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택동산에 모셔진 고인의 유골함과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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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무연고 사망자'들을 보건위생상의 이유로 '처리'해왔습니다. '돈 때문에, 혹은 관계 때문에 가족이 장례를 치르기 거부한 사람', '장례를 치러줄 가족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어처구니 없게도 '애도할 이가 없는 사람'으로 등치되어 왔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요.
돈이 없어서 시신을 위임한 가족들은 미안함에라도 마지막을 지키고 싶어 했습니다. 가족은 없더라도 사실혼, 친구, 지인 등 애도할 사람이 존재하기도 했어요. 현대의 한국 사회에서 아예 관계를 맺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연고'라는 낙인을 무심히 찍기 전까지만 해도 고인은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대하는 방식으로 '처리'는 절대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무연고 사망자'라고 해도 고인을 애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 목소리는 '공영장례'라는 제도가 되었습니다. 일부 지자체의 조례로 운영될 뿐이라 여전히 지역격차가 존재하고, 때문에 여전히 '처리'되는 사람이 존재하지만, 어쨌든 '무연고 사망자'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배웅하려는 노력과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요.
그 공영장례 빈소를 통해 우리는 여전히 '무연고 사망자'에 대해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니, 관계의 다양함에 대해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다양한 관계의 사람들이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에 찾아오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빈소에서 종종 고인에 대해 증언합니다. 사망자 앞에 붙은 '무연고'라는 단서가 사실이 아님을. 고인이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왔고, 그 관계는 고인이 죽었다고 해서 단절되지 않았음을.
몇 해 전 저는 한 고인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90세가 넘은 어르신의 장례였는데, 일흔이 가까운 한 어르신이 찾아왔어요. 관계를 물어보자 어르신은 자신을 요양보호사라고 소개했습니다. 고인이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대해주셨고, 참 많이 예뻐하셨다고. 집안에서 장녀로 태어나 그런 예쁨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고마웠다고 말씀하셨어요. 요양보호사는 장례가 치러지는 내내 많이 울었고, 마지막까지 함께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톨릭 교구의 한 수사는 딱 두 번 만났을 뿐인 고인의 장례를 주관하길 원했습니다. 복수가 가득 차서 괴로워하는 홈리스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그가 살려 달라 연락했을 때 주저없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끝내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를 치러주고 음성 꽃동네에 유골을 안치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실 수 있었냐고 묻는 제 질문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습니다.
"고인이 내게 부탁했고, 고인에게 가족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아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무연고 사망자'의 공영장례 빈소에서 혈연과 돈을 떠나 다시금 관계 맺는 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장례는 누군가를 배웅하는 의례지만, 동시에 그가 '있었던 사람'으로 우리에게 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관계는 죽음으로 인해 단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사람'이 '있었던 사람'으로 남아 여전히 관계를 이어갑니다. 앞서 이야기한 요양보호사는 장례가 치러진 후 5년의 시간 동안 고인의 기일을 매년 챙겼습니다.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봉안당 앞에서 상을 차려놓고 고인의 안녕을 빌었습니다. 가톨릭 교구의 수사는 그 이후에도 다른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주관했고요. 앞선 사례와 마찬가지의 이유였습니다.

▲공영장례 빈소에서 쓸 손수건을 다림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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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장례 빈소는 슬픔을 쪼개는 곳
이 일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둘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햇수로 6년차에 접어드는 지금, 그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자살한 고인의 장례를 치를 때의 일이었어요. 덤덤해 보이는 사별자에게 다가가 의례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괜찮으시냐고. 괜찮을 리가 없을 게 뻔한 이에게 무심코 던진 질문의 대답은 눈물로 돌아왔습니다. 사별자는 엉엉 울기 시작했고, 저는 당황했지요.
오랫동안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다는 위임서의 문장을 보고 그가 가족의 자살 앞에 덤덤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요. 당연하게도 그는 엉엉 울 정도로 힘들었고, 저는 우두커니 서 있다 페이퍼타월을 가지러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그의 눈물은 제가 재킷 주머니에 손수건을 챙겨다니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옆에서 어쩔줄 몰라 하며 손수건 하나 건네지 못하는 스스로가 참 부끄러웠거든요.
한참을 울던 그는 고인을 화로에 모시고 난 뒤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최대한 귀 기울여 듣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에게서 발화되는 말들을 함께 겪어내고 싶었습니다. 한참의 넋두리가 지나간 후 그는 깊은 숨을 내쉬며 제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자신이 울 때 화장실로 달려가 페이퍼타월을 챙겨와 주어서.
그때 저는 감히 아주 조금이나마 그의 슬픔을 느꼈고, 이해했습니다. 사별의 경험은 저마다 다르지만, 한 가지 사실은 동일하다 믿거든요. 죽음이 관계의 끝이 아니라는 것. '죽음은 존재가 보편화하는 것'이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말에 동의합니다. 고인이 자살한 뒤로 어딜가든 그와 함께 했던 몇 안되는 추억이 생각난다는 사별자의 말이 이해되고 느껴졌습니다. 저 또한 겪었던 일이니까요. 그 이해가 그에게 위안이 되었을지는 모릅니다. 저는 그저 듣기만 했고, 눈물을 닦을 무언가를 건넸을 뿐이니까요.
누군가의 애도에 연대할 때, 그리고 나의 슬픔이 이해받는다는 생각이 들 때 슬픔은 쪼개어질 수 있습니다. 공영장례 빈소에서 얻은 소중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삶이 긍정과 낙관으로 가득 차 있지 않더라도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은 그 믿음에 기반합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비애와 애도의 소용돌이 안에서 우리는 슬픔을 쪼개고 쪼개 결국은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쪼개진 슬픔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매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애도 또한 연대할 수 있어요.
공영장례 빈소가 슬픔을 쪼개는 곳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슬퍼하는 누군가의 애도에 연대해 주면 좋겠어요. 그렇게 우리 공동체가 단단해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 연대에 거창한 준비는 필요 없습니다. 사별자의 슬픔을 이해할 마음만 있으면 되지요. 손수건은 늘 제 재킷 주머니 안쪽에 있을테니까요.
※ 추신. 저는 이전 연재부터 전문에 걸쳐 '무연고 사망자'를 작은 따옴표 안에 가둬두었습니다. 이 단어가 고인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대체할 다른 단어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어쩔 수 없는 인용이라는 말이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을 때까지, '공영장례'는, 그리고 '무연고 사망자'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배웅하기 위한 시민 사회와 공동체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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