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24 11:50최종 업데이트 24.12.2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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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집회장을 메운 2030 세대들“윤석열 탄핵”을 외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집회 현장에 운집한 시민의 주축은 2030 세대였다. 이들은 촛불 대신 응원봉을 들었고, 민중가요 대신 K팝을 불렀다.황의봉

2024년 12월 대한민국은 역사의 분수령을 넘고 있다. 윤석열은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시민과 의회 연합군'에 의해 저지됐다. 이번에도 승리의 주력은 시민이었다.

"윤석열 탄핵"을 외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집회 현장에 운집한 시민의 주축은 2030 세대였다. 이들은 촛불 대신 응원봉을 들었고, 민중가요 대신 K팝을 불렀다. 비장감 대신 축제 분위기를 방불케 하는 흥겨움이 현장을 달궜다.


최창남 목사는 2030 세대가 만들어낸 이 놀라운 광경을 누구보다 주목하는 사람이다. 그는 30여 년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민중가요를 작사, 작곡했다. 박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었고,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살아온 이야기> 등 지금은 고전이 된 노동가요들과 민청련의 주제가였던 <모두들 여기 모여 있구나>와 <화살> 등 수많은 민중가요를 남겼다.

지금은 제주로 이주해 조천읍 중산간 숲속 마을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최 목사를 만났다. 2030 세대가 보여준 새로운 집회문화에 대한 그의 소회가 궁금하다. 또 평생 운동가로 살아온 '목사'는 '윤석열 퇴출' 이후 우리 사회의 진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최창남 목사목사이자 작가, 작곡가 최창남은 평생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고자 했다. 그의 청년 이후의 삶은 재건대, 서울역 앞 양동, 산동네, 가난한 교회, 노동현장, 지역운동, 예술운동으로 채워졌다. 지금은 제주 중산간에서 자연과 함께 살고 있다.황의봉

"2030 세대가 한국 정치지형 바꿀 것"

우선 민중가요 1세대로 꼽히는 최 목사가 바라본 탄핵집회장의 2030 세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민중가요 대신 K팝이 등장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을까.

"사실 민중가요가 이제는 별 의미가 없어졌다고 봅니다. 민중가요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 힘이 없어서, 주장하는 바를 알릴 수가 없었을 때 우리의 열정과 투쟁 의지를 고무시키는 데 필요했습니다. 감정을 자극하고 전파하는 매개체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세대에겐 그런 것이 이미 해결돼 있어서 민중가요를 부르냐, K팝을 부르냐가 별 차이가 없어졌다고 봅니다.

저희 세대의 문화는 탄압을 겪으면서 만들어간 것이지만, 오늘날 2030 세대는 어린아이 때부터 이미 팝이라든가 세계적인 음악을 접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집회 자체도 완전히 달라졌고요. 흔히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 세대는 화염병을 들지 않아도, 촛불을 들지 않아도 불의한 정권이나 부조리한 현실의 난관을 다 극복해내고, 승리해낼 것이라고 봅니다."

최 목사는 2030 세대가 보여준 새로운 문화현상에 대해 놀라움과 함께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세대의 사회의식 변화가 향후 한국의 정치지형을 새롭게 바꿀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평소 제 또래 어른들이 요즘 젊은 세대에 대해 걱정할 때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젊은이들 걱정하지 말고 당신들이나 잘하셔'라고 말입니다. 기성세대 가운데 많은 사람이 요즘 젊은이들은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이 없고, 취직에만 관심 있다는 식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입에 물고 태어난 세대입니다. 이전 세대와는 사고방식이나 존재방식이 다릅니다.

저는 이 세대가 좀 더 성장하면 우리 사회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예상보다 빨리 한순간에 바뀐 것 같아 놀란 게 사실입니다. 2030 세대는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채상병 사건 등에서 정권이 보여준 태도가 자신들을 변화시켰다고 합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세계인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하는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대가 성장하는 한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독재 정치는 불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다만 기득권 세력의 마지막 저항이나 몸부림이 더 심해질 것으로 보여 당분간 어려운 시기가 예상되기도 합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지켜온 독특한 경험들이 축적돼 있어 장기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 방향으로 발전해나갈 것으로 예측합니다. 현재와 같은 정치구조는 사라질 것으로 봅니다. 아마 국민의힘 같은 당은 총선을 두 차례 정도 거치고 나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10년 정도 지나 2030 세대가 3040 세대로 성장할 때쯤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만든 민중가요만 100여 곡... '노동의 새벽' 어떻게 만들었냐면

