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7 12:10최종 업데이트 24.11.28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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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연세의료원 산하 세브란스병원에서 환자와 의료진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이정민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 세브란스 병원 암병동 앞에서 콜이 왔다. 챙 없는 모자를 눌러쓴 60대 여성이 시장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모자 아래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는 가까운 주택가였다. 수심 깊은 얼굴에 말없이 조용했던 그녀는 가끔 한 숨을 기다랗게 내쉬었다. 차 안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집이 가까우니 혼자 통원하며 항암치료 중인 환자인가라는 혼자 생각을 했다. 작년에 택시를 시작하고 병원 내 거대하게 따로 서 있는 암병동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날이었다. 연세대를 지나 광화문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우뚝 서 있는 암병동의 웅장한 덩치에 밀려 본관이 뒤로 물러선 듯 보인다.


2023년 전체 사망자 중 24.2%로 사망원인 1위, 통계작성이 시작된 1983년 이후 사망원인 1위(통계청 기준) 자리를 고수 중인 암이 그 큰 병원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건물 크기가 설명해주는것 같아 마음이 스산해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 강남구 일원동 삼성병원 암병동 앞에서 콜이 왔다. 삼성병원에 암병동이 크게 따로 있다는 사실도 나는 이 때 처음 알았다. 수서역에 손님을 내려주고 양재대로를 타고 개포동 방향으로 가는 중이었다.

병원 건물을 끼고 산그늘이 진 좁은 길을 따라 암병동 앞으로 갔다. 70대로 보이는 부부였다. 차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은 그들의 목적지는 30키로가 넘는 김포공항이었다. 가는 길 내내 부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남편은 폐암이었다. 그들은 병원에서 있었던 일부터 의사가 주지해 준 말과 앞으로의 치료에 대해 걱정 가득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암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병원 병실(자료사진)elements.envato

2023년 전체 사망자 중 사망원인 1위가 암이었다면 폐암은 또 전체 암사망자의 21.9%로 가장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다.

40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망원인도 암이었다. 위암이 먼저였고 식도로 전이되어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는 집에서 영양주사로 삶을 연명하셨는데 팔에 더 이상 바늘 꽂을 데를 못 찾을 정도였다.

그때는 1989년부터 시작된 전 국민 대상의 보편적 의료보장제도가 실시되기 훨씬 전이어서 수술을 포함한 모든 병원비와 약값은 개인의 몫이었다. 병원비 때문에 수술과 입원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흔했을 정도로 암과 같은 큰 병은 곧 한 집안의 추락이나 몰락을 의미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방이지만 언론사 간부까지 지냈던 아버지 덕에 비교적 부유한 축에 들었던 집 안에 냉기가 돌기 시작하고 쌀독에 있던 일반미가 정부미로 바뀌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열 네 살 사춘기에 접어 들어 나를 포함한 우주 전체가 혼돈스러웠던 나는 쉬쉬했던 아버지의 암 소식을 수술을 앞두고서야 들었지만 그 전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 집안에는 일상에서의 웃음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긴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면회가 허락되고 미음을 먹다가 죽까지 먹을 수 있게 된 어느 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온 내게 어머니가 집에서 끓인 죽을 냄비째 보자기에 싸서는 식기 전에 어서 병원에 가져가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보온병도 있었는데 왜 냄비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교복을 입은 채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당시 아버지가 입원했던 병원은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집에서 이십 분은 걸어야 했다. 식기 전에 아버지께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입원실로 향하는 병원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면회시간이 지나있었다. 후문으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였다. 어렸던 나는 잠깐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느닷없이 휩싸인 혼란스러움에 이성을 잃고 감정이 북받치기 시작했다. 식기 전에 아버지에게 갖다 드려야 하는데 라는 절망감이 먼저였다.

이어서 어느 순간 속에서 부글부글 하던 뜨거운 것이 울컥 하고 목을 넘었다. 동시에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 집안을 무겁게 짓누르던 슬픔이 눈물로 비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굳게 닫힌 병원 후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서 울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었다.

