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11 06:34최종 업데이트 24.12.1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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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맨해튼의 연말 주말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버스보다 도보가 훨씬 빠를 정도로 막히고 또 막혔다. 늘 집회에 갈 땐 걱정이 든다. 허탕 치는 거 아냐? 몇 사람 없으면 어쩌지? 그런데 이날은 이상하게 걱정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답답한 체증을 뚫고 도착한 32가 코리아타운 입구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맨해튼 교통체증보다 답답한 이곳 시간 새벽 3시에 벌어진 한국 국회 표결 결과를 본 평범한 사람들이 맨해튼에 모였다.

4일 하루 종일 한국 상황이 미국 방송을 통해 실시간 중계됐다.최현정

"한국에 계엄령이 발생했다고요? 왜죠?"

미 동부 시간으로 3일 아침 시간에 타전된 긴급 국제 뉴스에 미국 언론들도 긴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 이후 TV 자체를 보지 않았던 나도 CNN, MSNBC 같은 뉴스 전문 채널을 오가며 새로운 소식을 업데이트했다. 처음엔 진행자 멘트나 스튜디오 리포터에 의존해 전하던 소식이 정오를 넘어서는 직접 한국 국회 현장에 나가 있는 기자들을 연결하며 입체적이 됐다.


앵커가 묻는 첫 번째 질문은 "왜?"였다.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안정적이며 문화적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한국에서 왜 쿠데타가 일어났냐는 것이다. 불안한 남미의 어디나 복잡한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작은 나라에서나 가끔 듣곤 하던 그 쿠데타가 말이다.

방송에 출연한 전문가들은 처음엔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북한의 위협 얘기를 한참 설명했다. 매일 한국 뉴스를 접하는 나도 낯선 상황이니 난감한 전문가들로서는 뻔한 북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대답이 점점 구체화되고 정확해졌다. 무엇보다 이 쿠데타의 장본인인 윤 대통령에 대한 문제를 조목조목 짚기 시작했다. 임기 절반이 지난 현재 한국 내 지지율이 18% 이하로 매우 낮고 선거와 관련한 일련의 스캔들과 그의 아내가 연루된 주가 조작 등을 언급하며 지금의 충격적인 선포를 설명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으로 말이다.

미국 언론은 낮은 지지율과 선거 부정, 아내, 뇌물 등의 이슈를 알게 됐다.최현정

불안하게 지켜보던 와중에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던 건, 미국 톱뉴스를 장식한 한국 뉴스 화면을 완전 무장한 계엄군이 점령하지 않아서였다. 한국의 연합뉴스와 JTBC, YTN 화면을 인용한 미국 뉴스 채널의 화면에는 군인들에 맞서서 물러서지 않고 있는 시민들이 나왔다. 군용차량을 막는 시민들의 모습은 천안문 사태의 상징적인 사진을 연상시켰고, 군인의 총구를 막으며 소리치는 젊은 여성의 모습과 무장한 군인들과 대치하는 비무장 시민의 모습이 보였다.

시민들의 도움으로 국회로 들어가 정족수를 채워 계엄 무효를 만들어낸 한국 국회의 의결 장면도 모두 낮 시간대 미국 뉴스의 메인을 장식했다. 이후 계엄을 철회한다는 대통령의 기자회견까지, 4일 하루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드라마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MSNBC <데드라인>의 앵커 니콜 월리스는 이렇게 정리했다.

"한국은 민주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미국 방송 화면 속 계엄령 뉴스는 폭력과 총이 이기는 모습이 아니었다. 국민과 국회와 시스템이 혼돈을 막아내는 영화 같은 감동스러운 장면들이었다. 이는 전 세계 시청자에게 한국의 계엄 상황은 잠시의 해프닝으로 빠르게 수습될 것 같다는 기대를 주기에 충분했다.

MSNBC의 정치 해설 프로그램 <크리스 헤이즈와 함께 올인>은 지난 대선 기간 미국 민주당이 외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We are not going back)가 바로 한국에서 시민들에 의해 실현됐다고 했다.

45년 만의 계엄령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최현정

자명종을 맞춰놓지도 않았는데 7일 오전 3시(미국 동부 시간)에 눈이 떠졌다. 한국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 표결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컴퓨터를 켜고 한국 채널을 찾아 나도 여의도 길바닥에 앉아 있는 시민의 마음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른바 '김건희 특검법'은 2표가 모자라 부결됐고, 대통령 탄핵소추안 상정을 앞두고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퇴장했다.

뉴욕의 새벽 시간, 위로해 줄 사람 없는 그 새벽에 홀로 눈물을 글썽이며 국회 본회의장을 떠난 의원들의 이름을 따라 불렀다. 부결되더라도 투표라도 하라고 쫓아가 붙들고 싶었다. 결국 대통령 탄핵은 의결정족수 미달로 무산되었고 창밖은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추운 길바닥에서 이 모습을 바라봐야 했던 이들의 절망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곧 수습될 것 같던 한국 정치의 막장 사태는 이렇게 다시 급선회했다.

"불법 계엄 규탄한다"(WE CONDEMN THE ILLEGAL MARTIAL LAW)
"윤석열을 탄핵하라"(IMPEACH PRESIDENT YOON NOW)

영어와 한국어로 외치는 구호는 추운 겨울 저녁 맨해튼을 오가는 인파를 뚫고 나갔다. 다들 나처럼 뜬눈으로 지새운 듯했지만 피곤보다는 분노가 더 커 보였다.