최창남 목사는 목회자보다는 오히려 빈민운동 노동운동 예술운동을 해온 운동가로 알려졌고, 민중가요 작곡 작사가로 유명하다. 그는 이제 민중가요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노동현장 등에서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가 만든 노래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제가 작곡한 노래 중에서는 '저 놀부 두손에 떡들고', '노동의 새벽', '노동 해방가 2', '모두들 여기 모여 있구나' 등이 많이 알려졌어요. 고은 선생님 시였던 '화살'은 학생들이 많이 불렀어요. 전대협 시절에 선봉대 안에 또 선봉대가 있었다고 해요. 그게 화살조였고, 화살이라는 노래가 주제가였다고 하더라고요. 제주에 와서 만든 노래로는 '죽은 자는 누구'라는 게 있는데, 4·3을 포함해서 광주나 여순사건 등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분들을 생각하면서 만든 곡입니다.

유명 무명 노래를 다 합하면 100곡은 훨씬 넘을 것 같네요. 민중가요들은 대부분 다 유명해졌지요. 노래가 좋아 사람들이 많이 불렀겠지만, 그 당시 집회에서 부를 만한 노래가 없던 때였어요. 민중가요 중에서도 노동가요는 제가 최초로 만들기 시작했을 겁니다. 김민기 선배가 만든 '공장의 불빛' 같은 노래는 지식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것이어서 노동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제가 작곡한 노래들은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만든 노래들이어서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이 부르기 시작한 거죠. 몇 년 후 시대가 바뀌면서 1986∼87년 무렵 김호철이라는 걸출한 작곡자가 나와서 투쟁가요 같은 걸 많이 만들게 됐지요."

‘최창남의 삶과 노래’ 공연지난 10월 대구 쎄라비음악다방에서 최창남 헌정공연 ‘흔들리는 풀’ 공연이 열려 백창우, 김현성, 이지상, 손병휘 등 쟁쟁한 후배들이 함께했다.최창남

1984년, '노동자 최창남'은 박노해 시집에 실린 시 <노동의 새벽>을 읽고 곡을 만든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로 시작하는 이 시의 내용과 당시 그가 처했던 절박한 상황이 꼭 닮아 있었다고 한다.

"처음 박노해 시를 보는 순간 곡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직접 쓴 글이든 다른 시인이 쓴 시든 느낌이 오면 바로 곡을 붙이곤 했는데, 이 노동의 새벽은 금방 못 하고 몇 달을 품고 다녔어요. 박노해 시집을 만드신 채광석 선생님과도 잘 알고 있었고 해서 언젠가 곡을 붙이려고 가지고 다녔던 것이지요.

대구의 경북농약이라는 공장에 다녔는데, 주간엔 13시간 근무였고 야간근무는 11시간이었어요. 저는 탄저병 농약과 응애 농약을 만들었는데, 탄저병 농약은 워낙 독하다 보니 하루 일을 하면 피부가 물 먹은 가죽처럼 딱딱하게 굳어요. 이틀 되면 물집이 생기고요. 3일째 되면 나환자들처럼 살이 뭉그러져 흘러내립니다. 그 정도로 약이 독했어요. 응애라는 벌레를 죽이는 농약은 너무 독해서 계속 기침이 나는 바람에 담배를 피울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루는 농약 기계를 담당했던 친구가 몸이 좀 아픈 상태에서 감기 마스크 하나 쓰고 근무하다가 새벽녘에 농약에 취해 마치 썩은 짚단 넘어가듯이 그냥 팍 넘어가더라고요. 제가 조장이었는데, 이 친구를 119로 병원에 보내고 기계는 세워 놓았지요. 그리고는 공장 앞 구멍가게에서 빈속에 소주 한 병 마시고 자취방에 들어와서 단숨에 곡을 붙였습니다. '전쟁 같은 밤일', '차가운 소주', 그야말로 시에 나오는 상황과 딱 맞아떨어진 거예요. 그때 그 느낌이 그대로 와서 바로 작곡한 것이지요. 그 무렵 제가 만든 곡들은 제 이름이 드러나면 곤란했기 때문에 '김용수'라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최 목사는 지난 10월 대구 쎄라비 음악다방에서 '최창남의 삶과 노래'라는 공연을 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기타를 치면서 자작곡을 부르는 모습이 이채롭다.