속이 비워지도록 울고 난 뒤 다시 정문으로 돌아가 당직을 서는 직원에게 식어가는 죽냄비를 건네주고 돌아가던 열 네 살의 내가 거기 암병동 앞에 다시 보였다. 아버지는 수술 후 일 년을 더 살다 돌아가셨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열다섯 살이었다. 암은 어린 나와 우리 가족들에게 가장을 빼앗아간 트라우마로 남았다. 암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암병동 손님들의 목적지

서울역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들이 승객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병원비 때문에 고통받는 암환자는 예전에 비해 줄어 들었다. 공적의료보험 체계가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고 누구나 하나 정도는 들고 있는 암보험까지 있어 경제적 충격은 크지 않다. 의료 수준이나 치료약도 과거에 비해 크게 나아졌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암은 사망원인 1위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잊을 만하면 암병동에서 호출을 받는다. 계절과 관계없이 그 길을 가는 내 마음은 늘 을씨년스럽다. 그런 반복을 하는 동안 나는 두 암병동에서 태운 손님들의 목적지가 대체로는 서울역이나 수서역 또는 김포공항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치료를 위해 지방에서 원정 온 환자들이었다.

서울에 있는 7만여 대의 택시들 중 하나인 내가 이럴 정도면 암치료를 위해 지방에서 서울을 오가는 환자들 수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다. 암환자 만이 아니었다.

두 달 전 서초구에서 택시를 탄 오십대 남자손님은 무릎을 고치기 위해 포항에서 서울로 와 수술하고 입원까지 했다가 내려가는 길이었다. 가까운 부산에서도 그 정도 수술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내 말에 그는 내 몸의 어딘가를 찢는 일은 크고 작고가 아니라 죽고 살고의 차원으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인터넷에서 찾아낸 병원은 내가 매일 단골로 들르는 가스충전소에서 큰 길 건너 맞은편 가까운 곳에 있었다. 차들이 쏜살같이 내달리는 큰 길로 난 정문은 늘 사람 흔적 없이 한가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을 내려주려 들어간 후문에는 형광조끼를 입은 주차원들이 붉은빛의 경광등을 흔들며 차와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인적 없던 정문과 달리 차와 사람으로 북적이는 후문 풍경이 너무 대조적이어서 놀랐다. 게다가 각종 병원이 즐비한 거리도 아니고 역세권도 아닌 한산한 주택가 앞 큰 길가에 얌전하게 서 있는 건물 하나가, 무릎 수술로는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병원이었다는 사실이 생경스러웠다.

또 어느 날은 강남역 인근 병원에서 허리협착증을 고치기 위해 수술과 입원을 하고 퇴원하는 중년 여성을 수서역에 내려주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지방 대학병원에서 고지 받은 암이 오진은 아닌지 정말 암이 맞다면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서울 큰 병원을 찾아 온 60대 남자를 크다고 소문난 병원에 내려주기도 했다.

큰 병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통설을 익히 들어왔지만 택시를 하면서 직접 체감한다. 암뿐 아니라 크다고 생각되는 질병이나 질환을 고치기 위해 사람들은 서울로 온다. 나 혼자 실어나르는 지방 환자들이 이럴 정도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버젓이 서 있는 지방 대학병원까지 외면하고 서울로 몰려드는 것일까.

'올 상반기 지방에서 서울의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을 찾은 환자는 167만 806명이었다. 이 중 59.3%인 99만4401명은 빅5 병원에서 진료받았다. 서울에 있는 상급종합병원은 서울대병원·세브란스병원·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성모병원등 '빅5'병원을 포함해 14곳, 종합병원은 44곳이다. <헬스조선.2024.09.09>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찾은 지방 환자의 통계가 이 정도라면 위에 소개한 무릎이나 허리 또는 내가 모르는 질병이나 질환을 잘 고치기로 소문난 중소병원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아진다는 얘기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간한 주요수술통계연보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인들이 받은 상위 5개 수술의 절반 이상이 서울·경기·인천 등의 병원에서 이뤄졌다. 이 비율도 2015년 50.0%에서 2021년 53.7%로 계속 상승하고 있다. 수도권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이 국민 2명 중 1명의 수술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들에게 한국인들이 주로 받는 주요 수술 경험이 쌓이니 환자들도 점점 더 많은 임상 경험이 있는 수도권 병원으로 몰리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셈이다.<시사저널.2023.05.08>

