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의지를 발목잡기 위해 더 강력하게 돌아온 징크스는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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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50층 주상복합건물 지하의 넓은 주차장 안에 갇혀 30여분을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애초에 잘못된 주차 정보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도(지하 1층에 주차했는데, 지하 2층으로 내려가라고 하셔서 순간 헷갈려 버렸다) 연락받고 당황한 나머지, 부리나케 내려와 주차장 통로를 함께 전력질주했다. 그렇게 다리 힘이 풀리고 온 몸에 땀을 흠뻑 적신 후에야, 마침내 차와 재회할 수 있었다.
끔찍했던 영어 징크스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또다시 영어 의지를 발목잡기 위해 더 강력하게 돌아온 징크스는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었다.
두 번째 수업날은 주차장 안이 만차가 되어 30여 분을 빙빙 돌며 또 진땀을 흘렸다. 책방 사장님은 한가진 오전 시간에 매우 드문 경우라며 고개를 갸우뚱 하셨다.
세 번째 수업날은 출차를 하려다가 코너 공간이 비좁아 기둥벽에 차의 뒷문이 심하게 긁혀버렸다. 내 부주의로 차에 상해를 입힌 적은 처음이었다.
네 번째 수업날이었다. 이제 안정적인 주차 위치도 확실히 파악했고, 코너 공간의 넓이도 체크했으니 같은 실수를 범할 리 없다. 건물에 도착한 후, 무인방문증 발급기 쪽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아직 수업 20분 전이라 앞차가 방문 절차 밟는것을 지켜보며 느긋하게 순서를 기다렸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별안간 앞차가 주차증 사용법이 서툴렀는지 차단봉이 올라가지 않자, 갑자기 후진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동공이 벌어짐과 동시에 "쿵!" 소리가 들렸다. 이내 몸이 흔들린 걸로 봐서 내 차를 박은 것이 분명했다. 어르신은 차에서 내려 룸미러를 미처 보지 못했다며 겸연쩍은 기색을 비췄다.
어르신의 과오를 뒤로 하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어딘가에서 골탕을 먹이고 즐거워할 사탄이 그려져 눈물이 차올랐다. 매번 그랬듯이, 서러움에 복받쳐 영어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지길 기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 영어를 배우러 길을 나설 때마다 온갖 재앙들이 덮치는 걸까. 나의 영어 징크스 일화를 듣고도 반신반의했던 데이빗과 선생님도 연신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위로를 해주다가도 말을 잘 잇지 못해 침묵이 자꾸 흘렀다. 다음 시간에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땐 장소를 옮기자 제안했더니 그러겠다고 했다.
수업을 마치고 다른 일정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뜨던 데이빗은 앞으론 괜찮을 거라며 끝까지 긍정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선생님과 남아 잠시 면담을 하려는데 5분이 채 흘렀을까. 다급하게 데이빗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건물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고장이 났어요!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 겪어봐요. 유진씨가 방금 일까지 겪지 않아 오히려 다행입니다. 그럼 한층 더 상심했을 테니까요.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경험입니다."
사탄의 장난이 데이빗한테까지 뻗친 것일까. 자책감이 들어 문자를 보냈더니, "당신의 기분이 나아지고 더 이상 징크스를 겪지 않기를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마운 답장을 보내주었다.
방해하려는 자는 가라
▲큰 도로변으로 나와 신호 대기를 하는데 맑은 하늘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차유진
다섯 번째 수업날이 밝았다.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더 강력한 심술이 준비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엄마가 시킨대로 차 안팎으로 성수물을 뿌리고 조심스레 시동을 켰다. 큰 도로변으로 나와 신호 대기를 하는데 맑은 하늘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이내 폭우가 쏟아지고 낙엽이 사정없이 휘날려 운전시야를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조심 목적지에 이르러 안전하게 주차를 마쳤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급기야 강풍까지 몰아쳐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까스로 책방 앞에 도착하자, 비바람을 이기지 못한 우산이 홀라당 뒤집어졌다. 덕분에 온 몸에 물벼락을 흠뻑 맞았다. 그러나 더이상 낙심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새로 배운 'Trouper(트루퍼)'란 단어가 있다. '노련한 배우' 뜻인 동시에, '불평없이 어려움이나 고난을 처리하고 견뎌내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어떤 고난이 계속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방해하려는 자 역시 시큰둥해져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과거의 징크스 늪에 빠져 허우적대기 보다, 그 언젠가 능숙하게 영어대사를 구사하며 극 중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의 영어 고행기, 아니 분투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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