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8 11:26최종 업데이트 24.11.2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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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페미니스트 작가 록산 게이AFP/연합뉴스

"분명히 트럼프는 자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의 잘못 때문에 성공했다. 우리가 정의로운 세상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Clearly, Mr. Trump is successful because of his faults, not despite them, because we do not live in a just world.)"

미국의 작가 록산 게이가 지난 17일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재선을 두고 쓴 <뉴욕타임스> 칼럼의 일부다. 그는 트럼프가 성추행 입막음 혐의, 수십 건의 중범죄 유죄 평결, 인종차별적 행보, 이주민 혐오에도 불구하고 다시 당선된 것을 두고 "미국인은 용납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관용이 거의 무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트럼프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과 맞붙어 승리했던 2016년 미 대선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승리가 '경제적 불안' 탓이라고 진단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인기를 부추긴 게 노골적인 인종차별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번 미국 대선을 두고도 "장바구니 물가에 대한 분노 탓"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 걸 감안하면 저 글의 시차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어 날아드는 록산 게이의 펀치라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모두, 그래, 이게 바로 우리라고, 그중에서도 최악의 우리라고 인정해야 한다."

지난 10년 간 차별과 혐오에 대항한 기록

록산 게이의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책 표지문학동네

<나쁜 페미니스트>, <헝거>로 잘 알려진 페미니스트 작가 록산 게이의 신간이 국내에 출간됐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원제는 <의견들>(Opinions)인 책은 지난 10년간 게이가 <뉴욕타임스> <가디언> <하퍼스바자> <마리끌레르> 등의 다양한 매체에 쓴 66편의 칼럼을 모았다. 미국 사회에 정체성 정치와 인종‧젠더 차별, 시민의 의무와 책임 등을 부지런히 묻고 따진 흔적이다.

나도 많게는 일주일에 두 편의 칼럼을 쓰는 처지로, 자주 칼럼의 한계에 대해 생각한다. '칼럼이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이상일 수가 있나'라는 것이다. 칼럼은 태생이 당대의 이슈에 즉시즉시 감응하는 글인 한편, 분량은 짧다. 방대한 자료 조사 및 취재를 하기에도, 정치하게 논리를 세우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필자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독자가 소화하기에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알잘딱깔센'으로 자주 마무리된다. (실은 그 정도면 꽤 괜찮은 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게이의 글은 타협도 없고, 성역도 없다. 흑인의 죽음이 일상화된 사회나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는 시민성에 대해서는 누차, 반복해서, 지치지도 않는다는 듯이 목소리를 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인 트럼프를 두 번이나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 사회에 대해서도 타자화하지 않고 '최악의 우리'라며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그렇게 우리들의 일상과 바투 붙은, 전방위적인 참견의 기록이어서 바다 건너에 사는 내가 읽기에 아무 위화감도, 이질감도 없다.

'모든 목숨은 소중하다'고?

2020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집회. 마스크에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문구가 적혀있다.EPA/연합뉴스

아이티계 흑인인 게이가 가장 힘주어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다. 일상적인 교통 검문 상황에서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고, 초인종을 잘못 눌렀다는 이유로, 엉뚱한 차에 탔다는 이유로 총을 맞은 흑인 남자아이와 여성들. 그때마다 희생자에게는 '그 남자는 그 길을 걸어다니지 않았어야 해'라거나 '그 여자는 그 경찰에게 더 상냥하게 굴었어야 해' 하는 식의 부당한 물음들이 날아든다.

이 얘기들은 우리한테도 전혀 낯설지 않다. 성폭력 피해자들, 젠더 기반 폭력 피해자들에게 날아드는 '거길 가지 말았어야 했다'부터 왜 짧은 치마를 입었느니 하는 얘기들까지. 게이는 짐바브웨에서 열세 살 사자가 미국의 치과의사에게 사냥당해 숨진 사건을 언급하며 "이제 외출할 때 사자 의상을 입어야겠다"고 썼다. 사자에게는 왜 사바나를 배회했냐고 묻지 않으니까.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에 '모든 목숨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로 반격하던 말들은 어떤가. 한국에서는 이와 비슷하게 젠더 기반 폭력, 여성 혐오 범죄의 위험성을 언급하면 꼭 마주하는 "남자 피해자도 있다"가 있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 선언이 다른 것을 부정하는 것인 양 "모든 목숨은 소중하다"는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지 마라. 대신 유색인이 왜 자신들의 삶도 가치 있음을 세상에 상기시킬 수밖에 없는지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라.(134p)

지난 25일 서울 보신각 앞에는 192켤레의 신발과 192송이의 꽃이 나란히 놓였다.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한 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사망한 여성들을 기려 벌인 퍼포먼스였다(언론 보도 집계를 통한 최소 수치다). 2009년부터 15년 동안 사망한 여성의 숫자 '1672'도 함께였다. 이 숫자와 신발들 앞에서 "남성 피해자도 있다"고 말하는 일을 한국 사회와 정부는 되풀이해 왔다. 나는 이들에게 게이의 말을 빌려 말한다. "내뱉지 말라."

안전을 추구하면서, 안전이 보장되는 세상을 위해 분투하기를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 시작날인 지난 25일 오전 서울 종로 보신각앞에서 한국여성의전화 주최로 '여성 살해 규탄 퍼포먼스 - 192켤레의 멈춘 신발'이 열렸다. 여성의전화는 '2009년부터 언론보도를 통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지난 15년간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된 여성과 주변인은 최소 1672명, 2023년 한해 동안만 최소 192명이다. 이중 최소 17명은 사망 이전 신고했음에도 보호받지 못한 채 살해되었다'고 밝혔다.권우성

게이가 써 내려간 66편의 기록들은 시공을 초월해서 반복되는 차별과 혐오의 역사다.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반대와도 맥이 닿아 있는, 대학을 무대로 한 안전 공간에 대한 희구에 대해서도 게이는 말한다. "안전한 공간이라는 발상을 조롱하는 이들은 안전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위치인 경우가 많다"라고.

반대로 한계점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사는 이들은 '안전한 공간'을 원하게 되며, 이를 가혹한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로 여긴다는 것이다. 대학 강단에 서는 그는 학생들이 정체성이나 정치적 지향에 상관없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들어설 수 있는 '안전 공간'으로서의 강의실을 만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진짜 세계'를 맞이할 학생들에게 이렇게 덧붙인다. '안전을 추구하면서 안전이 보장되는 세상을 위해 분투할 수 있기를'. 그 말에 게이의 세계관이 다 함축돼 있다.

지금 여기를 살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분투를 멈추지 말 것. '무던하라'는 소리에 '누구를 위해 둔감해지라는 것인가?'라며 날을 세울 것.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말은 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안온함을 느끼는 자의 것이기에, 게이는 둔감할 것을 거부한다. '화가 많다'는 비난이 가진 함의에 발끈하지만, 분노야말로 불의에 대한 타당한 반응이므로 그는 기꺼이 '화를 낸다'.

게이가 트럼프의 재선 직후 쓴 <뉴욕타임스>의 칼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트럼프의 재당선으로)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항복의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불가능한 싸움에 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8년 전 트럼프의 당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던 게이는 다시금 트럼프를 선택한 정의롭지 않은 '우리'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리는 한편으로 다시 싸울 태세를 갖춘다. 나 또한 수많은 차별과 혐오에 맞서 같은 글을 쓰고 또 쓰고 같은 말을 하고 또 할 태세를, 게이의 삶을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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