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19 14:08최종 업데이트 24.12.1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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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차유진의 사는이야기입니다.[기자말]
지난 에세이(돈 떼이고 바람 맞아 울고... 나의 영어 고행 일지 https://omn.kr/2920e) 에서도 고백했지만, 오래전부터 영어 수업에 관한 징크스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하고 싶다는 부푼 희망을 안고 꾸준히 영어공부를 해왔다. 온라인 영어강의, 미드 대본 통째로 외우기 등, 온갖 시도를 해봤으나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본격적으로 영어 징크스의 시동이 걸린 건, 외국인 친구를 구하러 나설 때부터였다. 언어교환 사이트는 실사대면이 힘들다보니 지속성이 어려웠다. 가까스로 성사된 재미교포와의 1:1수업은 상대편의 약속 불이행만 거듭될 뿐이었다.


급기야 악천우를 뚫고 카페에 도착한 날마저 바람을 맞고, 식어버린 커피를 마주한 채 서러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후로도 영어채팅을 빙자한 금전 사기까지 겪는 등, 나의 영어수업은 그야말로 고행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흘러 비로소 만난 외국인 친구 카린은 나에게 단비같은 기쁨이었다. 가끔씩 만나 서로의 일상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영어 귀도 차츰 트이기 시작했다. 당초 약속대로 한국말도 가르쳐 주려 했으나, 카린은 괜찮다며 대부분의 시간을 영어로만 할애해줬다. 그렇게 일방적인 도움만 받다보니 언어교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미안함이 날로 커져갔다.

새로 만난 나의 영어 선생님, 그런데

카린도 학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나역시 촬영 일정 등으로 여름 이후로는 소식이 뜸해졌다. 다시 홀로 영어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 엄마가, 당신이 사회복지관에서 배우고 있는 영어 수업 선생님에 관해 언급했다. 그 편으로는 아직 생각이 없다 했음에도 등떠밀리다시피 선생님과의 면담 자리를 갖게 되었다.

지난 트라우마로 인해 경계심만 잔뜩 높아진 탓에, 초면임에도 밝게 인사드리지 못했다. 전후 사정을 들은 선생님은 한국인 자신보다 함께 일하고 있는 원어민 선생을 추천해 줄테니 테스트를 한 번 받아보라며 첫 수업을 무료로 제안해주셨다.

다시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 위해 초행길을 나서는 심정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듯 했다. 듣던 대로 원어민 선생 데이빗은 나무랄 데가 없어 보였다. 나이를 먹어 좋은 점이 있다면, 이제 사람의 진가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데이빗은 1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깨끗이 글로 정리해 주고, 서툴게 내뱉었던 문장들까지 매끄럽게 다듬어 주었다.

무엇보다 작은 책방 한구석에 마련된 대여공간이 소소하고 오붓해서 마음에 들었다. 책방 여사장님도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을 선물해 주시며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오랫동안 얼어붙었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리려는 것인가.

이제 더는 영어로 인해 사람한테 상처 받을 일은(카린은 제외이다!) 사라지겠구나 싶어, 그제서야 안도의 미소가 지어졌다. 테스트 수업이 끝나고 주선해준 선생님(원어민 선생님들 매니저 일도 하신다)에게 다음주부터 1주일에 한 번씩, 수업 약속을 잡고 수업료를 송금하기로 했다.

모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건물 안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 안으로 들어와 자동차 키를 꾹 눌렀다. 그런데 "삐빅-!"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전멸등을 깜빡이며 여기 있다고 손 흔들듯 반겨주던 차가 도통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사전에 주차 위치 사진을 찍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영어 의지를 발목잡기 위해 더 강력하게 돌아온 징크스는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었다.
영어 의지를 발목잡기 위해 더 강력하게 돌아온 징크스는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었다.rafael_as_martins on Unsplash

급기야 50층 주상복합건물 지하의 넓은 주차장 안에 갇혀 30여분을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애초에 잘못된 주차 정보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도(지하 1층에 주차했는데, 지하 2층으로 내려가라고 하셔서 순간 헷갈려 버렸다) 연락받고 당황한 나머지, 부리나케 내려와 주차장 통로를 함께 전력질주했다. 그렇게 다리 힘이 풀리고 온 몸에 땀을 흠뻑 적신 후에야, 마침내 차와 재회할 수 있었다.

