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30 19:11최종 업데이트 24.12.01 11:01
  • 본문듣기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1981년 연세대 입학식 날 사진. 그는 영·독·불 계열 1학년에 들어갔다.정성희추모사업회제공

1982년 7월 22일 밤 12시가 조금 안 되었을 무렵, 전방 철책선의 5통문 근처에서 어두운 밤을 가르는 여러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순간 5사단 36연대 3소대가 관할하는 열 군데의 초소에 일제히 보안등이 켜졌다. 단 한 곳, 내무반에서 30여 미터 떨어진 일명 묘지 초소라 불리는 26초소만 빼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27초소에서 근무 중이던 3분대장 박경묵은 M16을 움켜쥐고 26초소로 달려갔다. 그는 초소 앞에 다다라 숨을 가다듬고 '정성희'를 불렀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는 다시 전방 실습 차 입소해 정성희와 함께 경계 근무조가 된 조선대학교 학생을 불렀다. 역시 대답이 없다. 박경묵은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레 초소 안으로 발을 디뎠다. 민통선 밖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거칠다. 밤공기를 가르며 훅 다가오는 피비린내, 박경묵은 한 걸음 더 들어가다 멈춰 섰다. 정성희가 무릎을 꿇고 M16(총기 번호 878476)을 자기 목에 겨눈 모습으로 숨져 있었다. 목과 입, 귀에까지 피가 흥건했다. 그는 황급히 뒤돌아서서 뛰었다.


같은 시각 영외에서 거주하던 헌병대 본부의 송범식 하사는 군용 전화를 받고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천군 대광리에 있는 (5사단) 헌병 파견 부대의 신동만 상사도 서둘러 차에 올랐다. 205보안부대의 2대대 주재관 김흥대 중사, 김철호 중대장, 36연대 보안반장 강수철 대위, 205보안부대장 성하룡 중령이 26초소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타났다. 현장에 도착한 의무대는 정성희를 초소에서 끌어내 총알이 뚫고 나간 자리를 솜으로 메우고 붕대로 감았다. 그들은 현장 보존은 아예 생각이 없는 듯. 피 묻은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정성희를 의무대 차에 싣고 어디론가 떠났다.

한편 경계 근무를 서지 않던 정성희의 소대원은 모두 잠에서 깨어 일어나 있었다. 총소리와 바쁘게 내닫는 군화 소리에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으나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후 들이닥친 헌병 대원은 소대원을 밖으로 내몰고 정성희의 관물대를 뒤져 모든 물품을 가져갔다. 새벽까지 이어진 조사에서 헌병대는 "다른 의심스러운 정황이 없다"며 잠정적으로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6초소 사진. 당시 헌병대 수사 기록에 증거로 첨부되었다.정성희추모사업회 제공
총알이 정성희의 두부를 관통해 천장 슬레이트 지붕을 뚫고 나갔다는 사진. 당시 헌병대 수사 기록에 첨부되어 있던 사진이다.정성희추모사업회제공

1981년 11월 25일의 백양로는 전쟁터

26초소에서 총격이 발생한 날로부터 약 8개월 전인 1981년 11월 25일 밤, 서대문서 경찰서는 북새통이었다. 낮에 벌어진 학내 시위는 격렬했다. 이날 시위 중 주동자인 양경희(교육학과 79)가 학생회관 3층 외벽에 매달려 경찰과 대치하다 떨어지고 말았다. 학생들은 양경희를 병원에 옮기려고 몰려들었으나 경찰은 이를 막고 심지어 연행까지 했다. 학생들은 몹시 흥분했고 캠퍼스는 삽시간에 거대한 싸움터가 되었다. 전투경찰을 앞세운 서대문서의 사복조에 맞서 백양로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이 거듭되었다. 특히 학생회관 앞에서 격렬한 공방이 벌어져 돌과 사과탄이 오가고 비명과 군홧발 소리가 요란했다.

연행된 학생이 무려 200여 명, 유치장이 가득 차고 이도 모자라 복도까지 들어찼다. 서대문 경찰서는 주동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치랴, 학생 개개인의 참여 정도를 파악하라 분주했다. 서울지검 공안부는 주동 외에 적극 가담자로 분류된 열다섯 명을 군대에 집어넣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신체검사도 입영명령서도 없는, 모든 절차를 무시한 결정이었다. 1, 2학년이 열세 명, 3, 4학년이 두 명인 이들은 28일에 입소하게끔 되었고 이 중 한 명이 정성희였다.

