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16일 군사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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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마지막 계엄이었던 1980년대 초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계엄하에서의 생활을 짐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계엄에는 엄한 계엄과 느슨한 계엄이 있을 수 없다. 계엄은 통상적인 법률에 의해 국가의 안위와 편안한 시민 생활의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서, 폭력적 억압 기구인 군대를 동원하여 취하는 극단적 조치이기 때문이다.
이 공통점이 시대적 차이를 넘어선다. 따라서 63년 전에 성공한 5.16쿠데타 세력이 강요한 계엄하에서의 생활과 44년 전에 성공한 12.12 반란 주도자들이 강요한 계엄하에서의 일상이 다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12.3 계엄이 성공하였을 경우 우리가 겪어야 했을 계엄 생활 또한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계엄 생활을 반추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처단당하지 않으려면
1961년 5월 16일 새벽 군이 수도 서울을 완전히 점령한 후 전국에 제1호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제1호 비상계엄령 7개 조항의 마지막 술어는 "금한다"가 3회, "불허한다"가 2회, 그리고 "사전 검열을 받으라"가 1회다. 마지막 일곱 번째 조항은 "야간통행금지 시간은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5시까지"였다. 그리고 "위반자는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고 극형에 처한다"는 문장으로 포고령은 마무리되었다.
제1호 포고령에 의해 종교 관계 집회 이외의 모든 집회는 금지되었고, 국외여행도 금지되었다. 언론, 출판, 보도 등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직장을 무단히 포기하거나 파괴 혹은 태업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유언비어의 날조나 유포는 물론 허용될 수 없었다. 무엇이 유언비어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당연히 군인들이었다.
제1호에 이어 제2호 포고령 '금융기관동결', 그리고 제3호 포고령 '국내 전 공항 및 항만 봉쇄' 조치가 내려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민들은 야간 통행이 금지되고, 종교집회 이외의 모든 집회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금융기관에 있는 본인의 돈을 찾는 것조차 막혔다. 비행기 여행은 물론 배를 이용한 이동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후 시민의 생활, 민생에 영향을 주는 포고령이 추가로 발표되지는 않았다. 비록 모든 일상을 포고령으로 규제하지는 않았지만, 일상생활에서 자기검열이 끝없이 요구되었다. 처단당하지 않으려면 슬기로운 계엄생활의 지혜가 필요하였고, 그것은 자기검열에서 출발하였다.
5월 16일 계엄령 발표와 함께 일상생활이 급격하게 변하였다. 비록 강제하지는 않았지만 계엄령 선포 당일 모든 극장이 문을 닫았다. 극장주들의 자발적인 판단이었다. 극장에 모인 관객들이 내용을 불문하고 집회를 한다면 극장주는 책임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5월 18일 제1관구계엄고등군법회의는 계엄령 첫날인 5월 17일 만취 상태에서 교사를 폭행한 선모씨 형제에 대해 각각 징역 5년과 3년을 선고하였다. 판사는 군검찰관 나○○ 대위의 구형대로 선고했다. 대위 계급의 군인이 판사 위에 있었다.
계엄령 발표 3일 후인 5월 19일까지 이전 정권 주요 인사 전원과 '친 용공분자'로 의심되는 930명은 구금되었다. 5월 19일, '금융기관동결령'이 공포되었고, 이날 고객의 현금 인출을 도와준 지점장 등 은행원 5명은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자기 예금도 찾을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었다.

▲5.16 이후 서울 시내를 돌며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치 깡패 이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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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경상남도 계엄사무소는 계엄령 발표 이후 깡패 12명, 강력범 229명과 함께 야간통행금지 위반자 2371명을 체포하고, 이들 중 악질범은 계엄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엄중 처단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다. 야간통행금지 위반자와 깡패들이 동급으로 취급되었다.
서울경기지구 계엄사무소장은 5월 23일 사제담배를 만들어 팔거나 허가 없이 소금을 제조하면 계엄령을 적용하여 엄히 처단하겠다는 공고문을 발표하였다.