"저는 가수도 아니고, 음악활동도 하지 않아요. 제가 살아가는 원칙 중 하나가 무명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유명해지지 않는 것, 출세하지 않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원칙을 가지고 살아오고 있지만, 거절하기 어려운 때도 있더라고요. 대구에서의 공연은 제가 잘 아는 분들이 꼭 그런 자리를 만들어 함께하고 싶다고 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죠. 막상 가보니 요즘 한창 활동하는 유명한 작곡가이자 가수인 후배들이 함께 해줘서 최창남 헌정공연처럼 돼버린 거예요. 백창우 김현성 이지상 손병휘 선생 등. 너무 감사했죠.

11월에는 순천의 사랑어린학교라는 대안학교에 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거기 교장선생이 저와 목사 안수를 같이 받은 분입니다. 대안학교의 어려움을 타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갔지요. 제주에 살면서 음악활동은 안 하지만, 가끔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이 전시회 같은 거 할 때 노래 불러달라고 해서 몇 번 간 정도입니다."

남다른 목사

최창남 목사는 고등학생 시절 '가난한 예수'를 만나 신앙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그는 목회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 그가 목사가 되고, 교회를 세웠다가 떠나고, 다시 돌아와 목회를 하다가 끝내 교회를 떠나는 등 평범하지 않은 길을 걷게 된 연유를 들어봤다.

"청년 시절 제가 만난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분이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는 예수가 권능의 팔을 펼쳐서 막 사람들을 구해내는 식으로 가르치잖아요. 사실 예수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거든요. 말 구유에 밥으로 내려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당하고 함께 눈물 흘리면서 사셨잖아요. 예수를 만나면서 저도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결국 목사까지 가게 된 것이지요.

성결교 신학교를 나왔지만 바로 목사 안수를 받은 건 아니었어요. 29살 때 시흥2동 산동네에서 새봄교회를 만들어 전도사로 개척 교회를 했습니다. 2∼3년쯤 지난 후에 목사 안수를 받아야 했는데, 당시 빈민운동을 하면서 굉장히 고민이 많을 때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목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1984년에 공장에 위장 취업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1986∼87년을 지나면서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바뀌었잖아요. 노동자들도 노동조합 만들어 노동운동을 하게 됐고, 사회 각 분야에서 모두 자기 역할들을 하게 됐거든요. 저 같은 사람들은 정치권으로 가든지, 아니면 전국노동운동연합 같은 활동가 조직에 들어가든지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데, 그보다는 역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게 맞겠다 싶어 다시 교회로 돌아온 것이죠."

빈민운동 시절 세운 새봄교회서울 금천구 시흥2동 산동네에 교회를 세우고 빈민운동을 했다. 허름한 교회건물 안에 예배당, 탁아소, 자취방 등이 있었다.최창남

다시 교회로 돌아온 그는 1992년에 빛된교회를 설립하고, 2년 후 목사 안수를 받아 본격적으로 목사로서의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2007년 다시 교회를 떠난다. 그의 목사로서의 정체성이 궁금하다.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을 통해 혹은 저술을 통해 사람들과 교감하는 등의 활동도 광의의 목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페이스북에 매일 글을 올리는데, 저는 그것이 설교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글들을 사람들이 읽고 함께 교감하고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니, 예수니, 교회니 하는 말만 하지 않는 것이지 저는 이것을 설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도 많은 분이 저를 최 목사라고 불러주십니다."

최 목사와 대화를 하다 보면 그가 '가난한 이들' 혹은 '가난한 예수'를 자주 언급하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가난한 예수'를 따르는 삶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삶의 중심이 자기 밖에 있는 것이지요. 나의 목표나 성취, 이루고자 하는 것들이 내 삶의 중심에 있지 않고, 내 삶의 밖에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그들을 위해 죽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그런 삶이 저는 신앙인의 삶이고 운동가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에서 종교인이 제 역할을 못 하거나 외면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특히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이 위협 받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살기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을 종교인들이 눈 감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그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100% 동의합니다. 제가 교회를 떠난 가장 큰 이유는 교회에 대한 희망을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든 불교든 주류를 이루는 큰 교회나 사찰이 주도하는 교단에 속한 성직자는 거기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 구조 속에서 일하고 기여하게 됩니다. 지금 많은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돈을 숭배하고 있어서 돈이 하나님입니다. 이런 상태이니 민주주의를 거론할 필요도 없고 현실에 눈 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 목사는 신학생 시절 서울 원효로 제3재건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다. 이른바 넝마주이들과 함께하는 빈민운동이었다.