이 기사 말미에는 '습관적으로 환자와 의사의 서울 집중으로 인해 지방의료 인프라조차 붕괴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달린다. 새삼스럽지 않다. 오래된 문제이고 당연한 의견이다. 정부에서 의도적으로 육성하는 지역거점대학처럼 지역거점병원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큰 병은 서울로'라는 통념, 언제쯤 깨질까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본관.권우성

의사들이 서울로 오고 서울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유는 모든 게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자녀들 다녀야 할 일등급 학원이 즐비한 대치동도, 강남에 있는 아파트도, 언제든 뮤지컬 공연이 펼쳐지는 예술의 전당도 서울에 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병원과 가장 많은 환자들이 서울에 있다. 서울은 한국사회 특권층인 의사들이 살기에 가장 적절한 도시다.

의사는 여간해서는 서울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의사들을 찾아 환자들은 서울로 온다. 집은 남도 끄트머리에 있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20대 딸을 둔 50대 엄마가 손님이었다. 되게 외향적이었던 그녀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30여 분 잠깐의 침묵도 견딜 수 없다는 듯 쉬지 않고 말했다. 유방암에 걸렸는데 볼 것도 없이 바로 딸이 있는 서울로 와서 암을 제일 잘 고친다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항암도 하고 수술도 했다.

비슷한 시기 같은 병에 걸린 친구는 지방 큰 병원에서 덜컥 수술부터 했는데 몇 년 되지 않아 재발이 됐다. 자신은 재발 없이 완치되는 중인데 일찍 서울에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를 조목조목 내게 설명했는데 글로 옮기기엔 적절치 않다. 비의료인의 확신에 찬 의료적 추론이다. 그녀의 결론은 어쨌든 서울과 지방의 어쩔 수 없는 의료수준 차이였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추론을 굳게 신봉했다. 병이 치유되고 있는 자신의 몸이 증거였다. 큰 병은 서울로라는 통념은 우리 사회 저류에 흐르는 큰 물줄기다. 오랜 과거로부터 다져진 밑바닥 정서다. '인서울'을 염원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정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 옛날 쌀 팔고 소 팔아 대학등록금 마련하던 시절에도 서울에 있는 일류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면 어떤 부모든 집이라도 팔 기세였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서울로의 향심은 참으로 꺾기 힘든 민심이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귀에 익은 이 말은 사람의 본능적인 희구를 간파한다. 중심을 향한 인간의 본능적인 향심이 도시를 만들고 서울을 키웠다. 수학에서 같음을 나타내는 기호는 등호(=)다. 이는 영어로 이퀄(equal)인데 그 의미는 같다 동등하다 균등하다 등으로도 쓰인다. 향심과 마찬가지로 평등과 공정도 인간 본성에 내재된 마음이다.

서울과 지방과의 의료격차 문제에 대해 정부와 학계 등이 나서서 균형을 맞추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말해왔다. 의료서비스 접근성 향상과 원격의료 서비스 제공, 이동형 의료 서비스와 지방 의료 인프라 투자, 지역 사회 건강 프로그램 활성화와 정기적인 건강검진 등이 반복되어 되풀이 된다. 거기에 지역거점국립대학이나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혁신도시처럼 지역거점병원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관련 전문가도, 심지어 현존하는 모든 자료들을 섭렵해서 순식간에 분류하는 인공지능(AI)도 도출해내는 적절하고 필요하다는 정책이다. 이 정책들이 올바른 것인지 나는 판단할 능력이 없다. 이런 정책들이 과거에 비해 현격하게 벌어진 서울과 지방과의 의료적 수준을 당장 같은 수치로서의 평균값으로 만들기에는 역부족인 현실일 뿐만 아니라 사실 그렇게 되지도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편차를 줄이기 위한 중단없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것이다.

공교롭게 나는 삼일 전 서울역에서 태운 손님을 신촌의 암병동에서 내려주었고 바로 어제는 강남 일원동에 있는 암병동에 젊은 여자 손님을 내려주고 왔다. 이제 나에게 어느 쪽이든 암병동으로 가는 길은 너무 익숙해졌지만 거기 산그늘진 좁은 길을 따라 병동 앞으로 갈 때 절로 스산해지는 마음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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