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12 15:31최종 업데이트 24.12.1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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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2년 10월 18일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해 패널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국대사가 '윤석열 정부 사람들과 상종을 못하겠다'는 취지로 본국에 보고했다는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의 주장이 논란을 일으켰다. 국립외교원장 출신인 그는 1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현안질의에서 계엄 당일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및 조태열 외교부 장관 등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이들과 연락하지 못한 골드버그 대사가 국무부에 그렇게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대사관은 엑스(트위터) 계정을 통해 "김준형 의원이 언론에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국대사의 발언이라고 주장한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밝혔다.


골드버그 대사가 그런 표현을 썼든 안 썼든, 미국 측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 시각으로 지난 4일 커트 캠벨 국무부 부장관은 "나는 윤석열 대통령이 심한 오판을 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발언했다. 비상계엄이 잘못됐다는 시각을 국무부 2인자가 내놓은 것이다. 윤석열을 비판하는 발언이기는 하지만, 내정간섭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앙골라를 방문 중이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를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베단트 파텔 국무부 대변인 역시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라고 확인했다. 미국에 보고할 의무는 물론 없지만, 미군과 그 가족들이 주둔한 나라의 대통령이 비상 상황을 명분으로 군을 동원하면서도 미리 알려주지 않았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유쾌한 일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나 가능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을 '패싱'했다. 미국을 소중히 여긴다는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 자신이 보기에도 지금 상황이 전시나 준전시가 아님을 드러내는 방증이 될 수 있지만, 전시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를 명분으로 군을 동원하면서도 미리 귀띔해 주지 않은 부분은 미국 입장에서는 곱씹을 만한 대목이다.

그래서 이번 사태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나름 애써 구축한 한미일 삼각체제 및 한·일 군사협력에도 타격을 줄 만하다. 미국의 국익이 한국에서 훼손되는 것을 사전에 알아차리지 못한 골드버그 입장에서는 윤석열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윤석열의 '내란'이 무너트린 한미일 삼각체제

지난 2023년 11월 16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 회동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6일 미국과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의 주한대사들이 서울 모처에 긴급히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섯 나라는 북·중·러 같은 옛 공산권 진영에 맞서는 기밀정보 동맹인 '파이브 아이즈'의 구성원이다. 골드버그의 눈귀를 포함한 다섯 명의 눈귀가 윤석열과 김용현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사태 파악이 늦었던 미국이 이 모임을 연 것은 이번 사태가 미국에 준 영향을 보여준다.

윤석열·바이든·기시다의 끈끈한 우정 덕에 공고해질 것처럼 보였던 한미일 삼각체제는 4년 더 재임할 수 있었던 조 바이든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대선 후보직을 넘겨주면서 이상 신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해리스가 후보수락 연설을 함으로써 후보 교체가 확정(8.22.)된 뒤인 10월 1일에는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취임과 함께 기시다 후미오마저 퇴장했다.

그래서 삼각체제의 계속 유지를 열망하는 측의 입장에서는 2027년 5월까지 임기가 보장된 윤석열에게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기시다 총리의 '9월 자민당 총재선거 불출마' 의사표명(8.14.)으로 일본 정권의 교체까지 확실시된 뒤인 지난 9월 3일,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해리스가 당선되면 그의 참모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발언했다. 2027년까지 삼각체제하에서 윤 정부가 갖게 될 위상을 의식한 발언이라 볼 수 있다.

바이든 정부가 일궈낸 삼각체제는 1950년대부터 미국이 열망했던 것이다. 미국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한일회담으로 유도한 것은 태평양만 걷어내면 미 서부와 가장 가까운 지역인 동아시아에 확실한 보루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시스템이 이제 막 궤도에 들어서려는 시점이었다. 향후 2년 반 넘게 이 시스템을 지켜줄 수 있었던 윤석열이 느닷없는 대형 사고를 쳤으니, 미 행정부의 당혹감은 클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내란이기도 하지만, 한미일 삼각체제를 안에서부터 교란하는 내란이기도 하다. 그래서 북·중·러에 유리하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계엄 분위기를 조성할 목적으로 북한 오물풍선의 발사 지점에 대한 원점 타격이나 평양에 대한 무인기 침투를 추진했다는 의혹이 보도되고 있다. 이런 의혹이 보도되는 상황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을 더욱더 밀어붙이는 명분이 될 수 있다. 미국 스팀슨센터의 마이클 매든 연구원은 북한전문매체 <38노스>에 기고한 10일 자 글에서 "(김정은이)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을 우선시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미일 연대의 약화는 중국에 이익이 되지만, 동시에 위기도 될 수도 있다. 매든 연구원의 말처럼 지금 상황이 북러 군사협력의 심화로 이어지면 사정이 달라진다. 중국이 패싱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중국이 원치 않는 사태가 러시아에 의해 동북아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

