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9월 20일 자 <조선일보> 기사 "전환기의 내막 <190> 발췌 개헌 ⑨ 비상계엄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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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를 위협하는 모습을 처음 연출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하수인인 친일 군인 원용덕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5월 25일 오전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들은 국회의원들의 국회 등원을 봉쇄했다.
전쟁 중이라 자가용을 이용할 수 없었던 의원 47명이 26일 아침에 통근버스를 타고 임시 의사당인 경상남도청을 향했다. 버스가 도청 정문을 통과할 때의 상황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이 그곳에 미리 도착해 있었던 김문룡 경향신문사 기자다. 1981년 9월 20일 자 <조선일보>에 그의 목격담이 실렸다.
"버스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정문을 통과하려 하자, 정복·정모에 무장한 헌병 10여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상관의 지시에 따라 불심검문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버스에 타고 있던 야당 의원들은 이유 없이 헌병에 의한 검문에 응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헌병들의 검문 사유는 버스 안에 빨갱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김문룡 기자는 헌병들은 빨갱이를 잡겠다며 버스에 승차하려 하고 의원들은 버스 문을 잠근 채 헌병대에 저항하고, 길 가던 행인들은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며 몰려드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흘러 정오경이 되자 더 황당한 장면이 연출됐다.
"이윽고 헌병대에서 보내온 견인차가 버스의 뒷범퍼를 추켜들고 끌고갔다. 끌려간 의원 중 임흥순(민국)·서범석(민국)·김의준(민우)·이용설(무소속)·이석기(원내자유) 의원 등은 국제공산당 혐의로 즉석에서 구속됐다."
운전석 쪽을 들어 올리면 승객들이 의자에 머리를 기대기가 쉽지만, 뒷쪽을 들어 올리면 그게 다소 곤란해진다. 계엄군이 고약한 방식으로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견인해 갔던 것이다.
당시 계엄법 제11조 제1항은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경우에는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고 이를 공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했으므로 계엄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계엄하에서도 국회 기능만큼은 살려둬야 했다. 그런데도 이승만 정권은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의원 통근버스 뒤 범퍼를 들어 올린 채 견인하는 민주주의 파괴 행위를 일삼았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한 의사 출신
이를 실무적으로 주도한 원용덕은 대한제국 멸망 2년 전인 1908년 서울에서 출생하고 1931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의사 출신이다. 그런 그가 1952년의 계엄선포 다음날 국민을 위협하는 포고문을 발포했다. 이 포고문의 결론 부분은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선포 직후에 박안수 계엄사령관이 발포한 포고령 제1호의 결론과 비슷했다.
박안수 계엄사령관은 '전공의 처단'까지 거론되는 포고령의 결론 부분에서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9조에 의하여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에 의하여 처단한다"고 경고했다.
원용덕은 "이상(以上) 치안에 관하여 비협력 또는 범과(犯過)를 할 시는 계엄법 제13조에 의거하여 예비구속 또는 체포·수사 등에 있어 영장을 발부하지 않고 즉시 이를 집행·처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계엄법 제13조는 "체포, 구금, 수색" 등에 관한 특별조치를 허용했다.
원용덕이 전쟁과 경제난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상대로 그런 경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 경험과 무관치 않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 중에 치러질 제2대 대선(1952.8.5.)에서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한 달 전에 불법 개헌(7.4.)을 저질렀다. 이 개헌을 위한 사전 작업이 5·25 비상계엄이다. 이런 불법적인 폭거에 가담해 국민을 위협하는 모습은 원용덕의 친일행위를 떠올리게 할 만했다.
원용덕은 의사 중에서도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병원을 개업했다. 1931년에 병원을 개업한 그의 선행이 그해 10월 8일 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강릉읍 임정(林町)에서 원용덕 씨가 경영하고 잇는 관동병원에서는 본월 1일부터 일반 환자를 동정하야 무료 진찰을 시행하는 동시, 약가도 종전보다 4할이나 인하한다 하며 의지 업는 사람들에게는 무료치료하야 준다는데 일반은 전긔(前記) 의사의 특지(特志)에 감사하야 마지안는다 한다."
이런 선행까지 베푼 그가 실제로는 지각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이 2년 뒤 증명됐다. 1931년에 일본군국주의가 자행한 만주사변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가중되던 시기에 그는 일제의 만주 지배를 돕고자 병원을 청산하고 고국을 떠난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원용덕 편은 "1933년 만주국군 군의(軍醫) 특임으로 만주국군 제1교육대사령부에서 근무했다"고 말한다.
일본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남만주철도의 철로를 고의로 폭파한 뒤 이를 중국인의 소행으로 몰아가며 만주를 점령했다. 이런 모습은 일본의 우방인 영국과 미국이 볼 때도 사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영·미와 맞붙게 된 계기는 바로 이 만주사변이다.
만주사변의 그 같은 의의를 몰랐을 가능성이 낮은 세브란스의전 출신의 개업의가 일부러 만주까지 올라가서 일본군을 치료하는 군의관이 됐다. 진찰료 무료, 약값 40% 세일의 파격적 선행을 무색게 하는 엉뚱한 선택이었다.
'1952년판 서울의 밤'의 장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