계엄령 발표 후 열흘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이다. 극장 주인이 눈치 없이 영업을 할 수도, 친구들과 길에서 다툴 수도, 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할 수도, 금융기관에 예치된 자신의 금융자산을 인출할 수도, 오후 7시 이후 외출할 수도, 아무 물건이나 제조하여 판매할 수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비록 처단을 당하지는 않더라도, 계엄하에서 슬기롭게 살아남아 평온한 일상생활이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다.
커피가 사라졌다
당시 슬기로운 계엄생활의 어려움을 보여준 것 중 하나가 커피였다. 쿠데타 2주일 후인 5월 29일 아침을 기해 다방에서 커피가 일제히 사라졌다. 강제적 조치가 취해진 것은 아니었다. 지역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있던 치안국장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해명하였다.
"다방업자들을 불러서 '막대한 외화를 소비하고 있는 커피를 되도록 팔지 말고 생강차나 기타를 대용해 팔도록 함이 어떻겠는가'라고 권장했을 뿐이다."
이런 권장을 들은 다방업자들이 스스로 메뉴에서 커피를 지웠다는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커피가 근절되지 않자 7월 22일 고시를 통해 쿠데타 세력은 커피 판매는 물론 영리 목적으로 소유 또는 점유하는 행위까지도 금지한다고 발표하였다.
커피를 팔다 단속에 걸리면 가차 없이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공무원으로서 커피를 마시거나 사다가 적발되면 바로 고발, 파면되었다. 일반인이 커피를 마시거나 사다가 적발되면 주소, 성명, 직위 등이 신문 지상에 공시되기도 하였다.
이런 뉴스가 연일 보도되자 1962년에 접어들면서 다방 메뉴에서 커피는 자취를 감추었고 다방은 한산해졌다. 국산 차를 마시는 손님들만 간혹 보일 뿐이었다. 계엄하에서는 커피를 마시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졌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시해와 함께 내려진 비상계엄령, 12.12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군부에 의해 확대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 등으로 시민들의 일상은 다시 위태로워졌다. 길거리를 지나는 청년들의 가방은 이유 없이 뒤짐을 당해야 했고, 우울함이나 슬픔이 가득한 노래는 방송은 물론 발표조차도 금지되기 일쑤였다.
연예인들의 이름이나 일상생활에서 영어 표기조차 금지되었다. 커피보다는 국산 차를 마시는 것이 애국적 행위로 여겨졌다. 비상계엄이 해제된 것은 1981년 1월 24일이었다. 공식적인 계엄은 450일이었지만, 그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에 의해 계엄의 흔적이 지워지기까지는 많은 희생이 따라야 했다.
▲'12.3내란 사태'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 여의도 국회에 투입된 무장 군인들.
연합뉴스/AFP
12.3 계엄령은 결코 63년 전, 1961년 5월 16일 내려졌던 계엄령이나 1979년 10월 26일 내려졌던 계엄령에 비해 온순하지 않다. '처단'이란 무시무시한 단어를 두 번씩이나 사용한 것이, 그리고 의료인 집단을 처단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 명백한 증거다.
힘없는 일반 시민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마음대로 직장을 이탈하거나, 계엄 주도자들에 의해 불온하다고 지목된 언론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어두운 시간을 예고한 것이었다. 12.3 친위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가정을 하는 것조차 소름 끼치는 일이다.
계엄은 하나다. 느슨한 계엄이나 부드러운 계엄은 없다. 계엄하에서의 생활은 모두 위태롭다. 슬기로운 계엄생활은 있을 수 없다. 쿠데타 세력에 동조하며 탄핵에 반대하는 집단이나 개인은 슬기로운 계엄생활이 가능하다고 믿는 무모한 '패거리'거나 어리석은 '머저리'일 뿐이다.
(교육학교수, 커피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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