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30 19:13최종 업데이트 24.11.3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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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 1편 <19살 연세대 1학년생이 강제로 군대에 끌려간 사연>(https://omn.kr/2b5o3)에서 이어집니다.

정성희가 입대한 1981년 11월, 군은 음험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1981년 4월 2일 전두환은 주영복 국방부 장관에게 "소요 관련 학생을 전방 부대에 입영토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주영복은 일련의 준비를 거쳐 11월 2일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안)을 확정하고 육군본부를 통해 이를 예하 부대에 내려보냈다.


한편 박준병 보안사령관은 전두환의 특명을 받아 1982년 5월에 '좌경의식화 불순분자대상 대공활동지침' 즉 녹화공작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들어간다. 정성희는 바로 전두환·주영복·박준병이 세운 음모의 초기 대상자, 마루타가 된 것이다.

중학교 졸업식에서 정성희. 그는 열아홉 살에 강제징집 되어 의문사했다.정성희추모사업회 제공

실제로 정성희는 입대 후 감시의 눈초리 속에서 지냈다. 36연대 보안반의 행정병이었던 임채상은 "정성희가 보안반에 왔었다"라고 진술했다. 보안사 주재관 김흥대는 문제 병사에 대해 주기적으로 관찰 보고서를 쓰고 불온서적이나 유인물 소지 여부, 불온사상 전파 여부에 대해 일상적으로 사찰했음을 의문사 위원회에서 밝혔다. 이는 36연대 인사주임 박영준 소령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36연대에 제가 관리하던 병사가 약 15명 정도 내외, 정성희가 소요와 관련해 입대한 병사이므로 주의하여 관찰할 것을 대대장에게 통보하였다"라고 말했다.

이런 통제 속에서 지내던 정성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일이 1982년 봄부터 잇달아 일어난다. 3월 25일 입대한 흥사단 선배 이재영(경영79)이 갑자기 부산 501부대에 연행되었다. 부산상고 출신인 데다 연세대 운동권이었기에 1982년 3월 18일에 일어난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주모자로 오인받은 것이다. 이재영은 방화 사건의 주모자 문부식이 자수한 이후에는 502부대로 이첩되었다. 여기서 연세대 학생 운동 현황에 대해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한편 11월 25일 시위로 함께 연행되어 5사단 27연대에서 복무 중이던 김형보(사회사업 81)가 1982년 6월 21일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다. 그는 휴가 나가는 분대장 한상문 하사에게 편지 한 통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다. 친구 박동수(경제 81)에게 보내려던 이 편지 안에는 "우리는 더욱더 전열을 가다듬고 무장을 해야" 같은 결의를 다지는 문장이 있었다. 이 은밀한 편지 전달 요청을 중대 안에 있던 보안대의 망원이 밀고하는 바람에 한상문은 불시에 소지품 검사를 당했고 사태는 커지게 된다.

김형보는 보안사에 끌려가 후암동 분실에서 10일, 서빙고 분실에서 20일 동안 조사를 당했다. 보안사는 "야간에 내무반에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단파 라디오를 통해 북의 지령을 수신한 후 학원을 선동할 목적으로 편지를 썼다"라는 자백을 강요했다. 결국 김형보는 5사단 영창에 수감되어 군사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선고받는다.

정성희는 5월 중순 경 이재영 진술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보안사로 연행돼 며칠 동안 조사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상 감시 속에서 지쳐가던 정성희는 이때 큰 마음고생을 한다. 김형보 사건으로 보안사의 감시가 한층 더 매서워질 무렵인 6월 9일 정성희는 첫 휴가를 나간다. 정성희는 보안부대로부터 "전에 활동하던 동아리 회원을 만나 활동 현황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경제학과에 다니던 후배 양수용은 휴가 나온 정성희를 만났다. 그가 들려주는 정성희의 말이다.

1개월에 한 번 정도 반성문을 쓰도록 강요받고, 귀대하면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서로 제출해야 된다.

정성희의 서클 동료 김혜원도 성희가 "날 너무 많이 믿지 말라"고 하며 "활동에 대한 얘기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기억한다. 정성희는 휴가가 끝나고 "정말 들어가기 싫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귀대해서 보안대에 억지로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지워지지 않는 의문

정성희는 숨진 당일 동료들에게 죽음을 예고하며 라이터와 은하수 담배를 나눠주었다. 보안사 요구에 따라 프락치 활동을 위해 휴가를 다녀온 후 그는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정성희를 더욱 힘들게 한 건 동생 윤희의 편지와 어머니가 보낸 김동훈 신부의 수필집이 부대에 도착했으나 자신에게 전달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가장 큰 즐거움, 손꼽아 기다리는 우편물이 건네지지 않자 그는 참을 수 없었다. 정성희는 소대장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오늘 밤 죽어버리겠다는 말은 이 과정에서 나왔다. 실제 자살에 뜻을 둔 것이기보다는 보안사의 프락치 강요와 우편 검열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동생 정윤희에게 보낸 편지의 겉봉. 동생 정윤희와 정수희를 많이 아낀 오빠였다.정성희추모사업회 제공
동생 윤희와 수희에게 보낸 편지.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편지다.정성희추모사업회 제공