눈앞에서 연행되는 여학생을 구하려다 붙잡힌 그는 영·독·불계열 1학년, 1962년생으로 열아홉 살이어서 징집 연령에 못 미쳤다. 담당 검사 정형근과 경찰은 이 또한 무시했다. 정성희는 11월 28일 101 보충대를 거쳐 5사단 신병교육대에서 기초 훈련을 받고 1982년 1월 14일 5사단 36연대 2대대 6중대 3소대로 배치되었다. 그로부터 반년 남짓 시간이 흐른 1982년 7월 22일 그가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19살 청년의 선택 '흥사단 아카데미'

1981년 연세대에 입학한 정성희가 찾은 서클(동아리)은 '흥사단 아카데미'였다. 백양로에서 신입생을 낚는 선배한테 걸렸으나 활동할 만한 서클을 찾던 터였고 무엇보다 '안창호의 뜻을 잇는다'는 취지가 마음에 들었다.

정성희는 은행 간부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두 여동생과 함께 행복한 가정에서 컸다. 할머니의 사랑도 각별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다닌 교회 생활은 그의 내면을 더욱 충만하게 했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쓴 '주의 세계'라는 글이다.

주여 당신의 봄은 아름다웠습니다/꽃과 새들의 즐거운 환성과/따뜻한 봄볕은/저희들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익숙한 수사에 낯익은 문장이라 신선함은 부족해도 소년의 순수한 종교적 심성이 느껴진다. 역시 중학교 때 남긴 '보아라 조국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보라 저 푸른 하늘을/들으라 저 우렁찬 고동소릴/큰 대륙 동쪽 작은 반도의/의지의 사람들의 전진을.

중 3때 남긴 문집에 실린 '보아라 조국을'. 그는 중고등 시절 수백 편의 글을 남겼다.정성희추모사업회제공

1970년대 박정희는 중고등학생에게 애국심을 강요했다. 반공 글짓기에 동원하고 간첩 잡는 표어를 쓰게끔 했다. 정성희의 글에도 이런 분위기가 엿보이나 내 나라 내 땅을 사랑하는 10대의 참 마음도 읽힌다. 정성희는 중·고등학생 시절, 이렇게 수백 편의 글과 많은 일기를 남겼다. 그는 문학·철학·종교 그리고 음악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호기심 충만하고 '앎'을 향해 나아가는 소년이었다. 이런 노력이 쌓인 탓일까? 고3 때 남긴 글에서는 번뜩이는 사회의식이 엿보인다.

'교통 지옥 속의 그 아가씨'에서 정성희는 버스 안내양이 있던 시절 만원 버스에서 고통받는 그들의 노동을 "까무러질 듯한 인간의 공해 속에 그녀는 시달렸다"라고 표현한다. 깊은 연민이 담긴 문장이다.

8월 11일 남긴 일기는 더욱 눈길을 끈다. 1979년 8월 9일 가발업체인 YH무역이 폐업하자 노동자들은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총재 김영삼)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8월 11일 무술 경관 1200명을 동원해 농성 해산 작전을 벌였다. 이때 YH 노조의 김경숙 집행위원장이 경찰에게 가격당하고 추락해 죽고 말았다. 정성희는 이 뉴스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왜 정부는 집회 시위만 있으면 무조건 국가보안법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폭력으로 저지하는지, 여공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아무 죄 없이 죽어간 여공에게 용서와 위로를 주옵소서.

고3이라 한창 입시에 바쁠 터인데 신문을 읽고 그 의미를 곱씹으며 글까지 남긴 것을 보면 정성희는 분명 남달랐다. 이런 문제 의식을 느끼고 입학한 대학에서 정성희가 흥사단 아카데미에 들어간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성희가 남긴 '교통지옥 속의 그 아가씨' 글의 일부. 버스 안내양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다.정성희 기념사업회 제공

연세대 학생운동의 본산 흥사단 아카데미

정성희는 흥사단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한국 사회를 탐구했다. 1981년 흥사단 아카데미는 학교 당국의 인가를 받지 못했으나 우격다짐으로 학생회관 내 골방을 하나 차지했다. 거기서 민족 문제, 분단 문제를 비롯해 여러 세미나가 열렸다. 분위기는 진지하고 뒤풀이는 새벽 먼동이 틀 때에서야 끝났다. 정성희는 이때도 돋보였다. 주교재는 말할 것도 없고 서너 권의 보조 교재까지 읽고 많은 메모를 들고 왔다.

평화롭게 학습만 하면 좋으련만 80년 광주항쟁 이후 맞은 첫 학년도인 1981년, 학내에는 긴장이 팽팽했다. 당시 연세대를 담당하는 서대문 경찰서의 정보과 직원이 150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학교 안에 널린 게 경찰이었다. 감시와 완력만으로 저항의 열기를 마냥 억누를 수는 없었다.