며칠 사이 한국 환율은 1430원대를 향해가고 뉴욕 증시에 상장된 한국 기업들의 주가는 일제히 하락세를 기록 중이다. 동남아 어느 환전대에선 한국 원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고 주한 미 대사관은 비자 업무를 비롯한 영사업무 일정 취소를 공지했다고 한다. 비정상에 비정상뿐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온 가족은 3시간을 운전해 참석했다.최현정

나는 일곱 살 때 계엄령을 겪었다. 어느 아침, 아빠와 엄마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나에게 설명했다.

"어젯밤 박정희가 죽었대. 계엄령이 내려졌대."

영화 <서울의 봄>의 배경이 되었던 1979년 12.12 사태 당시 흑백 TV에 나오던 뉴스 멘트로 계엄령을 기억한다. 그리고 45년이 지난 2024년, 바쁘고 혼잡한 뉴욕 한복판에서 한국 대통령의 음성으로 계엄령 뉴스를 듣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었다. 평범한 일상과 소박한 꿈과 계획들이 공포와 허무로 엉망진창이 되는 경험이었다. 미국에 살고 있다 해도 같은 한국인이기에 그 충격은 다르지 않았다.

트럼프 당선 이후 꺼 놓았던 TV를 다시 켰다. 더 강해져 돌아온 트럼프와 최고 수훈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의 의기양양함, 정상이라면 공직 근처에도 가지 못할 이들의 요직 임명 뉴스에 리모컨을 처박아 뒀었는데 더 큰 일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병가 내고 온 간호사, 처음 집회 온 제트 세대

맨해튼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최현정

박근혜 탄핵 집회 때도 매번 너무 추워 이를 갈며 맨해튼에 나갔다. 도대체 왜 제일 추운 날만 골라 국민들을 골탕 먹이는지. 8년 만에 만나는 지인들과 '좋은 일로 만나야 하는데'라며 머쓱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게 반갑고 고맙고 위로가 됐다.

미경 언니는 지난 5일에 열린 집회도 나갔단다. 4일 계엄령 소식을 듣고 출근해 하루 종일 멍했는데 5일 탄핵 촉구 집회를 한다고 해 병가를 내고 참가했단다. 파크애비뉴에 있는 주뉴욕 영사관 앞과 퍼스트애비뉴에 있는 유엔까지 행진했다고.

"갑자기 잡힌 집회인데 젊은 친구들이 많이 나왔더라고. 특히 팔레스타인 시위대들이 합류해 줘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

지금 뉴욕에서 가장 강력한 시위를 펼치고 있는 가자 전쟁 반대 시위대들이? 그동안 한국 젊은이들이 그들을 도와 함께 싸웠는데 이번엔 그들도 우리를 돕고 있는 모양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기존의 촛불과는 비교되지 않는 LED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방탄소년단(BTS) 팬클럽 '아미'의 폭탄 모양 응원봉인 '아미밤'에 '국힘 해체'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가장 크게 소리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었다. 준 아미로서 인사를 했다.

"내 아미밤이랑 디자인이 좀 다르네요. 새 건가요?"
"4년 전에 바꿨는데 그전에 사셨나 봐요."

집회에 등장한 '국힘 해체' '윤석열 퇴진' 응원봉최현정

내가 마지막으로 BTS 콘서트에 간 게 벌써 4년 전인가 싶다. 각자 퀸즈와 롱아일랜드에 사는 두 친구는 구글을 검색해 오늘 집회를 알아냈다고 했다. 이왕이면 인스타그램과 엑스(구 트위터)에 소식을 올렸으면 젊은 친구들이 더 많이 왔을 거라고 아쉬워했다. 나를 비롯한 '노땅'들이 '어디요?', '어떻게 올리죠?'라고 되묻자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했다.

"아, 그럼 젊은 친구들 많이 보는 사이트에는 제가 올릴게요!"

'국힘 해체' 스티커와 배지가 탐이 나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니 다시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덕질용으로 산 기계인데 열받아서... 비싼 건데."

품질이 너무 좋아 많이 만들어 참가자들에게 파는 건 어떠냐고 했더니 고민 없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팔긴요. 기부하는 셈 치고 다음엔 많이 만들어서 나눠 드릴게요."

그날 집회에선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 come)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는데 젊은 친구들이 다음번엔 다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선곡해 오겠다고 약속했다. 나보다 더 열받았을 능력 많은 제트 세대(Gen Z)다.

우울했는데 이들과 얘기 나누며 기분이 좋아졌다. 삭신이 쑤신 나는 슬슬해도 이 친구들과 분노한 제트 세대는 아무리 추워도, 상황이 어려워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들 뒤에서 조용히 커피나 도넛 같은 걸 보급하며 따라만 다녀도 좋을 것 같은 젊은 분노의 에너지를 느꼈다.

한강 작가가 말한 금실

7일 국회 탄핵 투표가 무산되고 몇 시간 후 스웨덴 스톡홀름 한림원에선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강연이 있었다. 소설 <소년이 온다>의 배경과 같은 계엄령이 그녀가 떠나온 조국에서 발령되고 혼돈의 상태가 되고 있는 이 상황이 누구보다 가슴 아프고 힘겹겠다 싶었다.

하지만 작가는 언제나처럼 고요하게 침착하게 강연을 지속하며 그 아우라를 짐작게 했다. 8쪽짜리 강연문에서 작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말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계엄령이라는 현대 사회 정치가 만들어낸 가장 끔찍한 폭력과 아직 끝나지 않은 이 탄핵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한 듯했다. 병가를 내고 집회에 나와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분노와 두려움을 가장 자기다운 방법으로 분출하고 승화시키는 젊은이들 말이다. 우리는 금실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대가 우리를 이기게 하지 않을까? K-드라마의 공식같이 K-Pop의 에너지로 말이다. 같이 한번 해보자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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