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09 13:11최종 업데이트 24.12.09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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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와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국정 수습 방안을 담은 공동 담화문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7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무산 뒤 윤석열 정부가 국민의힘과 함께 '질서 있는 퇴진'을 앞세워 국면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8일 발표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한덕수 국무총리의 공동 담화문은 "질서 있는 대통령 조기 퇴진"이라는 논리하에 '대통령 퇴진 전까지 당 대표와 총리가 정례 회동을 하고 당과 총리가 긴밀히 협력하는 방식'을 수습책으로 내놓았다.

'즉시 퇴진'이 아닌 '조기 퇴진'이다. 국민이나 야당의 참여를 무질서로 전제하는 '질서 있는 퇴진'이다. 윤석열이 좀 더 대통령실에 출근하고 김건희가 좀 더 대통령 관저에 거주하도록 하면서, 집권 세력이 선(善)이라고 믿는 방식으로 다음 체제를 준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체제 존립이 위태롭거나 국가수반이 공석인 비상 상황에서 '질서 있는 퇴진' 혹은 '질서 있는 수습'을 앞세워 기존 체제를 온존시키며 과도기 상태를 작동시킨 사례는 1945년 8월 15일, 1960년 4월 26일, 1961년 5월 16일과 1962년 3월 22일, 1979년 10월 26일 및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7일 및 8월 16일, 1987년 7월 1일, 2016년 12월 9일에 있었다.

여운형과 총독부가 공동 주도

조선총독부 직원이었다가 훗날 외무성에서 한일 관계를 담당한 모리타 요시오의 <조선, 종전의 기록>은 8·15 아침에 지금의 서울 충무로역 3번 출구 부근인 정무총감 관저(훗날 한국의집)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준다. 이날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에게 "연합국 군대가 들어올 때까지 치안 유지는 총독부가 담당하겠지만, 측면 지원을 부탁하고 싶습니다"라고 제안했다.

여운형과 총독부가 공동 주도한 '질서 있는 조기 퇴진'이 그렇게 개시됐다.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발족되고, 전국 각지에서 건준 지부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소련군이 아닌 미군이 한반도 남부에 들어온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조선주둔군 일본군은 8월 21일에 건준 해체를 요구했다. 애초에 여운형을 선택한 것은 소련이 진주할 경우에는 좌파 진영과 대화가 통하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일본군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이처럼 처음에는 건준과 총독부가 공동 주체였다가 며칠 안 가 갈등이 시작되더니, 9월 8일 미군 상륙 이후에는 미군정과 총독부가 공동 주체가 됐다. 총독부가 철수한 뒤에는 친일세력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공동 주체의 한 축을 차지했다. 이는 독립운동진영이 약화되고 친일세력이 되살아나면서 남북분단으로 이행하는 주요 배경이 됐다.

1960년 4·19혁명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오후 5시) 국무위원 10명이 사표를 내고(21일) 야당 출신 부통령 장면이 사임(23일)했다. 그런 뒤인 26일 오전 10시 30분,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전날 이승만은 제자인 허정 전 총리서리를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당시의 정부조직법 제8조 및 제13조는 외무부 장관을 수석국무위원으로 지정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따로 선출해 야당 출신이 부통령을 차지한 상황에서 장면 부통령이 사임했기 때문에, 허정을 부통령 다음 자리인 수석국무위원에 앉히는 25일의 조치는 '질서 있는 퇴진'을 위한 이승만의 구상을 반영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허정은 5월 29일 이승만을 하와이로 도피시키고, 정국의 방향을 '선 총선, 후 개헌'이 아닌 '선 개헌, 후 총선'이 되도록 만들었다. 자유당 의원들이 의석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개헌 작업을 진행시켜 여권에 불리한 헌법의 출현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의도는 주효해, 3·15부정선거 관련자 및 4·19 진압 책임자들을 처벌할 법적 근거가 그해 6월 15일 개헌에 반영되지 못했다. 7월 29일 총선에서 자유당이 2석의 군소 정당으로 전락한 뒤인 그해 11월 29일의 개헌에 가서야 그 근거가 만들어졌다. 질서 있는 수습의 주체인 허정이 조장한 7개월의 시간 지체는 혁신세력(진보진영)과 민주당의 영향력 혹은 국정 장악력을 떨어트리고, 군부 쿠데타 음모에 대한 대응력을 약화시키는 배경이 됐다.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 전두환과 국보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된 이 기구는 장면 내각을 붕괴시킨 상태에서 허수아비인 윤보선 대통령과 공조하는 형식으로 '질서 있는 수습'을 진행했다. 윤보선의 사임으로 또다시 위기가 조성된 지 이틀 뒤인 1962년 3월 24일에는 박정희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됐다. 최고회의가 유지되는 가운데 행정부가 다소 강화되는 방향으로 '질서 있는 수습'의 국면이 다소 변경됐다.

부마민주항쟁으로 박 정권이 위태롭던 와중에 발생한 1979년 10·26 사태 직후에는 최규하 총리가 권한대행이 되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사태 수습을 맡았다. 민중항쟁으로 유발된 내부 분열에 의해 정권이 휘청거리게 됐으니, 민주화세력이나 야당이 참여하는 시국 수습이 비교적 안정적이고 바람직했다.

