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졸업식에서 정성희. 그는 열아홉 살에 강제징집 되어 의문사했다.
정성희추모사업회 제공
실제로 정성희는 입대 후 감시의 눈초리 속에서 지냈다. 36연대 보안반의 행정병이었던 임채상은 "정성희가 보안반에 왔었다"라고 진술했다. 보안사 주재관 김흥대는 문제 병사에 대해 주기적으로 관찰 보고서를 쓰고 불온서적이나 유인물 소지 여부, 불온사상 전파 여부에 대해 일상적으로 사찰했음을 의문사 위원회에서 밝혔다. 이는 36연대 인사주임 박영준 소령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36연대에 제가 관리하던 병사가 약 15명 정도 내외, 정성희가 소요와 관련해 입대한 병사이므로 주의하여 관찰할 것을 대대장에게 통보하였다"라고 말했다.
이런 통제 속에서 지내던 정성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일이 1982년 봄부터 잇달아 일어난다. 3월 25일 입대한 흥사단 선배 이재영(경영79)이 갑자기 부산 501부대에 연행되었다. 부산상고 출신인 데다 연세대 운동권이었기에 1982년 3월 18일에 일어난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주모자로 오인받은 것이다. 이재영은 방화 사건의 주모자 문부식이 자수한 이후에는 502부대로 이첩되었다. 여기서 연세대 학생 운동 현황에 대해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한편 11월 25일 시위로 함께 연행되어 5사단 27연대에서 복무 중이던 김형보(사회사업 81)가 1982년 6월 21일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다. 그는 휴가 나가는 분대장 한상문 하사에게 편지 한 통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다. 친구 박동수(경제 81)에게 보내려던 이 편지 안에는 "우리는 더욱더 전열을 가다듬고 무장을 해야" 같은 결의를 다지는 문장이 있었다. 이 은밀한 편지 전달 요청을 중대 안에 있던 보안대의 망원이 밀고하는 바람에 한상문은 불시에 소지품 검사를 당했고 사태는 커지게 된다.
김형보는 보안사에 끌려가 후암동 분실에서 10일, 서빙고 분실에서 20일 동안 조사를 당했다. 보안사는 "야간에 내무반에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단파 라디오를 통해 북의 지령을 수신한 후 학원을 선동할 목적으로 편지를 썼다"라는 자백을 강요했다. 결국 김형보는 5사단 영창에 수감되어 군사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선고받는다.
정성희는 5월 중순 경 이재영 진술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보안사로 연행돼 며칠 동안 조사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상 감시 속에서 지쳐가던 정성희는 이때 큰 마음고생을 한다. 김형보 사건으로 보안사의 감시가 한층 더 매서워질 무렵인 6월 9일 정성희는 첫 휴가를 나간다. 정성희는 보안부대로부터 "전에 활동하던 동아리 회원을 만나 활동 현황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경제학과에 다니던 후배 양수용은 휴가 나온 정성희를 만났다. 그가 들려주는 정성희의 말이다.
1개월에 한 번 정도 반성문을 쓰도록 강요받고, 귀대하면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서로 제출해야 된다.
정성희의 서클 동료 김혜원도 성희가 "날 너무 많이 믿지 말라"고 하며 "활동에 대한 얘기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기억한다. 정성희는 휴가가 끝나고 "정말 들어가기 싫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귀대해서 보안대에 억지로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지워지지 않는 의문
정성희는 숨진 당일 동료들에게 죽음을 예고하며 라이터와 은하수 담배를 나눠주었다. 보안사 요구에 따라 프락치 활동을 위해 휴가를 다녀온 후 그는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정성희를 더욱 힘들게 한 건 동생 윤희의 편지와 어머니가 보낸 김동훈 신부의 수필집이 부대에 도착했으나 자신에게 전달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가장 큰 즐거움, 손꼽아 기다리는 우편물이 건네지지 않자 그는 참을 수 없었다. 정성희는 소대장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오늘 밤 죽어버리겠다는 말은 이 과정에서 나왔다. 실제 자살에 뜻을 둔 것이기보다는 보안사의 프락치 강요와 우편 검열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