"재건대가 지금의 용산전자상가가 들어선 곳에 있었어요. 당시 재건대 넝마주이들은 호적도 없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하루에 고물 80㎏을 주워오면 만화책 10권 보고 소주 한 병 먹고 밥 3끼를 먹을 수 있었어요. 경험이 많은 애들은 새벽같이 나가면 하루 240㎏을 주워오는 겁니다. 남의 집 난로를 훔쳐 오기도 하고 말이죠. 240㎏을 주워오면 하루만 일하고 이틀을 노는 거죠. 그때 제가 한 일이 매일 일을 하게 하고 돈을 모아서 포장마차 같은 걸 만들어 독립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경찰이 그걸 못하게 막았어요. 왜냐면 미제사건이 발생하면 얘네들을 잡아넣어 해결한 것처럼 꾸몄거든요. 넝마주이들이 독립해서 건전하게 살면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재건대 넝마주이들과 함께 할 때는 그들처럼 커다란 스테인리스 밥그릇으로 소주를 마시며 녹슨 철길 위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어요. 고물 주우러 다니다 쥐약 먹고 죽은 개를 발견하면 일 멈추고 돌아와 내장을 긁어낸 후 종일 삶았습니다. 그런 날 밤은 별 쏟아져 내리는 철길에 걸터앉아 넝마주이 동료들과 함께 천국 같은 잔치를 벌였지요."

최 목사는 군대를 제대하고 신학교에 복학하면서는 서울역 앞 사창가로 유명했던 양동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신학교 졸업하자 집을 떠나 시흥2동 산동네로 갔다. 전도사가 돼 새봄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29살 청년 때의 일이었다. 양동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양동의 사창가는 주먹들이 워낙 많이 엮여 있어 여성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없었어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상담해주고 도와주는 역할 정도였어요. 또 당시에는 시각장애인이나 상이군인들이 지팡이 짚고 다니면 식당에도 못 들어갔어요. 재수 없다고 쫓아냈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이 오실 수 있는 식당도 만들어 밥을 먹을 수 있게 한 것이죠.

양동에도 재건대가 있었는데, 그들도 결혼해서 아이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동요는 하나도 몰라요. 아버지가 맨날 술 먹고 목포의 눈물 같은 노래만 부르니 트로트밖에 모르는 겁니다. 그때 탁아소를 만들어 아이들을 돌보았는데, 노래를 가르쳐도 따라부르지를 않습니다. 노래를 하는 게 어색하니까 입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탁아소를 지금 힐튼호텔 자리에 있던 5층짜리 건물 옥상에 만들었는데, 거기서 남산도서관이 잘 보입니다. 아이들에게 도서관에 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욕을 하게 했어요. 아이들이 욕은 잘하니까 입을 열게 하려고 한 것이지요. 15명쯤 되는 아이들에게 너는 "시팔놈아"를 '도'로 해라, 너는 '레'로 하고, 너는 '미'로 해라, 하는 식으로 정해주고 일제히 부르라고 하면 화음이 되니까 재미있어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나중엔 합창 공연도 했어요."

사람 중심

가난한 자들, 사회적 약자들 편에서 일관해온 그의 평생을 지탱해온 가치관이랄까 혹은 신념, 철학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근본적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고, 생명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의 중심이 밖에 있어야 하고, 내가 좀 희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경험이 쌓이다 보니 자기를 살리지 않으면 생명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더라고요. 내가 죽으면 어떻게 상생할 수 있겠어요. 이때부터 나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생명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지켜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저의 가장 기초적인 생각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쓰잘머리 없는 거대 담론에 마음 쓰지 않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라고 토로했다. 혹시 젊은 시절의 노동운동이나 빈민운동에 대해 후회스러운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노동운동이나 빈민운동 자체에 대해서 후회는 없어요. 저는 운동을 할 때 거대 담론보다 항상 사람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운동 할 때 후배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요. 저는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 어떻게 사람이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있냐는 반론을 폈는데, 당시는 거대 담론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주류였지요. 지금 제주도에서도 그런 문제를 느낍니다. 환경문제를 말하면서 '제주도, 있는 그대로'와 같은 거대한 주제를 강조하는 데 반해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겁니다."

