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14 12:00최종 업데이트 24.12.1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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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의 본질은 군정 실시이므로 미군정 같은 점령군 체제에서는 별도의 계엄이 불필요하다. 군정은 그 자체가 일상적인 계엄 상태다. 그런 미군정 시대에도 미군은 계엄을 따로 발포해야 했다. 한국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정을 그런 상태로 몰아넣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윤씨 성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이름이 윤장혁인 그는 지금은 거의 기억되지 않지만, 미군정에 맞서 한국 대중의 이익을 대변했다는 점에서 꼭 살펴봐야 할 인물이다. 계엄령 발포를 통해 미군정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 의사가 명확해졌으니, 그가 이뤄낸 성과의 무게는 상당했다.


윤장혁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명단에는 없지만, 미군정뿐 아니라 일제 통치자들까지 바짝 긴장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혁명가는 교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피압박민족의 절대 승리를 기한다'는 표어를 내걸고 대구 지역 항일운동을 이끈 주역이다. 일제만 물러갔을 뿐 해방의 과제가 아직 남은 1946년에도 교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투쟁을 벌인 전형적인 투사다.

을사늑약(11.17.) 여덟 달 전인 1905년 3월 16일 출생한 윤장혁은 41세 때인 1946년에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의장 및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위원장 직함으로 미군정의 경제정책 실패를 규탄하는 '대구 9월 총파업'을 주도했다. 이것이 미군정에 대한 거국적 투쟁인 대구 10월항쟁으로 연결되고 당황한 미군정이 계엄령을 발포하는 비상사태로 이어졌다.

그가 주도한 9월 파업은 여러 산업으로 확산됐다. 9월 23일 대구 철도노조원 1000여 명의 참여로 시작된 파업은 위의 대구평의회가 대구시투쟁위원회로 전환된 그달 27일부터 섬유·인쇄·출판·화학·중공업 분야로 번져갔다.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위한 파업을 벌일 때마다 주요 언론들은 "시민 불편이 예상된다"는 등의 보도로 노동자들의 입장을 약화시키곤 한다. 9월 총파업 때는 그런 현상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영남일보> <경북신문> <대구시보> <민성일보>가 파업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이 언론사들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조하고 제작 거부에 들어간 결과, 보수세력의 파업 비판 논리가 언론을 통해 대중의 정치의식을 약화시키는 현상이 비교적 억제됐다. 이에 힘입어 파업 수행이 수월해지고, 당황한 미군정이 윤장혁 쪽에 협상을 요구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민심의 지지 받아 정국 이끌어

협상 국면의 진전으로 상황이 잠잠해지는 듯했다. 대구역 광장에서 바리케이드를 친 미군정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풀고 철수하는 쪽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합의 당일인 10월 1일의 돌발 사태가 대구 10월 항쟁과 계엄령 발포를 초래했다. 그달 15일 자 <동아일보> 기사 '무서운 소동 첫날 10월 1일'은 9월 총파업이 10월 항쟁으로 전환되는 역사적 순간을 보도한다.

"기억도 뚜렷한 10월 초하로날 밤! 대구역전 공회당호텔 부근을 싸고 있는 수백 명의 무장경관대의 무시무시한 경계를 뚫고 중앙통과 행정(幸町) 거리를 수천 명의 남녀 공장 직공이 태극기를 선두로 적기가를 부르며 금정(錦町) 노평본부를 향하야 시위 행열을 시작하였다.

이때 돌연 역전 무장경관대 측으로부터 발포된 한 방의 총소리에 행열은 발을 멈추고 '죽여라 쏘아라' 하는 아우성이 들리고 부근을 왕래하든 시민들은 동서남북으로 흐터져 사태의 긴박함을 걱정하였다. 경관대의 발포는 허가 없는 시위 행열을 중지시키려는 것이었으나 벌서 거기에는 감정이 솟아올라 생사를 이즌 항거적 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곧 끝날 것 같던 총파업이 1방의 발포와 함께 노동자들뿐 아니라 시민들도 대거 참여하는 대구 10월항쟁으로 전환됐다. 그달 4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경찰청장인 조병옥 군정청 경무부장은 3일 기자회견에서 위 상황을 브리핑하면서 "이 통보를 접한 경북 미군정관은 미국 군대를 파견하고 즉시 대구 시내에 계엄령을 나리고 노동자에게 점거된 경찰청을 마찰 없이 탈회하고 정상 상태로 만들었다"면서 "그러나 이일 오후 십일시 반까지는 근방 경찰서와 지소는 탈완치 못하였다"고 설명했다.

