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어린이정원 잔디마당 내 잔디가 팬 곳 주변에 펜스를 쳐놓았다.
녹색연합
그래서 간혹 잔디가 패여있기라도 하면 붉은 펜스가 둘러쳐지고 일정 기간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공원이 되기엔 독성 오염물질이 환경오염 우려기준을 수십 배 초과해 있지만 별도의 토양오염 정화 없이 잔디로만 슬쩍 덮어 놓았기 때문이다.
보통 휘발유에는 상당량의 벤젠, 톨루엔, 에틸벤젠, 크실렌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벤젠은 1군 발암물질인데 단기간 흡입할 경우 현기증, 두통, 졸도 등이 발생하고 고농도를 흡입하면 사망, 장기간 흡입 시 면역체계 이상이나 암을 유발한다. 톨루엔은 중추신경계통 기능 저하를 발생시키고 언어소통에도 문제를 일으키며, 소화계통에도 영향을 주고 두통이나 불면증을 유발한다.
에틸벤젠은 급성 증상으로는 현기증과 가슴이 답답한 증상을, 크실렌은 장기간 흡입 시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주어 두통, 현기증, 피로감, 경련, 호흡곤란, 혈관계와 신장에 영향을 준다. 미군기지 기름 유출 사고의 종류 중 하나인 제트유(JP-8)에도 이와 같은 벤젠, 톨루엔, 에틸벤젠, 크실렌이 포함되어 있다.
용산 미군기지에서는 위 성분들을 함유한 100건 이상의 유류 유출 사고가 있었고 이로 인해 석유계총탄화수소 아연, 크실렌, 비소 등이 공원으로 부적격한 농도(많게는 36배)로 검출되었다.
마땅하고도 상식적인 책무 방기한 정부
정부는 이렇게 오염된 공간인 용산어린이정원에서 올 초 교육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홍보했다. 늘봄학교란 이름으로 하반기부터 내년 초까지 티볼, 태그 럭비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신체활동과 도심 속 자연공간을 활용한 생태 체험교육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오염된 땅에서 생태체험 교육이라니 언어도단이 따로 없지만, 서울시교육청까지도 뒤질세라 학교 밖에서도 늘봄 프로그램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용산어린이정원을 서울시 제1호 거점형 늘봄센터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용산어린이공원을 뛰놀며 배워요", "어린이 교육·체험 공간 자리매김"이란 제목으로 늘봄학교가 운영되기 시작한다는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한강초등학교, 원효초등학교, 서빙고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어린이 정원사 체험이나 스포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내년에는 더 많은 학교 어린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규모를 확대할 예정이라며 자화자찬하듯 홍보했다.
행정과 교육청이 이렇다면 국회가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1일 박정현 국회의원 대표 발의로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 개정안이 발의되었다.
법 개정안 취지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현재는 주한미군에게 제공된 공여구역을 다시 대한민국에 반환할 경우 국방부 장관은 이 구역을 징발해제, 양여, 매각 등 처분하기 전에만 지상물, 지하매설물, 위험물, 토양오염 등을 제거하도록 되어 있는데, 일반인에게 개방할 경우에도 토양오염 제거를 의무화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녹색연합과 더불어민주당 박정현 국회의원이 반환 미군기지 개방시 토양오염 정화를 의무화를 위한 '미군 공여구역법' 개정안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정현 국회의원실
용산 미군기지처럼 발암물질과 독성물질을 제거하지 않은 곳을 임시 개방하거나, 토양오염도가 높아서 공원이 될 수 없는 곳을 어린이정원이란 이름으로 편법 개방하고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함이다.
정부는 국민을 위해물질로부터 보호해야 하지만, 마땅하고도 상식적인 국가의 책무를 방기하고 있으니 국회라도 나서서 시민들을 오염된 공간으로부터 격리, 보호해야 한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토양오염이 제거되지 않은 미군기지의 개방, 용산어린이정원 개방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된다. 법 개정이 시급한 이유다.
시민사회와 국회가 적극 나서야
토양오염 정화 전에 일반인에게 개방되면 안 되는 이유는 비단 용산어린이정원 때문만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부산 하야리아 캠프 부지는 6개월간, 인천 캠프 마켓은 반환 후 정화 없이 7개월간 시민에게 개방된 선례가 있다. 두 곳 모두 중금속과 유류 오염물질이 검출된 곳이었지만, 오염 정화 없이 일반공개되었다.
지금은 부산시민공원이 된 하야리아 부지는 100억 원 이상을 들여 토양정화 작업을 실시하고도 수년이 지나 오염된 토양이 대량 발견되어 오염 문제가 불거진 바 있다. 춘천 캠프 페이지, 의정부 캠프 시어즈 유류저장고 부지 역시 정화 작업을 완료했음에도 부실 정화 논란이 발생한 바 있다.
토양오염 정화는 결코 간단치 않은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산 미군기지의 경우도 전체 부지 반환 후 7년간 정화 작업과 공원 조성을 완료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정화 작업은 통상적으로 인허가 신고, 시설물 철거 및 폐기물 처리 등의 준비 단계를 거치고, 실시설계(기초자료 조사 및 분석, 실시설계 조사, 정화 공법 선정), 정화 작업(오염 토양 굴착 및 되메움, 토양 정화, 지하수 정화), 정화검증(검증기관 선정, 검증 세부내역 및 결과), 전체 공정관리 등을 거쳐야 한다. 물론 전 과정에 대한 투명한 공개 역시 필요하다.
이 법은 지난 21대 국회에서도 발의된 바 있다. 그러나 제대로 심의조차 되지 않은 채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오염된 땅을 어떠한 문제의식도 없이 그대로 덮어버리곤 치장하여 국민에게 개방하는 정부, 그런 곳을 개방 1년 만에 수십만 명이 방문했다고 치적으로 삼고 생일잔치하는 정부. 개원 2년이면 두 배, 3년이면 세 배 늘었다고 체험행사, 버스킹 투어, 스탬프 투어, 물놀이 행사에 이어 늘봄학교 등을 운영할 정부의 행태를 막기 위해 시민사회와 함께 국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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