최 목사는 음악뿐 아니라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 그의 집 한구석에 그림 그리는 공간도 마련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자화상최 목사는 제주 조천읍 중산간의 숲속 마을에 살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기타와 악보, 캔버스와 물감, 그리고 책상에 쌓여 있는 책들이 그의 일상을 말해준다.최창남

"제가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약간 재능이 있었나 봅니다. 중학생 때 상도 많이 받았고, 선생님이 꼭 그림 공부를 하라고 하셨거든요. 학교에 제 그림이 자주 걸려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학교 끝나면 인사동 갤러리에 가서 그림 구경하고 음악감상실 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에 가서 운동이라는 걸 하게 되면서 점점 그림과 멀어졌지요.

제주에 내려온 후에야 이제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작년 6월 말 스케치부터 시작해서 수채화와 아크릴로 그리다가 오일 파스텔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고 한동안은 그걸로 그림을 그렸지요. 화가 선생님들 말에 의하면 제가 그림에 대한 욕구나 재능이 좀 있었나 봅니다. 색감을 잘 쓰고 그림이 좋다고 칭찬하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요즘엔 주로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는데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도 나오고 해서 생활에도 좀 도움이 되니까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주로 제주의 자연을 그리고 있어요."

최창남 목사는 저술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9권의 책을 냈다. 단행본으로 출간한 동화책 <개똥이 이야기>의 일부가 초등 6학년 읽기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2000년부터 2010년 사이 초등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최창남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다. 제주살이 10년 동안 3권의 책을 펴냈다. 제주에 와서 펴낸 책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리워서, 괜히>는 오래전에 써놓은 것을 조금 수정한 것이고, 2021년에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2022년에 <신들의 땅>을 펴냈습니다. <신들의 땅>은 오름 이야기를 쓴 겁니다. 그동안 한 70∼80개 오름을 다닌 것 같아요.

<신들의 땅>에는 제주의 신화에 나오는 설문대할망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설문대할망이 물장오리에 빠져 죽었다고 전해 내려오지만, 저는 죽은 게 아니라 살아서 이 섬에 바람으로도 다니고 있다고 작가적 상상력으로 이야기했어요. 내년에는 <사람들의 땅>이란 제목으로 15개 정도의 오름 이야기를 쓸 생각입니다. 독자들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오름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 안에 제가 생각하는 제주의 이야기를 담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오름 3부작의 마지막으로 <생명들의 땅>을 쓸까 합니다."

최창남 목사가 쓴 저서들맨 위에 보이는 <신들의 땅>과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는 제주에 살면서 보고 느낀 이야기를 담고 있고, <개똥이 이야기>는 일부 내용이 초등학교 6학년 읽기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최창남

최 목사가 사는 마을은 사려니숲 부근으로 한라산과 크고 작은 오름에 둘러싸여 있다. 오름 이야기를 담은 책을 냈을 만큼 최 목사는 오름을 즐겨 찾는다. 그만의 '오름의 철학'이 있을 것 같다.

"오름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제주 사람들이 태어나고 묻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오름은 그야말로 신들의 땅이에요. 제주 동쪽 송당에 당오름이 있거든요. 이 오름의 북서쪽 소나무 숲에는 본향당이 있는데 그 주인이 금백조입니다. 금백조는 오곡 종자를 가지고 섬에 들어와 농경의 신이 됐고 한라산에서 태어난 소로소천국과 연애하고 결혼했다는 전설이 널리 알려졌지요. 제주에 1만8천의 신들이 있다고 하는데, 제주도 동쪽의 송당이 그 본부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제주의 신들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이 당오름엔 몇 년 전만 해도 정상으로 올라가는 산책로는 없었어요. 재작년인가부터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이 신성한 영역의 정상은 사람들의 산책로를 만들 게 아니라 신들의 장소로 남겨놨어야 합니다. 신들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당오름 정상에 올라가 보면 사실 볼품없는 오름에 불과하거든요.

