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03 12:00최종 업데이트 24.12.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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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7일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 등 문화계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서초구 국가정보원 앞에서 블랙리스트작성 국가정보원 고발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이희훈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에서 일할 때
국가정보원이 위법적으로 사찰해온
문화예술인 249명 중점관리명단을
간신히 받아왔다

이름 옆에 A, B, C 등급이 매겨져 있었는데
다행히 A등급 스물두 명에 내 이름이 또렷이 들어 있었다
B나 C였다면
난 국가정보원의 존립 이유를 믿지 못했을 것이다
- 졸시, '자존심' 전문

2018년 호기롭게 위와 같은 시를 썼던 나는 실제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이 별도 관리했다는 '문화예술인 중점관리명단' 내 A급 사찰 대상자였다. 당시 국정원 개혁위원회에서 내부 조사를 통해 공개 발표한 보도자료를 통해 공식 확인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뿐 나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여년 동안 나의 일상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사찰·미행·도청·탐문·공작 등을 당하고 그 결과 어떤 기록물들이 국정원 내에 쌓여 갔는지 알 길이 없다.


진상규명의 기회와 명예회복 등의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회는 아직까지도 오지 않았다. 사실 그 기회는 내가 다시 사찰 등과 관련한 정보공개 청구를 하거나, 피해 소송을 제기하거나, 형사 고소를 해서 찾아야 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그 진실은 국정농단과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내가 다시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이에 따른 피해보상과 명예회복, 그리고 재발방지책 마련을 국정과제 1호로 약속했던 이 국가와 정부가 해주었어야 할 국가적 책무였다.

정권이 바뀐다 하더라도 위법했던 국가폭력 관련해서는 계속되는 진상규명과 그 피해 회복, 재발 방지에 대한 계속되는 책무를 가진 대한민국 정부가 마땅히 해주어야 할 일이다. 내 개인의 일을 떠나 그 책무를 다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정부를 나는 헌정에 기초한 정상 국가의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

그 사이, 당시 청와대와 국정원 문화체육부와 그 산하 수십 개의 국가기관이 1만여 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들을 블랙리스트로 규정하고 사찰 검열 배제한 희대의 국가범죄에 대한 진실은 적당히 파묻혀졌다. 그 진실규명을 외치는 동료 문화예술인들만 계속되는 모욕과 상처 속에서 지속적으로 고통받으며 조롱받고 있다. 그 사이, 몸통으로 구속되었던 박근혜와 김기춘 등은 사면 복권되었다. 무수히 많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실행자들만 '명예회복(?)' 되어 돌아왔다.

대표적으로는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좌파척결, 지속적으로 고사, 화이트리스트 육성' 등의 원대한 기조하에 진행되었던 블랙리스트 실행 당시 문체부 장관과 대통령 문화특보로 일했던 유인촌의 화려한 부활이다. 그는 윤석열 정부 하 문체부 장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더불어 현 문체부 제1차관인 용호성은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실행 당시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실 선임행정관으로 있으며 여러 블랙리스트 실행에 관여했던 자다.

둘 모두 미진한 조사에 따라 법적으로 확정된 판결을 받은 바 없다는 핑계다. 그들에게 제대로 된 진상규명의 기회를 주었어야 할 정부와 의회, 검찰 등이 제 역할을 다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처럼 농락당한 과정을 틈타 그간 여러 명의 국가범죄 혐의자들, 동조자들이 복귀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문체부 기조실장과 제1차관을 지내며 여러 블랙리스트 사건 실행의 몸통에 있었던 송수근은 계원예대 총장으로 돌아왔었다. 현재는 (사)한국국제문화포럼의 회장으로 있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국립중앙극장 장으로 블랙리스트 실행 연루자인 안호상은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돌아왔다.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은 사면복권 받은 후 얼마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이사로 돌아왔다.

'좌파척결 및 고사' 시도가 다시 부활

2023년 6월 14일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이 열린 서울 삼성동 코엑스 행사장에서 필자가 경호인력에 의해 끌려나오고 있다. 이날 행사장에는 김건희 여사가 방문했다.블랙리스트 이후(준)

그 와중에 대한민국 국가와 정부, 의회 등을 대신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위해 지난 7년여 동안 원치 않는 '공익 근무'(?) 중인 나와 동료 문화예술인들은 다시 '입틀막 1호' 블랙리스트가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2023 서울국제도서전에 박근혜 당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으로 여러 블랙리스트 사건 실행 주요 혐의자인 소설가 오정희가 홍보대사로 돌아 온 사건 때문이었다. 행사가 열리던 코엑스몰 바깥에서 기자회견 후 개별적으로 참여한 행사 개막식장에서 대통령실 경호처는 기자회견 참가자들만을 블랙리스트로 콕 집어 강제 연행했다.

이런 계속되는 헌정 유린의 참사와 폭력을 막기 위해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자행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미진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해 온 지도 벌써 6년째다. 2018년 11월엔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당대표와 가진 간담회에서 당 내 태스크포스(TF)를 꾸려 특별법 제정에 나서겠다는 약속을 받기도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결과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좌파척결 및 고사'를 위한 시도가 사회 전역에서 다시 부활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최소한의 조심성이라도 있었다. 그들은 블랙리스트 실행이 헌정 유린의 중대한 위법인 줄 아는 까닭에 모든 실행 과정을 은밀하게 대외비로 관리하며 음성적으로 진행했다.

