하는 데 반해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겁니다."
최 목사는 음악뿐 아니라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 그의 집 한구석에 그림 그리는 공간도 마련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