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조봉암
위키미디어 공용
정도의 차이는 크지만 조봉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신격화 분위기가 있었다. 1992년 8월에 <역사비평>에 실린 서중석 당시 성균관대 교수의 기고문 '조봉암·진보당의 진보성과 정치적 기반'은 "지방에서 진보당을 지지하는 층에서는 오로지 죽산 조봉암 외에는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라며 "한 잡지에서는 지방 각지에서 죽산에 대한 지지자의 태도가 거의 종교적인 신앙에 가깝다고 평했"다고 기술한다.
진보 정당은 흔히 지식인이나 청년층에서 많은 지지를 받지만, 진보당과 조봉암은 이들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지지도 많이 받았다. 2007년에 <한국시민윤리학회보> 제20집 제2호에 실린 문중섭 부산 경성대 교수의 논문 '1950년대 한국 정치이념 지형의 일면'에 소개된 당시 20대 후반의 부산 지역 고교 교사는 "조봉암 후보가 진보세력임을 다수의 사람들이 인지하였고 하층민들의 지지가 많았다"고 증언한다.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이 어느 정도는 신격화된 상태에서 전 계층의 지지를 받은 사실은 이승만이 그를 시기한 이유 중 하나를 보여준다. .
이승만이 23세 연하의 조봉암(1898년생)에게 경쟁심과 질투심을 표출한 것은 무엇보다 진보당 지지율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1956년 대선 때 인천 출신인 조봉암을 가장 많이 찍은 지역은 경상남북도다. PK와 TK는 이승만이 진보당과 조봉암을 증오하게 만든 문제의 지역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 홈페이지에 따르면, 당시의 10개 시도 중에서 조봉암의 득표율이 높은 상위 5개 지역은 경북(44.67%), 전북(39.82%), 경남(37.69%), 서울(36.72%), 전남(27.88%)이다.
서울에서 세 번째로 높은 득표율이 나왔지만, 이것이 조봉암 득표율에 결정적 변수가 되지는 못했다. 전체 선거인 960만 6870명 중에서 서울 유권자는 7.3%인 70만 3799명이었다. 10개 시도의 평균인 96만에도 미치지 못했다. 농업이 최대 산업일 때였으므로 인구가 서울로 집중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나온 표는 11만 9129표다. 그에 비해 경남에서 나온 표는 50만 2507표, 경북에서 나온 표는 50만 1917표다. 경남은 득표율에서는 3위였지만 득표수에서는 1위였다.
전북은 득표율에서는 2위지만, 득표수(28만 1068명)에서는 경남북에 밀렸다. 득표율 1위 경북과 득표수 1위 경남에서 나온 100만 4424표는 조봉암이 얻은 총 216만 3808표의 46.4%였다. 조봉암을 찍은 유권자의 절반이 PK나 TK 주민이었던 것이다.
조봉암 표가 가장 많이 나온 경상남북도는 해방 직후부터 진보적 성격을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미군정에 대해 가장 먼저 궐기한 곳은 경북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의 대구 10월 항쟁은 그달 6일까지 여타 경북 지역들로 번지고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역에 확산됐다. 이 항쟁은 미군정의 경제정책 실패와 더불어 친일청산 봉쇄 등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다. 단순한 민생 시위가 아니라 진보적 성격의 항쟁이었다.
이승만을 끌어내리는 최후의 일격은 1960년 3·15부정선거 당일 마산에서 나왔다. 3·15마산의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진보당을 가장 많이 지지한 지역에서 미군정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봉기와 이승만에 대한 최후의 일격이 나왔다.
진보당과 조봉암을 지지한 경상남북도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글항아리
이승만 집권기에 경남북에서 표출된 진보적 기운은 일제강점기와도 맞닿는다. 일제강점하의 친일 보수세력이 볼 때 PK·TK는 불온한 지역이었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한 획을 그은 브루스 커밍스 전 워싱턴대 교수는 해방 직후에 경상남북도에서 진보세력이 강했던 이유 중 하나를 일제강점기에서 찾는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이곳에서는 인민위원회의 세력을 도운 다른 요소들도 있었다"면서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경상도는 반항적인 기질로 유명했는데, 예를 들면 1919년의 독립시위에도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이 가담했었다. 이 지역은 또한 일본과 가장 근접되어 있으므로 식민통치자들과의 교류가 보다 뚜렷했다. 경남 부산과 경북 대구는 적어도 일본인이 보기에는 일본의 도시들과 똑같다고 생각되었다. 가장 많은 접촉과 교류가 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본과의 잦은 접촉이 항일 기질을 공고히 하는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다. 경상도의 진보적 성격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경험과도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1623년에 인조의 쿠데타로 광해군 정권이 붕괴한 뒤 보수세력인 서인당의 장기집권이 이어졌다. 동인당의 일부인 남인당이 1674년 이후의 6년간, 1689년 이후의 5년간 집권한 일을 제외하면, 1623년 이후로 조선 멸망 때까지의 집권세력은 기본적으로 서인당과 그 분파인 노론당이었다.
이런 장기 집권으로 인해 야당이나 재야로 밀려난 남인당(동인당의 분파)의 핵심 근거지가 바로 경상도다. 동인당의 정신적 구심점인 퇴계 이황은 1960년대에 박정희에 의해 부각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내내 별다른 존경을 받지 못했다. 그의 근거지도 경상도다. 동인당의 분파이자 광해군 집권기의 여당인 북인당의 정신적 구심인 남명 조식의 근거지 역시 그곳이다. 경상도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당파들의 본거지였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경상도 출신들이 적지 않은 차별을 받았다. 경상도 구미 출신의 무관인 노상추(1746~1829)가 쓴 <노상추 일기>에 따르면, 그는 정부에서 인사 조치가 발표될 때마다 '이번에는 영남 사람이 몇이나 들어갔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때마다 거의 항상 그는 '역시나!' 하며 허탈에 빠졌다.
이처럼 광해군 실각 이후로 수백 년간 중앙정부의 차별을 받은 것도 경상도의 저항적 기질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지역이 일제강점기에 강렬한 항일 기질을 드러냈고, 브루스 커밍스의 분석대로 이 같은 정서가 진보세력 지지와도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진보당과 조봉암을 지지한 경상남북도의 진보적 기운은 한국 현대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했다. 이 기운은 3·15마산의거를 통해 이승만을 끌어내리는 데 기여하고, 더 나아가 1979년 10월에는 부산과 마산의 부마항쟁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분열시키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상남북도와 이승만 정권의 긴장 관계에 주목하면서 1950년대의 이승만 집권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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