1981년 그의 죽음을 듣고 달려간 부모와 외삼촌은 '자살하였다'라는 현장을 두 눈으로 보겠다고 요구했으나 군은 민간인 통제구역이라며 거부했다. 5사단 보급대에 있는 장례식장에서 겨우 시신을 보았으나 목 아랫부분은 가려져 있어 볼 수 없었다. 어머니는 군에서 마련한 관이 작아 목이 꺾인 모습이었다고 회고한다. 5사단은 시신 인도마저 거부하고 부검을 포기하고 화장을 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또 "사인에 대해서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다. 군의 강압에 못 이겨 정성희의 부모는 사인을 했고 장례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헌병대는 사망 사고로부터 한 달도 안 된 8월 16일, 정성희가 신세를 비관해 M16을 자기 목에 대고 4발을 쐈고 두부를 관통해 죽음에 이른 자살 사건이라고 발표하며 수사를 종결했다. 수사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의무대가 시신을 이송해 현장의 증거는 진즉에 훼손되어 버렸다. 시신마저 단 하루도 안 돼 재가 되어 흩어져 버리고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진상 규명은 막막할 뿐이다. 그렇다고 헌병대의 수사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의문점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정성희의 두개골에서 총알이 나오며 생긴 구멍은 총알 둘레만큼의 작은 크기다. M16은 총알이 회전하면서 목표물을 빠져나가기에 큰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네 발을 연이어 쐈다면 거의 두개골이 없어진 모습일 텐데 도저히 관통했다고 볼 수 없는 작은 구멍만 남겨 놓았다.

또 정성희의 군복에서는 화약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정성희가 방아쇠를 당겼다면 탄피가 떨어져 나오면서 당연히 손에 가루와 냄새를 남겼을 것이다. 총기에 묻은 지문을 감정해야 마땅하나 헌병대는 이를 하지 않았다.

이뿐 아니라 예광탄의 의미도 밝히지 않았다. 이날 경계 근무를 선 같은 소대의 함용복 중사와 박풍신 일병은 총성과 함께 예광탄 여러 발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조선대 실습생 백성봉도 몇 개의 불빛을 보았다고 했다. 예광탄은 야간에 총알의 방향을 확인할 수 있게 5발당 1발씩 나간다. M16 탄창에 들어있는 15발 중 3발이 예광탄인 셈이다. 예광탄이 몇 발 나갔다는 것은 적어도 열 발 이상의 실탄이 발사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헌병대는 이를 규명하지 않았다.

이천민주화공원에 있는 정성희의 묘소. 2020년 11월 정성희의 초혼 안장식이 열렸다.민병래

장례 후 정성희의 죽음에 대해 가족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정성희의 어머니는 몸져누웠고 여동생은 고등학생과 중학생이었다. 아버지의 직장인 은행으로는 가만히 있으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학교 친구들 또한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었다. 흥사단 아카데미는 힘을 잃은 데다가 군 부대에 접근할 수 없으니 발만 동동 굴렀을 뿐이다.

진상 규명의 단초가 열린 건,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 여러 대학에서 강제징집 되었다 제대한 학생들이 복교하면서부터다. 1984년 2월 기독교회관에서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이 강제징집과 의문사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정성희와 이윤성, 김두황 등 여러 의문사를 중요하게 거론하였다.

6월 항쟁 이후인 1988년부터 의문사 유가족의 농성이 전개되면서 진상규명 요구는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이런 노력이 쌓여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정성희의 죽음이 민주화 운동 관련 사망이고 공권력에 의한 죽음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보안사가 정성희의 존안 카드가 없다고 하면서 의문사위원회의 현장 조사마저 거부해 누가 어떻게 정성희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는 밝힐 수 없었다. 수사권이 없는 의문사위원회의 한계였다.

이런 가운데 2018년 7월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정성희의 죽음을 순직Ⅱ형이라고 결정한다. 의문사위의 조사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의 조사를 나름대로 반영한다고 내린 조치다. 순직Ⅰ형은 작전이나 교전 중에 사망한 군인에게, 순직Ⅱ형은 근무 중에 죽은 병사가 해당된다. 황당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정성희의 사망 원인이 신변을 비관한 자살이라는 헌병대의 최초 수사 결과를 부정하고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일상 근무 중에 발생한 순직이라고 성격을 규정했으니 말이다.

정성희는 징집 연령도 안 된 상태에서 신체검사 같은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고 보안사의 사찰과 프락치 공작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근무 중에 빚어진 죽음이라고 하면 진실의 왜곡일 뿐이다. 정성희는 순직Ⅱ형으로 규정되면서 알량한 보상만을 받았다. 이렇게 되어 인권유린, 반헌법적인 행위에 대해 민·형사상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다. 바로 국가배상법상 이중배상 금지 규정 때문이다.