미군정은 대구 주민들의 저항을 짓누르고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총구를 겨눴지만, 이는 사태를 도리어 악화시키는 자충수가 됐다. 진실화해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10월 6일까지 경북 지역으로 번졌고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고 기술한다.

계엄을 따로 선포할 필요 없는 군정하에서 계엄령이 발포됐다. 계엄 상태가 이중적으로 겹쳤다는 점에서 미군정하의 계엄령은 이번에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계엄을 포함한 해방 이후의 역대 계엄들보다 강력했다. 옥상옥 계엄, 더블 계엄으로 표현할 만한 이런 계엄을 미군정이 발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민심의 지지를 받는 윤장혁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당시의 정국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을 당황시킨 윤장혁의 신상명세는 조선총독부 법원의 판결문에서 확인된다. 1930년 3월 11일 작성된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은 그의 본적이 경북 예천군 지보면이고 현 거주지가 예천군 남본동이라고 알려준다. 또 직업은 잡화상이라고 말한다. 일제강점기판 편의점 점주였던 것이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

1929년 8월 8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윤장혁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윤장혁은 편의점 경영 전에는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중등학교) 학생이었다. 1928년 3월 이 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당시 그의 얼굴이 1929년 8월 8일 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남학생들 사진 가운데 다섯 번째 줄 셋째 사진이 그의 것이다. 학생모를 쓰지 않아 얼굴 모습이 비교적 뚜렷하다.

그는 '핫'한 운동권 청년이었다. 그가 주도적으로 일으킨 대구학생사건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됐다. 위 신문뿐 아니라 1928년 12월 24일 자 <조선일보>도 마찬가지다. <동아일보>는 "한동안 세상의 이목을 놀래인" 사건, <조선일보>는 "최근에 닐어나는 중대 사건 중의 하나"라는 표현을 썼다.

대구학생사건은 대구공립보통학교·대구공립중학교·대구농림학교의 항일운동권 학생들이 '혁명가는 교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등의 구호를 내걸고 결성한 혁우동맹(적우동맹·일우동맹)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일어난 독립운동사건이다.

위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 실린 피고인은 윤장혁을 포함해 24명이다. 이 외에도 참여자들이 많다. <조선일보>는 단원이 130명이라고 전했다. 전국이 아닌 특정 지역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당시의 청년 엘리트들이 대거 참여해 식민통치 전복을 시도했다. 이런 대형 공안사건을 주도한 일로 인해 윤장혁은 일제강점기판 국가보안법인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받았다.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사이트에 나오는 윤장혁 외 23인 판결문국가기록원

위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은 독립운동 금지법인 치안유지법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판결문은 22세 때인 1927년 2월을 전후해 본격화된 윤장혁의 투쟁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윤장혁 등이 치안유지법에 걸린 것이 독립운동 때문이었음을 명시한다.

판결문은 "피고 윤장혁 등 여러 명은 소화 2년 2월 이후 공산주의자 박광세, 장적우 일명 장홍상 등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의 강의를 듣고 공산주의에 공명함과 동시에 조선독립을 희망하여 현재의 사유재산제도를 파괴하고 공산제의 새로운 사회를 실현함으로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하여" 비밀 서클을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혁우동맹은 비밀 조직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적 영향력도 발휘했다. 이 동맹의 영향권인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1928년 11월에 동맹휴교 투쟁이 벌어지고 이 때문에 동맹의 실체가 발각된 사실이 그것을 보여준다.

징역 3년을 받은 윤장혁은 감옥 안에서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진 일로 수감된 장진홍이 옥중에서 순국하자 윤장혁은 대구형무소 안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징역 8개월을 덤으로 받았다.

그 정도로 고초가 많았던 윤장혁이 해방 이듬해인 1946년 9월에는 미군정을 상대로 대규모 투쟁에 나서 10월 대구항쟁과 미군정 계엄령을 촉발시켰다. 미군정은 그에게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미군정이 그를 가둔 곳도 대구형무소다. 나중에는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해방 이후의 가장 강력한 계엄령을 초래한 이 독립운동가는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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