하지만 최규하 정부와 계엄사령부는 이들을 견제하는 데 치중했고, 이는 군부 소장파의 쿠데타 움직임에 대한 대응력을 떨어트렸다. 이에 힘입어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는 1979년 12월 12일에 이어 1980년 5월 17일(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에 각각 1차례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이 군부만 장악하고 행정부는 장악하지 못한 12·12 이후로는 신군부가 최규하 대통령 및 신현확 총리가 이끄는 약체 정부를 견제·감시하면서 질서 있는 수습을 이끌고, 5·17 쿠데타 및 5·18 광주학살 직후인 1980년 5월 31일부터는 비상정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질서 있는 수습을 주도했다. 이날부터는 전두환이 군부는 물론 행정부까지 장악했다. 민주화 세력과 야당이 탄압받는 가운데 진행된 이 시기의 '질서 있는 수습'은 한국 정치를 '박정희 시즌 2'로 몰고 갔다.

1962년 3월 22일 그랬던 것처럼, 1980년 8월 16일에도 허수아비 대통령이 군부의 등쌀에 못 이겨 사퇴했다. 국보위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질서 있는 수습'을 지휘하던 전두환은 최규하 사임으로 국정 공백이 발생한 뒤 '질서 있는 수습'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꿨다. 21일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국가원수로 추대된 그는 27일 유신체제 기구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돼 실질적·형식적으로 국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타격을 받은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위원이 6·29선언(직선제 제안)을 발표하고 전두환이 7·1선언을 통해 이 제안을 수용하는 방법으로 위기 탈출을 모색했다. 전두환은 7·1선언을 통해 여당에 대한 정국 위임 및 2선 퇴진을 시사했다.

그 뒤 노태우가 질서 있는 수습을 주도하는 듯이 보였지만, 전두환이 실제로 퇴진한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의 말년을 보장하는 국가원로자문회의 규정이 현행 헌법 제90조 제1항에 들어간 것은 그해 10월 12일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에 그의 손길이 닿은 결과였다. 그의 2선 퇴진 시사는 속임수였다.

헌법재판소와 황교안 권한대행 정부

2016년 12월 24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정권 즉각퇴진 9차 범국민행동’에 참석했던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황교안 총리 구속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권우성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의 박근혜 탄핵 때는 황교안 총리가 탄핵소추 당일인 12월 9일부터 권한대행이 됐다. 1960년 허정 체제와 외형상 비슷해 보이는 이 체제는 결정적 차이점이 있었다.

100만 명을 상회하는 국민들이 주말마다 촛불시위를 열고 여기서 나온 구호들이 국회를 움직였다. 그런 속에서 탄핵소추를 주도한 국회와 탄핵 심판을 맡은 헌법재판소가 황교안 권한대행 정부와 더불어 질서 있는 퇴진의 중심이 됐다. 8·15 이후에는 민중이 잠간 동안 공동 주역이 됐다가 약화됐지만, 촛불혁명 때는 국민의 목소리가 주말마다 계속 울려 퍼지고 국민의 뜻을 따르는 국회의 역할이 2017년 3월 10일 탄핵 선고 때까지 이어졌다.

이 상황은 박근혜 탄핵을 원하는 국민들, 정권 인수를 원하는 민주당, 탄핵의 폭풍을 피해 가려는 새누리당 모두에 득이 됐다. 2017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으로 개칭한 새누리당은 촛불혁명의 불길 속으로 타들어 갈 확률이 높았지만 그중 상당수가 박근혜 탄핵을 받아들임에 따라 국민의 분노를 피하고 정당 해체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는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지만, 이들이 2022년 대선 때 살아나는 상황을 낳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나타난 질서 있는 퇴진 혹은 수습 중에서 민중 혹은 국민의 참여가 두드러진 것은 1945년과 2016년 사례다. 1945년에는 민중과 독립운동세력의 참여가 도중에 무산되면서 한국 역사가 해방 및 자주독립과 상반되는 방향으로 왜곡됐고, 2016년에는 민중의 참여가 끝까지 관철돼 제한적으로나마 성과를 낳았다.

2016년을 제외한 나머지 사례들에서는 국민이나 민중의 참여가 견제를 받는 가운데 외세와 친일보수세력 혹은 보수진영 내부의 신·구 세력이 권력을 나눠 갖는 과도기 양태가 등장했다. 이것이 국민 생활과 한국 민주주의에 어떤 악영향을 미쳤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결국에는 친일보수세력과 미군정이 주도한 1945년의 질서 있는 수습은 민족분단과 친일정부의 출현을 낳았고, 허정 정부가 주도한 1960년의 질서 있는 수습은 이승만 정권의 청산을 방해하고 5·16 쿠데타의 밑거름이 됐다. 유신체제 잔존세력과 신군부가 주도한 1979년과 1980년의 그것들은 전두환 폭정으로 이어졌고, 외형상으로는 노태우와 민정당이 주도했지만 배후에 전두환이 있었던 1987년의 그것은 군부 정권의 변신과 집권 연장으로 이어졌다.

한동훈·한덕수가 말하는 '질서 있는 퇴진'에는 국민과 야당이 없다. 비상계엄을 도운 행정부와 그것의 진압을 저해한 집권당이 주도하는 이 구도가 역사를 퇴보시킬 가능성은 100%다. 이런 식의 질서 있는 퇴진이 역사를 발전시킨 사례는 없었다. 선례가 한 번도 없지만 새로이 성공시키는 기적도 이따금 발생하지만, 윤석열을 옹호하는 세력에 둘러싸인 한동훈·한덕수 및 그 추종자들이 그런 기적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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