국방부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가 보낸 순직Ⅱ형 통고문. 순직Ⅱ형은 근무중에 순직한 경우를 말하므로 정성희의 의문사에 대한 진실 왜곡이다.정성희추모사업회 제공

40년 만에 이뤄진 초혼 안장식

정성희는 만원 버스의 안내양에게 깊은 연민을 보내고 신민당사에서 농성한 노동자의 아픔에 공감한 청년이다. 정성희는 운동을 삶으로 받아들였다. 부모가 낡은 신발을 바꿔 사 신으라고 재촉하면 어쩔 수 없이 사면서도 3천 원 넘는 신발을 고른 적이 없다. 자신의 부유한 처지가 미안해 "조그마한 아파트로 이사 가자"며 부모를 자주 졸랐다. 그는 여동생에게 "나는 민중을 위해서 살겠다. 부모님은 네가 책임져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일기에 적은 "왜 나는 조국을 생각하는 시간보다 날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은가?"라는 구절을 읽노라면 가슴이 무거워진다. 자신을 꾸짖은 이 문장이 혹여 1982년 7월 22일의 비극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2020년 11월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는 정성희의 초혼 안장식이 열렸다. 코로나19가 극성이던 시절, 야외에서도 5인 이상의 회합이 금지되던 때였으나 잠시 방역 조치가 완화되던 짬이 있었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38년 만에 이루어진 자리다.

정성희는 1982년 7월 22일 주검이 되자 만 하루도 안 된 7월 23일 벽제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변했고 한강 물에 뿌려졌다. 친구와 선·후배들은 이를 늘 안타까워했다. 선배 이재영, 친구 이성우가 주도한 이 안장식은 벽제에서 떠온 흙을 항아리에 담아 이를 묘소에 모시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묘소 둘레에 많은 친구들이 모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노래는 정성희처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이 묻힌 무덤을 감싸며 멀리 퍼져나갔다. '님'이 된 정성희는 이 노래를 들으며 아마 이 시로 화답하지 않았을까?

나의 무덤 앞에는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정성희의 가족 사진. 부모님과 사랑하는 두 여동생과 찍은 사진이다.정성희추모사업회 제공

<덧붙이는 글>

1) 김흥대는 의문사대책위 진술에서 본인이 2대대 주재관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주재관의 일상업무가 감찰임을 밝혔다.

2) 김형보는 205보안부대로 연행되어 대공계장 박진숙 상사로부터 주로 심문받았다.

3) 김형보는 형을 선고받은 후 27연대에서 36연대로 전출되었다(국가보안법 사범은 GOP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군대생활 후 1984.6.14. 전역했다. 한편 6월 16일에는 정성희와 유인물 배포 훈련을 받았던 송생엽이 강제징집당했다.

4) 2007.12.6.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 제2권'의 내용(증 제8호 군무원 최00 의 위원회 진술)중 '녹화공작' 지침에 따라 해당 업무에 투입되었던 군무원 최00의 진술은 정성희가 연행된 정황을 담고 있다.

사령부 지시에 따라 1982년 5월 중순경부터 공작과 후암동(혹은 남영동이라고도 했음) 분실에서 저하고 대위 김00(7월쯤 고00 대위로 교체), 군무원 박00 등 3명이 돌아가면서 업무를 진행했는데, 기존의 공작과 업무와는 약간 다른 업무였다. 대학 재학 중 써클 활동을 했던 사병들을 대상으로, 보통 1건당 5일 동안 심사·순화업무를 진행하고 보고서를 만들어 보고하는 업무였다. 정확히 몇 명을 심사·순화하였는지 모르나 1주일에 1명 정도를 진행했다. 후암동 업무 진행이 잘되고 성과가 있다고 판단해서, 심사과가 설치되고 녹화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5) 정성희의 첫 정기 휴가기간에 대해선 두 가지 판단이 있다. 6월3일~15일, 또 하나는 9일~21일이다. 의문사대책위는 6월 9일~21일을 정기휴가일로 판단했다.

6) 의문사위에 출석해서 양수용은 또 다른 증언도 했다

입학해서 성희형이 연행되어 가는 여학생을 구하려다 본인이 잡혀갔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형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심어져있었죠. 그런 성희형이 고3 때부터 입대 전까지 썼던 일기를 보여줬어요. 그러면서 열심히 해라, 나도 군 생활을 마치고 나면 너희들과 얼굴을 보며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말해 감명받아 눈물까지 흘렸어요.
7) 정성희는 보안사로부터 고통받고 있지만 GP에서 응원단장도 맡으며 사병들에게 운동권 노래인 '정의가'와 '농민가'를 응원가로 가르칠 정도로 투쟁력이 있었다.

8) 정성희와 같이 보초를 섰던 전방 입소 학생의 군복에서도 화약흔이 발견된 점이 의아하다.

9) 글 마지막에 인용한 시는 함형수 시인의 <해바라기의 비명> 전문이다. 그는 1914년에 태어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0 초반의 나이에 숨졌다. 이 시를 두고 신경림은 "자갈처럼 쌓인 시의 돌무덤을 뚫고 우리 시가에 우뚝 솟을 시"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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