2008년 8월 27일 이명박 당시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실에서 작성했던 대외비 문건 '문화권력 균형화전략'이 수립되어 실행되었던 때부터 박근혜가 탄핵되던 때까지 근 8여 년에 걸쳐 진행된 블랙리스트 실행 의혹이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2016년 10월 초순이었다. 국가보조금 지원공모 사업 심사에 참여하던 과정에서 위법한 블랙리스트 실행의 기미를 알게 된 김미도 과기대 교수와 소설가 하응백님 등의 용기 있는 제보에 의해서였다.

1만여 명에 달하는 문화예술인들을 위법하게 사찰·검열하고, 별도 관리 명단을 작성한 후 이들을 고사시키기 위해 국가기관들이 나서서 불법을 자행했다고? 무슨 군사독재정권 시절도 아닌데 민간인 사찰·검열이라니…. 기가 막히는 일이어서 처음엔 모두가 긴가민가하기도 했다.

그 의혹이 실제의 사실로 확인된 것은 박근혜 탄핵 이후 국정농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특검과 민간이 주도하며 생고생을 했던 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진상규명 및 제도개선 위원회'의 활동을 통해서였다.

그 조사의 결과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 교육문화수석 김상률, 교육문화비서관 김소영, 정무비서관 신동철, 그리고 문체부 장관 김종덕·조윤선과 문체부 차관 정관주 등 7명이 구속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외 관련 책임자들과 실행 동조자들, 그리고 그들이 체계적으로 진행했던 사건의 전부에 대한 총체적인 진상규명은 묻혀졌다. 일례로 필자 또한 연루된 것으로 나왔던 국정원 중점관리단체와 중점관리명단에 대한 기초 조사조차도 되지 않았다.

다시는이런 일이 없도록

7월 8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은 용호성 1차관이다.연합뉴스

이렇게 밝혀져야 할 진실들이 무시되고 은폐당하는 현실을 조롱하며 신종 블랙리스트 실행이 사회 각처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된다. 한때는 국정농단 사건 특검 검사로 시작해 검찰총장에 이어 뜻하지 않게 '왕(王)'에까지 오른 윤석열 대통령이 앞장서 일단의 민주주의자들을 블랙리스트로 다시 규정하며 척결을 주문하는 마당이다.

"제일 중요한 게 이념"(국민의힘 연찬회)인데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너무나 많다"(자유총연맹 축사),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 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의 현실에서 이러한 반국가세력들의 준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이들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해 허위 선동,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며 이들에 대한 척결·고사 작전을 대통령이 앞장서서 지시하고 있으니 두려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게 지난 촛불항쟁 이후 요구되었던 여러 국정농단에 대한 총체적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이에 따른 재발방지책 마련 등의 과제가 촛불정부를 자처한 이들에 의해 적당히 무마되고 배신당한 결과이기도 하니 더욱 참담할 뿐이다. 국회 다수당을 점하고 있는 지금이라도 과거의 실책을 인정하고 그 미진한 진상규명에 대한 특별법 제정에 나서야 할 터이지만 모르쇠다. 유인촌과 용호성은 여전히 대한민국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문체부 장관과 제1차관이다. 국회도 뻔질나게 오가는데 국회 문광위는 이들의 자격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 희극이 아닐 수 없다.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
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
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
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
그대들인데
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 김수영, '육법전서와 혁명' 중에서

4·19혁명의 결과가 위정자들로 가득찬 정치권에 의해 거덜나는 것을 보며 비애에 휩싸인 김수영이 얘기했던 것처럼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우리들뿐이다. 귀환하는 블랙리스트 실행자들과 힘써 싸우고, 새롭게 실행되는 블랙리스트 사안들에 맞서며 아직도 '위정자'들에게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싸워야 하는 우리다. 정치권의 위정자들 탓을 하며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지금도 무너진 정의를 바로 잡기 위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다.

다시 특정의 문화예술인들, 인권 활동가들, 노동운동가들, 언론인들, 교육자들, 소수자들, 민주주의 운동가들을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며 최소한의 헌정조차 유린하고 있는 신종 블랙리스트 실행자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우리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사유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방해 및 그 범죄혐의자들을 국가요직에 등용시키고 신종 실행을 획책하며 헌정을 유린한 일' 역시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며 지친 발걸음을 오늘도 움직이고 있는 우리다.

7년여 째 이렇게 끊임없이 지난 정권에 의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미진한 진상규명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우리가 무슨 권력의 주체나, 사회적 자원이나 혜택을 독점하는 또 한 편의 화이트리스트가 되기 위한 일이 아니다. 다시는 어떤 국가권력도 권력을 남용하고 공적 제도와 공적기관을 통해 특정 문화예술인이나 여타 노동자·시민들을 차별·배제·탄압하며 결과적으로 헌법에 보장된 양심과 사상의 자유, 언론·출판·결사·표현의 자유 등을 거세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문화예술인들만의 어떤 명예회복이나 권익을 위해서만 하는 일도 아니다. 국가폭력에 대한 진실을 바로 세우는 일이며, 조금은 더 열린 민주주의 사회로 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힘차게 나아가기를 바라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송경동 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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