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중반 관동군사령부 소속 정보장교 쓰지 대위가 진학문에게 관동군 촉탁을 요청하면서 제시한 조건. 월 수당 300엔, 별도로 협화회 수당 200엔을 합쳐 매월 500엔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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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양상은 거주지 이동에서도 느껴진다. 학업 때문에 한일 양국을 자주 오간 그는 자신이 설립을 주도한 동아일보사의 정경부장·학예부장·논설위원을 맡았다가 6개월 뒤 갑자기 그만두고 도쿄-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가서 한동안 체류했다.
귀국 뒤 <동명> 편집인·발행인, <시대일보> 편집장, <호우지신문> 경성특파원을 지내던 그는 33세 때인 1927년에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1937년에는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내무국 참사관이 됐다.
만주국 참사관 근무는 그가 만주국의 사절 자격으로 로마와 베를린을 방문하는 기회를 갖게 만들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에 그가 히틀러 정권과 무솔리니 정권의 훈장을 받는 계기가 됐다.
<친일인명사전>은 "이해 5월에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에서 각각 훈4위 취(鷲)2등 공로장과 훈3등 왕관장을 받았다"고 말한다. 일왕(천황) 히로히토에게 충성하는 상태에서 히틀러·무솔리니의 훈장도 받았으니, 제2차 세계대전 '3대 악의 축'으로부터 모두 인정을 받은 셈이다.
3·1운동 직후에 언론 분야에서 총독부의 비밀 임무를 수행한 그는 1930년대 후반에는 조선과 만주 양쪽의 경제 분야에서 식민지배를 도왔다. 위 <친일파 99인>은 그가 일제의 공급망 국책회사인 만주생필품주식회사의 상무이사와 서울 담당 이사로 근무한 일을 거론하면서 "1930년대 말부터는 전시체제하 통제경제정책을 담당하는 관리자로서 일제에 기여"했다고 설명한다.
이 외에도 그는 굵직한 친일 이력을 많이 남겼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위 보고서에서 지금의 국회의원 비슷한 중추원 참의 경력 이외의 또 다른 반민족행위들을 이렇게 열거한다.
"1938년을 전후하여 만주국협화회 간부를 지냈고, 1940년 만주국협화회 수도계림분회에서 재만 조선인 교육사업을 위한 항구적 기구로 설치한 조선인교육후원회의 신경지역 위원 및 고문으로서 내선일체 교육 실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 1942년 만주국협화회 산하 조선인보도분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전시체제기 재만 조선인의 노무동원에 협력하였음. 또한 일제의 황민화운동을 적극 선전하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였음."
진학문은 중추원 참의와 만주국 고위 관료로 일했으므로 그가 거기서 얻은 수익은 친일재산이다. 그런데 그의 경우에는 뜻밖의 것도 친일 재산에 포함될 수 있다. <동아일보>에 글을 쓰고 얻은 수입이 그렇다.
위의 <사이토 마코토 문서>에도 언급됐듯이 총독부가 진학문에게 언론기관 설립 임무를 부여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거기서 생활 자금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가 지급해야 할 보수를 동아일보사 등이 지급하도록 했던 셈이다. 그래서 그의 경우에는 동아일보사 부장과 논설위원 등으로 일하고 얻은 수입도 친일재산이 될 수 있다.
그는 '친일재산'이 역사상 최악의 방법으로 인류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에 부역한 대가라는 점에 개의치 않았던 듯하다. 이는 그의 해방 이후 '미안함 없는' 행적에서 잘 나타난다.
1948년 정부수립을 즈음해 친일청산을 위한 국회 반민특위 구성이 가시화되자 그는 일본으로 달아났다. 그런 뒤 상황이 잠잠해지자 공식 활동을 재개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52년 한국무역진흥공사 부사장을, 1955년 한국무역협회 일본지사장을, 196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을 지냈다"고 말한다. 언론 분야에서 친일을 하다가 전시경제 분야로 친일의 무대를 옮긴 것이, 해방 뒤 한경협(전경련) 부회장이 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1974년 2월 3일 80세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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