3월 19일 서울대에서 문용식이 주도한 시위에 천여 명이 참가하고, 3월 30일 성균관대에서 '학원 사찰 철폐'를 외치며 사백 명이 시위를 한 소식이 신촌 일대를 흔들었다. 서울대에선 다시 4월 14일 유기홍(더불어민주당 19대, 21대 국회의원이 된다)이 주도한 싸움이 뜨겁게 전개되었다.

이제나저제나 백양로의 함성을 기대하던 연세대생 앞에 우원식(토목공학과 2학년, 22대 국회 전반기 의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시위는 짧았다. 서대문 경찰서의 병력에 금방 제압되고 말았다. 1학기에 더는 시위가 벌어지지 않았으나 유인물은 학내 곳곳에 수시로 뿌려졌다. 그런가 하면 1학기 말인 6월, 흥사단을 이끌던 79학번 손형민과 이재훈이 '전국민족민주학생연맹' 사건으로 구속된다. 손형민이 서울 서부 지역 캠퍼스의 책임자를 맡았던 터라 흥사단 아카데미는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독자적인 유인물 투쟁을 전개하다

정성희는 이 어려움 속에서도 독자적인 투쟁을 시도한다. 서클 동료 이성우에게 유인물 배포 투쟁을 제안한 것이다. 이성우는 3수를 하고 경제학과에 입학한지라 이미 입학 전에 신검을 받았고 1981년 9월 소집 통지를 받은 상태였다. 정성희가 이성우에게 건넨 말이다.

네가 입대해서 전두환에게 명령을 받으면 광주에서처럼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다. 그때 네가 민중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뜻으로 입대 전에 유인물 배포 작업을 같이 하자. 그러면 네가 군대에 가더라도 언제까지나 우리는 하나라고 믿을 수 있다.

당차고 조리가 분명한 말이나 입대를 코 앞에 둔 이성우는 당황했다. 서클이 '전민학련' 사건으로 거의 해체된 상태고 끌어줄 선배도 없는 상태, 잡히면 꼼짝없이 구속되는 작업이기에 이성우는 여러 날을 고민한다. 그러다 마침내 유인물 배포 투쟁을 승낙했다. 교회 활동을 하면서 등사기를 다뤄본 경험이 있어 만드는 건 자신이 있었다.

뜻밖에도 제안한 정성희는 유인물을 배포한 적도 없고 기름종이에 원고를 쓸 때 사용하는 철필도 몰라 이성우는 당황했다. 두 사람은 마포구 도화동에 있는 정성희의 집에서 '신입생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오천 장을 밤새워 찍었고 다음 날 강의실, 화장실, 학생회관 곳곳에 오십 장, 백 장씩 무사히 뿌렸다.

2학기 들어 연세대학의 분위기는 미묘했다. '전민학련' 사건의 여파가 수습되기도 전에 보안사가 경제학과 4학년에 다니던 재일교포 김태홍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같은 학과 우대형까지 구속하는 바람에 캠퍼스의 공기는 뒤숭숭했다. 자칫 위축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마리는 탈춤 행사에서 풀렸다. 9월에 노천극장에서 열린 탈춤반 공연 후 자연스레 시위가 일어났고 10월 26일에는 문무대에 입소한 문과대 1학년생이 '병영교육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래저래 들썩이는 분위기는 마침내 11월 25일 양경희·백혜련 두 여학생이 주도하는 시위로 나타났다. 연세대 학생운동에서 길이 기억되는 투쟁이다. 이날이 정성희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지만.

- 2편 <"날 너무 믿지마" 그의 죽음 뒤에 어른거리는 보안사>(https://omn.kr/2b5o6)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1) 정성희의 아버지 정낙헌의 문제 제기에 따라 육군 사망사고 재조사위원회는 1999년 다시 조사를 해 사망 시각을 7월 22일 23시 30분으로 특정하였다. 한편 2002년 의문사위는 정성희의 사망 시각을 7월 23일 0시 10분으로 판단했다. 연세대 동문과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대책위가 함께 꾸린 정성희의 죽음에 관한 조사모임은 2022년 23:10~23:30분으로 판단했다. 여기선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대책위의 조사 결과를 좇아서 기술했다.

2) 분대장 박경묵은 헌병대 수사에서 최초 현장 목격자로 확인되었다.

3) 2001.9.21. 2대대장이었던 최정식이 의문사위에 나와서 26초소에 모인 사람들에 관해 진술했다.

4) 1981년 11월, 당시 서대문서 조사반장 김기남은 2001년 5월 9일 의문사 조사위 조사에서 정보과 직원이 150명, 연행자가 200명이라고 진술한다.

5) 연행된 열다섯 명은 3사단 5명, 6사단 5명, 5사단 5명씩 배치되었고 1학년 7명, 2학년 6명, 3학년 1명, 4학년 1명이었다. 1학년은 정성희, 김형보, 박순정 운운이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