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신사참배하는 모습. 배은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고초를 겪었다.
연합뉴스
배은희의 신심은 '일왕과 하나님 중 누구를 믿을 것이냐?'라는 물음 앞에서도 대체로 꺾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지만, 그는 이를 거부해 야학이 폐교되고 유치원이 넘어가고 그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는 고초를 겪었다. 그의 회고록인 <나는 왜 싸웠나?>에 근거한 위 논문은 "중일전쟁 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김가전과 최서양과 함께 투옥되었다 풀려났다"라고 말한다.
신사참배에 대한 그의 저항은 잠시 흔들렸다. "1941년 태평양전쟁 후에 다시 투옥되어 가족을 모두 투옥하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강제로 한 번 신사참배를" 했다고 논문은 말한다. 그러나 "그 후에 11일간 금식하며 회개하였다"라고 한다. 그의 목회 활동은 1943년에 중단됐다. 일본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목사 활동을 계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신앙에 대해 나타난 그의 열정은 민족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났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대한제국 멸망 직후 일제의 병합에 항의하다가 잠시 투옥됐다. 그는 이 사건이 자신의 독립운동에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했다.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피의 투쟁을 한 종자가 그때 뿌려졌던 것"이라고 그는 회고했다.
31세 나이로 맞이한 1919년 3·1운동 때는 신학생 신분으로 평양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때문에 태형 40대를 맞았다. 풀려난 뒤에는 매 맞은 하체를 끌고 대구·부산·청도 등에 가서 또 만세를 외쳤다.
그런 열의는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에 대한 참여로 이어졌다. 신간회가 창립(1927.2.15)된 해에 보도된 그해 5월 13일 자 <조선일보> 1면 좌중단은 전주 지역 신간회 준비위원장인 배은희가 이틀 전에 신간회 전주지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했다고 보도했다.
배은희의 열정은 해방 뒤 한동안은 이승만에 대해 나타났다. 그는 이승만을 열렬히 지지했다. 미소공동위 참여를 놓고 우파 정치권이 분열됐을 때도 이승만 편이었다. 김구가 "죽일 놈"이라고 말했다는 진술이 나온 것도 그가 이승만의 충실한 지지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1948년 정부수립을 즈음해 이승만이 자기 정당을 갖기를 원했을 때는 목요회라는 모임을 이끌며 정당 건설에 앞장섰다. 또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 3년 만인 1951년에 자유당이라는 여당을 갖게 됐을 때는 이 당의 핵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기붕이 이승만의 신임을 바탕으로 자유당 당권을 잡는 과정에서 그는 이 당과 멀어지다가 결국 떠나게 됐다. 1955년 12월 25일 자 <경향신문> 1면 중하단은 "아직 자유당에 당적을 가지고 있던 배은희"가 이틀 전에 탈당했다고 보도했다. 이승만의 충성스러운 지지자였던 그는 민족과 신앙을 대할 때만큼의 열정을 이승만에게 보이지는 않았다.
배은희는 1951년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1954년 총선 때는 대구 갑구에서 낙선했다. 1966년 2월 7일 자 <동아일보> 3면 좌하단은 "자유당 창당 때의 최고위원이었던 배은희씨는 5일 오후 대구시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라고 보도했다.
배은희는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독립유공자는 아니지만 존경받을 만한 행적을 많이 남겼다. 신사참배에 대한 태도는 대부분의 목사들과 비교하면 매우 드문 편에 속한다. 또 3·1운동과 신간회 활동으로도 독립운동에 많이 기여했다. 친일청산기구인 국회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킨 이승만과 곧바로 절연하지 않고 수년간 같은 길을 걸은 것은 그의 흠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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