이런 현상은 제주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에요. 제가 시민운동 하시는 분들께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오름에 옛날처럼 신들이 다니도록 해야 한다, 신들이 없는 땅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겠는가, 일단 신들이 다니는 길부터 만들어라, 그리고 신들이 살 수 있도록 교육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지 않고 어떻게 제주를 있는 그대로 지키자고 하고, 신화와 전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느냐는 것입니다."

"탄핵 인용 안 되면 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분위기가 돼야"

화제가 자연스럽게 제주도의 현실 이야기로 옮겨갔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적 현상의 하나가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는 일이다. 제주도 역시 이런 빨갱이 사냥으로 피해를 본 대표적인 곳이다. 제주 4·3에 대한 역사 왜곡이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주 이주민이 된 그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이 궁금하다.

"저는 육지에 살 때도 간첩으로 몰렸던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유신정권 시절 이른바 '울릉도 간첩단'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분들의 사연을 다룬 <울릉도 1974> 같은 책도 썼던 것이지요. 제주도에 와서는 당연히 더 관심을 두게 되었고, 책도 보고, 이야기도 듣게 됐습니다만, 4·3뿐 아니라 제주도에는 조작된 간첩이 정말 많더라고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갔던 제주 사람들이 해방 후 많이 들어왔잖아요. 그런데 4·3이 발생하고 많은 제주 사람들이 죽게 되니까 다시 일본으로 밀항을 했단 말이에요. 그중에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있을 게 아닙니까. 이분들이 70년대를 전후해 제주의 고향마을에 등대를 많이 세워줬다고 합니다. 그걸 전두환 정권이 북한 지령을 받아 북한 돈으로 지어준 것이라고 해서 빨갱이로 몰았거든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과 배상과 보상 문제까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주도 당면한 최대 현안은 바로 제2공항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운동가의 시각에서 이 문제의 해법이 궁금하다.

"제2공항이 일단 들어선다면 원상회복이 불가능하잖아요. 당연히 반대합니다만, 이를 구호와 주장만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저는 10년 전부터 관광객을 천만 이하로 줄이는 근본적 해결책을 강구해야 제2공항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얘기해왔어요. 그래서 관광객 줄이는 것에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부터 동의해라, 부모님 설득하라고 했습니다. 관광객을 줄이는 방법의 하나로 명칭은 어떤 것이든 입도세를 받아서 관광객을 상대로 영업하는 펜션이나 식당에 3년 동안 지원을 해라, 하는 주장을 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입도세 도입으로 관광객이 줄면 피해업소에 첫해는 매달 300만 원, 다음 해는 200만 원, 3년째는 100만 원씩 지원해서 이들이 관광객 줄이는 정책에 반대하지 않고 업종전환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정책을 입안해야 비판도 하고 토론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제2공항 저지 가능성이 생기는 겁니다. 제 생각으론 이렇게 해서 관광객이 줄어들면 제2공항 이야기는 더 이상 안 나올 것이고, 제주의 자연도 보호하게 되고, 교통문제도 해결되지 않을까 합니다."

큰지그리오름최창남에게 제주의 오름은 신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사이의 존재’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오름을 가면 천천히 걷고 잠깐이라도 앉아서 바람과 풀, 나무들이 내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 느끼라고 말한다.최창남

최 목사와의 인터뷰는 비상계엄 전날과 탄핵 가결 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자연스럽게 탄핵정국이 마지막 화제가 됐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자신의 임무를 방기하고 있고, 여당은 온 나라가 지켜본 내란을 부정하는 등 대다수 국민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이다. 우리 사회가 과연 혼란 없이 다시 정상궤도로 진입할 수 있을까.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은 당장은 욕먹더라도 국민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아요. 반면에 자신들의 이익에 기반한 단결력이 아주 셉니다. 사법부나 검찰조직도 마찬가지이고요. 지금은 이들 기득권 세력과 민주 세력이 힘과 힘으로 부딪치는 싸움을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저는 이 싸움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국회 앞 탄핵집회 못지않은 시민들의 헌신과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헌재에서 탄핵 인용이 안 되면 정말 우리가 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정도의 분위기가 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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