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10 18:01최종 업데이트 24.12.1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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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당대의 지성과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 사회대개혁 범국민촛불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여의도 국회 앞에서부터 여의도역까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간이 흐를 수록 참가자 수가 불어나고 있다.권우성

며칠 전 미국의 정치전문 매체 <더 힐>에 실린 글을 읽으며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모욕을 애써 참아내야 했다. 한 미국대학 정치학과의 한국계 미국인 교수가 기고한 글이었는데,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자가 속히 만나 윤석열과 김건희의 망명을 추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대한민국의 정치적 갈등이 극심하며, 헌법재판관의 구성을 볼 때 탄핵이 여의찮고, 윤석열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북한과 무력 충돌까지 감행할 인물이니 상황이 너무 위태롭다는 것이다. 이미 전 세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동아시아에서 또 다른 위기가 벌어지는 것을 미국이 감당할 여유가 없지 않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자가 협력해 하와이에 피난처를 제공하는 대가로 윤석열이 사임하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썼다. 자신들이 추후 옥살이해야 한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테니, 망명이라는 '당근'이라도 있어야 하야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윤석열이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반드시 미국이 개입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내용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대체 이게 무슨 망언인가? 이제 대한민국은 과거에 계엄령을 선포했던 '전두환 정권' 또는 '박정희 정권' 시대로 회귀하는 것도 모자라 '이승만 정권' 시대로 퇴행한 것인가? 미국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더 이상 자체적인 문제해결 능력이 없으며, 우리의 민주주의는 회복력을 잃었는가? 혹은 주권 국가로서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조차 기꺼이 포기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정치력은 회생 불능 상태가 되었는가?

그러나 이런 분노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는 지금 정치와 헌법이 연일 부정되는 상태를 목도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한국의 민주적 제도와 절차가 헌법에 따라 온전하게 제대로 작동할 것을 촉구한다"는 강도 높은 발언을 내놓았다. 바꿔 말하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권력과 이해관계에 현혹된 껍데기들이 서로 통치하겠다고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계엄령 해제 이후 한국 정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무려 내란을 일으킨 자를 탄핵하기는커녕 탄핵안 표결에 필요한 정족수조차도 채우지 못했다. 한편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여당의 당대표가 군 통수권자를 대리해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한다. 동시에 직무에서 배제될 것이라던 윤석열은 버젓이 대통령으로서 임명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렇게 정당성이 전혀 없는 행위들이 아무런 통제 없이 뻔뻔하게 자행되고,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와 절차도 가볍게 무시되는 놀랍고도 자기파괴적인 행태가 우리를 계속 충격에 빠뜨린다.

'의미'와 '가치' 상실한 껍데기들이 판치는 사회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7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제안설명을 하던 중 국민의힘 의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표결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남소연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미국의 학자들 역시 자신들이 믿었던 정치가 완전히 실종되는 모습을 보며 그 충격을 여러 경로로 표현하려 애썼다. 특히 몇몇 정치철학자들은 당대의 현상을 니체의 허무주의(nihilism)를 빌려와 분석한 바 있다. 여기서 허무주의는 이 삶이, 또는 이 세상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니체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단지 그런 허탈감이 아니라, 한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가치들이 터무니없이 손상되어 하찮은 것으로 전락해 버리는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가 한국에서 견뎌내고 있는 상황이 바로 그러하다. 자유, 공정, 정의, 민주주의, 또는 헌법과 같은 우리 사회의 최상위 가치들이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고 그 의미를 타락시키고 있는 상황 말이다. 예컨대, '공정'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처럼 반복해서 회자되지만, 그 의미는 그저 우스꽝스러우며 결코 현실 속에서 증명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고, 진짜 뉴스와 가짜 뉴스를 판별하지 못한 채 헛된 이야기에 빠져든다. 심지어 '지도자'조차 스스로 현혹되고, 동시에 우리를 현혹한다. 정치를 정치로서 기능하게 하는 고결한 가치들은 야만적 권력욕과 경제적 이득 앞에서 철저하게 힘을 잃고 고꾸라진다. 이것이 바로 저열함과 퇴행으로 설명되는 허무주의 사회의 모습이다.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껍데기들이 판을 치는 사회라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윤석열을 단죄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힘들게 일구어낸 핵심 가치들을 되살려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껍데기는 가라"고 외쳐야 한다. 공정, 정의, 평등, 자유와 같은 기초적 가치들이 정치 기술자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사회, 우리 삶을 지탱해야 할 핵심 가치의 진정한 의미가 긍정되고 실현되는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내란이라는 중범죄 앞에서도 자신의 밥그릇만 챙기는 기득권의 민낯을 또렷하게 보지 않았는가? 그들은 결코 스스로를 쇄신하지 않을 것이므로 현 시국을 사회 변혁의 기회로 바꿔낼 것은 오직 민초들뿐이다.

우리가 원한다면 이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의 시간이다. 당연히 이럴 때일수록 민중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운동의 에너지가 중요하다. 거리로 나올 것을 호소하는 각계의 입장문들이 요구하는 세상이 바로 그런 변혁의 에너지를 보여준다. 노동자, 장애인·농인, 성소수자, 여성 단체들의 재빠른 입장문들을 본다. 단순히 윤석열 탄핵을 넘어 이 세상을 변혁시켜야 한다는 강력한 외침이다.

그동안 한국의 사회운동은 변혁의 이상을 함께 만들어왔으며, 우리 모두는 이미 끈질기게 거리로 나갈 것을 결의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되살릴 것이다. 이제 민중들의 시간이다! 껍데기는 가라!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소셜 코리아 자문위원)김정희원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정희원은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소셜 코리아> 자문위원입니다. 권력, 정의, 불평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조직 이론 및 조직 행동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공정 이후의 세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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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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