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가 남긴 '교통지옥 속의 그 아가씨' 글의 일부. 버스 안내양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다.
정성희 기념사업회 제공
연세대 학생운동의 본산 흥사단 아카데미
정성희는 흥사단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한국 사회를 탐구했다. 1981년 흥사단 아카데미는 학교 당국의 인가를 받지 못했으나 우격다짐으로 학생회관 내 골방을 하나 차지했다. 거기서 민족 문제, 분단 문제를 비롯해 여러 세미나가 열렸다. 분위기는 진지하고 뒤풀이는 새벽 먼동이 틀 때에서야 끝났다. 정성희는 이때도 돋보였다. 주교재는 말할 것도 없고 서너 권의 보조 교재까지 읽고 많은 메모를 들고 왔다.
평화롭게 학습만 하면 좋으련만 80년 광주항쟁 이후 맞은 첫 학년도인 1981년, 학내에는 긴장이 팽팽했다. 당시 연세대를 담당하는 서대문 경찰서의 정보과 직원이 150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학교 안에 널린 게 경찰이었다. 감시와 완력만으로 저항의 열기를 마냥 억누를 수는 없었다.
3월 19일 서울대에서 문용식이 주도한 시위에 천여 명이 참가하고, 3월 30일 성균관대에서 '학원 사찰 철폐'를 외치며 사백 명이 시위를 한 소식이 신촌 일대를 흔들었다. 서울대에선 다시 4월 14일 유기홍(더불어민주당 19대, 21대 국회의원이 된다)이 주도한 싸움이 뜨겁게 전개되었다.
이제나저제나 백양로의 함성을 기대하던 연세대생 앞에 우원식(토목공학과 2학년, 22대 국회 전반기 의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시위는 짧았다. 서대문 경찰서의 병력에 금방 제압되고 말았다. 1학기에 더는 시위가 벌어지지 않았으나 유인물은 학내 곳곳에 수시로 뿌려졌다. 그런가 하면 1학기 말인 6월, 흥사단을 이끌던 79학번 손형민과 이재훈이 '전국민족민주학생연맹' 사건으로 구속된다. 손형민이 서울 서부 지역 캠퍼스의 책임자를 맡았던 터라 흥사단 아카데미는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독자적인 유인물 투쟁을 전개하다
정성희는 이 어려움 속에서도 독자적인 투쟁을 시도한다. 서클 동료 이성우에게 유인물 배포 투쟁을 제안한 것이다. 이성우는 3수를 하고 경제학과에 입학한지라 이미 입학 전에 신검을 받았고 1981년 9월 소집 통지를 받은 상태였다. 정성희가 이성우에게 건넨 말이다.
네가 입대해서 전두환에게 명령을 받으면 광주에서처럼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다. 그때 네가 민중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뜻으로 입대 전에 유인물 배포 작업을 같이 하자. 그러면 네가 군대에 가더라도 언제까지나 우리는 하나라고 믿을 수 있다.
당차고 조리가 분명한 말이나 입대를 코 앞에 둔 이성우는 당황했다. 서클이 '전민학련' 사건으로 거의 해체된 상태고 끌어줄 선배도 없는 상태, 잡히면 꼼짝없이 구속되는 작업이기에 이성우는 여러 날을 고민한다. 그러다 마침내 유인물 배포 투쟁을 승낙했다. 교회 활동을 하면서 등사기를 다뤄본 경험이 있어 만드는 건 자신이 있었다.
뜻밖에도 제안한 정성희는 유인물을 배포한 적도 없고 기름종이에 원고를 쓸 때 사용하는 철필도 몰라 이성우는 당황했다. 두 사람은 마포구 도화동에 있는 정성희의 집에서 '신입생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오천 장을 밤새워 찍었고 다음 날 강의실, 화장실, 학생회관 곳곳에 오십 장, 백 장씩 무사히 뿌렸다.
2학기 들어 연세대학의 분위기는 미묘했다. '전민학련' 사건의 여파가 수습되기도 전에 보안사가 경제학과 4학년에 다니던 재일교포 김태홍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같은 학과 우대형까지 구속하는 바람에 캠퍼스의 공기는 뒤숭숭했다. 자칫 위축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마리는 탈춤 행사에서 풀렸다. 9월에 노천극장에서 열린 탈춤반 공연 후 자연스레 시위가 일어났고 10월 26일에는 문무대에 입소한 문과대 1학년생이 '병영교육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래저래 들썩이는 분위기는 마침내 11월 25일 양경희·백혜련 두 여학생이 주도하는 시위로 나타났다. 연세대 학생운동에서 길이 기억되는 투쟁이다. 이날이 정성희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지만.
- 2편 <"날 너무 믿지마" 그의 죽음 뒤에 어른거리는 보안사>(https://omn.kr/2b5o6)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1) 정성희의 아버지 정낙헌의 문제 제기에 따라 육군 사망사고 재조사위원회는 1999년 다시 조사를 해 사망 시각을 7월 22일 23시 30분으로 특정하였다. 한편 2002년 의문사위는 정성희의 사망 시각을 7월 23일 0시 10분으로 판단했다. 연세대 동문과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대책위가 함께 꾸린 정성희의 죽음에 관한 조사모임은 2022년 23:10~23:30분으로 판단했다. 여기선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대책위의 조사 결과를 좇아서 기술했다.
2) 분대장 박경묵은 헌병대 수사에서 최초 현장 목격자로 확인되었다.
3) 2001.9.21. 2대대장이었던 최정식이 의문사위에 나와서 26초소에 모인 사람들에 관해 진술했다.
4) 1981년 11월, 당시 서대문서 조사반장 김기남은 2001년 5월 9일 의문사 조사위 조사에서 정보과 직원이 150명, 연행자가 200명이라고 진술한다.
5) 연행된 열다섯 명은 3사단 5명, 6사단 5명, 5사단 5명씩 배치되었고 1학년 7명, 2학년 6명, 3학년 1명, 4학년 1명이었다. 1학년은 정성희, 김형보, 박순정 운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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