끔찍했던 영어 징크스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또다시 영어 의지를 발목잡기 위해 더 강력하게 돌아온 징크스는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었다.

두 번째 수업날은 주차장 안이 만차가 되어 30여 분을 빙빙 돌며 또 진땀을 흘렸다. 책방 사장님은 한가진 오전 시간에 매우 드문 경우라며 고개를 갸우뚱 하셨다.

세 번째 수업날은 출차를 하려다가 코너 공간이 비좁아 기둥벽에 차의 뒷문이 심하게 긁혀버렸다. 내 부주의로 차에 상해를 입힌 적은 처음이었다.

네 번째 수업날이었다. 이제 안정적인 주차 위치도 확실히 파악했고, 코너 공간의 넓이도 체크했으니 같은 실수를 범할 리 없다. 건물에 도착한 후, 무인방문증 발급기 쪽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아직 수업 20분 전이라 앞차가 방문 절차 밟는것을 지켜보며 느긋하게 순서를 기다렸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별안간 앞차가 주차증 사용법이 서툴렀는지 차단봉이 올라가지 않자, 갑자기 후진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동공이 벌어짐과 동시에 "쿵!" 소리가 들렸다. 이내 몸이 흔들린 걸로 봐서 내 차를 박은 것이 분명했다. 어르신은 차에서 내려 룸미러를 미처 보지 못했다며 겸연쩍은 기색을 비췄다.

어르신의 과오를 뒤로 하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어딘가에서 골탕을 먹이고 즐거워할 사탄이 그려져 눈물이 차올랐다. 매번 그랬듯이, 서러움에 복받쳐 영어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지길 기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 영어를 배우러 길을 나설 때마다 온갖 재앙들이 덮치는 걸까. 나의 영어 징크스 일화를 듣고도 반신반의했던 데이빗과 선생님도 연신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위로를 해주다가도 말을 잘 잇지 못해 침묵이 자꾸 흘렀다. 다음 시간에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땐 장소를 옮기자 제안했더니 그러겠다고 했다.

수업을 마치고 다른 일정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뜨던 데이빗은 앞으론 괜찮을 거라며 끝까지 긍정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선생님과 남아 잠시 면담을 하려는데 5분이 채 흘렀을까. 다급하게 데이빗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건물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고장이 났어요!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 겪어봐요. 유진씨가 방금 일까지 겪지 않아 오히려 다행입니다. 그럼 한층 더 상심했을 테니까요.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경험입니다."

사탄의 장난이 데이빗한테까지 뻗친 것일까. 자책감이 들어 문자를 보냈더니, "당신의 기분이 나아지고 더 이상 징크스를 겪지 않기를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마운 답장을 보내주었다.

방해하려는 자는 가라

큰 도로변으로 나와 신호 대기를 하는데 맑은 하늘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큰 도로변으로 나와 신호 대기를 하는데 맑은 하늘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차유진

다섯 번째 수업날이 밝았다.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더 강력한 심술이 준비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엄마가 시킨대로 차 안팎으로 성수물을 뿌리고 조심스레 시동을 켰다. 큰 도로변으로 나와 신호 대기를 하는데 맑은 하늘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이내 폭우가 쏟아지고 낙엽이 사정없이 휘날려 운전시야를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조심 목적지에 이르러 안전하게 주차를 마쳤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급기야 강풍까지 몰아쳐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까스로 책방 앞에 도착하자, 비바람을 이기지 못한 우산이 홀라당 뒤집어졌다. 덕분에 온 몸에 물벼락을 흠뻑 맞았다. 그러나 더이상 낙심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새로 배운 'Trouper(트루퍼)'란 단어가 있다. '노련한 배우' 뜻인 동시에, '불평없이 어려움이나 고난을 처리하고 견뎌내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어떤 고난이 계속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방해하려는 자 역시 시큰둥해져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과거의 징크스 늪에 빠져 허우적대기 보다, 그 언젠가 능숙하게 영어대사를 구사하며 극 중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의 영어 고행기, 아니 분투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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