지난달 1일 중국 외교부가 한국을 무비자 시험정책 대상에 추가한 것은 경제적 목적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북러관계의 급속한 진전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띤다. 후쿠오카 지역의 민영방송인 RKB는 10일자 해설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표면상 양호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각자의 생각이 있다"라고 한 뒤 "북조선이 러시아에 과도하게 접근하는 것은 환영할 수 없고"라는 말로 중국의 입장을 새삼스레 강조했다.

그래서 김정은과 푸틴이 한국 상황을 명분으로 한층 긴밀해지면, 중국 입장에서는 한국·일본에 다가갈 수밖에 없다.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에 대해 강경 입장을 견지하던 중국 정부는 지난 9월 20일 일본산 수산물을 점진적으로 수입하겠다며 입장을 바꿨다. 북·러가 더욱 가까워지면 중국정부 고위 인사가 후쿠시마 수산물을 공개 시식하는 장면이 연출될 수도 있다.

현 상황이 북러 밀착을 심화시키면 이처럼 한중일이 가까워질 수 있다. 북중러 3자가 공고해지는 것과 더불어 이 역시 한미일 삼각체제에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 11일 자 <교도통신>에 따르면, 이와야 다케시 외무대신은 조태열 외교부 장관과의 전화 통화에서 "일한관계의 중요성은 변치 않는다"라고 확인했다. 한일관계의 중요성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강조되겠지만, 한일관계의 현실은 앞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새로운 패권 전략에 재 뿌린 윤석열

윤석열 대통령이 12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다.대통령실

한반도의 갑작스러운 정치적 격동이 지금처럼 미국 주도의 국제 연대가 공고할 때 발생한 적은 없었다. 한미동맹과 한일동맹이 따로 작동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한미일 군사협력체제가 구축 단계에 접어든 상태다. 그래서 지금 상황으로 인한 최대 피해국은 미국이라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미국은 국제적 지위가 흔들릴 때마다 동북아를 단속하고 이를 기반으로 기력을 회복하곤 했다. 비동맹운동과 유럽 경제통합 추진으로 1950년대 중후반에 자국의 지도력에 이상 신호가 켜지자, 1960년대 초반에 한미일 동맹 구축을 서둘렀다. 이것의 산물이 한일협정이다.

1968년부터 베트남전쟁에서 수렁에 빠지자 이번에는 적성국인 중국과 과감하게 핑퐁외교를 하면서 관계개선을 이뤄냈다. 중국의 급부상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자,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2015년에 한일 위안부 합의를 압박하는 방법으로 한미일 연대를 이뤄내려 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는 한일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개입하는 방법으로 한미일 및 한일관계를 바꾸려 했다. 이것이 구축 단계에 들어서는 시점에 김정일이나 시진핑·푸틴이 아닌 윤석열이 재를 뿌렸다. 이승만과 전두환이 초래한 시민혁명은 미국의 세계 지배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백악관 만찬장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열창했던 윤석열이 미국을 이처럼 난처하게 만들리라고는 미국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달 취임할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지금도 여전히 미군 방위비를 운운하고 있지만, 윤석열이 만든 한미일 체제의 위기가 그에게도 전이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 정권이냐 공화당 정권이냐를 막론하고 역대 미국 행정부가 열망했던 동북아 안보체제가 누구보다도 미국을 사랑하는 듯이 보였던 윤석열에 의해 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패권에 위기가 생길 때마다 동북아를 단속하는 미국의 방식은 매번 성과를 거뒀다. 윤석열은 그런 미국의 시도에 결과적으로 재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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