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8 07:14최종 업데이트 24.11.28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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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사람들'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핵심 인사들의 역할과 이들이 주도한 정책을 분석해 그에 따른 문제점과 사회적 파장을 조명하는 기획입니다. 대통령 측근으로 분류된 이들이 빚어낸 국정 난맥상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탐구하고 그 대안을 모색합니다.[편집자말]
2023년 6월 5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대통령실

검사 출신 박민식은 지난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캠프의 상황실총괄부실장을 맡아 활약했고, 윤석열이 당선된 이후에는 당선인 특별보좌역으로 활동했다. 그런 박민식이 뜨거운 '뉴스메이커'로 떠오른 것은 국가보훈처장을 거쳐 초대 국가보훈부 장관을 맡게 된 2023년 5월부터였다.

박민식은 "장관으로서 대한민국과 정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사 표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말로 '윤석열표 이념전쟁·역사전쟁'의 돌격대장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는 "보수가 그동안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의사 표시를 하는 데 있어서 주눅이 들어 있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좋게 말해 게을렀던 것이고, 안 좋게 말하면 눈치 보는 것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하다 지금 역사가 엉망이 됐고, 나라의 방향도 이상하게 됐다"는 것이다.


박민식은 "역사와 이념은 공허한 탁상공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방향성이나 철학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서 "특히 실제 국민의 삶에도 영향을 준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나 논리는 그 비장함(?)에 비해 허점투성이여서 윤석열 정부의 역사의식과 철학의 부재만 들춰내고 만 꼴이 되었다.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이라고?

2023년 3월 26일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박민식은 국가보훈처장이던 2023년 3월 26일 '이승만 건국대통령 탄신 제148주년 기념식'에서 "도대체 왜 누가 건국 대통령을 이렇게 왜곡하고 날조하고 또 방치시켜 왔단 말입니까"라고 개탄한 후 "진영을 떠나 이제는 우리 후손들이 솔직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을 재조명할 때"라고 했다. "그것이 건국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의무일 것이고 자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역사 인식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이라 칭하는 것부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행태였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하고 있고, 1948년의 제헌헌법 전문에는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만방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하여 대한민국의 건립은 대한민국정부를 정식으로 수립한 1948년이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1919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출발을 1919년 4월 11일로 인정하더라도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 아닌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이는 1919년 4월 11일에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는 대통령이라는 직함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시 이승만의 지위는 총리였고, 임시대통령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은 1919년 9월에 가서였다.

이승만의 업적을 재조명하자면서 "이승만의 과(過)가 2라면 공(功)은 8"이라는 박민식의 주장도 역사적 평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주장이다.

이승만은 1925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서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라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여 임시대통령의 자리에서 쫓겨난 인물이거니와 1960년 4월에는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구현한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의 자리에서 또다시 쫓겨난 인물이다. 여기에 제주4·3사건과 6·25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자라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에 직면하는 순간 '공이 2라면 과가 8'이라면 모를까 '과가 2라면 공이 8'이라는 주장 역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민간차원에서 추진되던 이승만기념관 건립 사업이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정부 예산 지원사업으로 바뀐 것도 박민식 장관의 작품이다. 4·19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을 기념하는 이승만기념관을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지원할 수 없다 보니 만들어낸 편법인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최근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옆 부지로 장소를 확정했다고 발표한 이승만기념관 사업은 무려 460억 원에 달하는 정부예산 책정 소식까지 겹치면서 "국민 통합의 공간 창출"은커녕 그 출발부터 국민적 갈등 유발 사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백선엽이 친일파가 아니란 사실에 직을 걸겠다"는 국가보훈부 장관

현충원 누리집에 원래 있던 백선엽의 안장기록현충원 누리집의 백선엽 안장기록 비고란에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휘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이 문구는 2024년 7월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의 지시로 삭제되었다.김학규

박민식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백선엽에 대해 "공부를 해보면 해볼수록 이분은 친일파가 아니"라면서 "제 직을 걸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다"고 강변했고, 이도 모자라 서울현충원 누리집에 실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이라고 쓴 문구를 삭제하는 조치도 취했다.

박민식은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했지만, 조선인 독립군 토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백선엽이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한 1940년대에는 만주에 독립군이 없었고, 간도특설대의 토벌 대상은 홍군(중국 인민해방군)이나 비적이었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하지만 이를 통해 박민식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을뿐더러 백선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 나아가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대단히 무지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냈을 뿐이다.

진상규명위원회가 백선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근거는 제2조 제10호의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였다. 실제로 백선엽은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의 군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한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조선인 특수부대)의 장교로서 열하성과 북경 부근에서 팔로군과 10여 회의 전투를 치렀는가 하면 연길에서 국경수비 임무에 종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이러한 사실은 백선엽 스스로가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이미 인정한 내용이었다.

백선엽이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 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고 했음에도 제2조 제3호의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를 적용하지 않은 이유는 백선엽이 그러한 행위에 가담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민식이 동북항일연군의 주력이 소련령으로 이동한 1940년대에도 만주에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는 소부대가 여전히 존재했거니와 백선엽이 속한 간도특설대가 맞서 싸운 팔로군에 다수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백선엽을 비호한 처사는 그가 정말 공부를 했는지 의심케 하는 근거가 될 뿐이다.

국민통합 강조하면서도 민주유공자법은 철저히 외면

2023년 3월 1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박민식 국가보훈처장과 악수하고 있다.대통령실

박민식은 "보훈은 국민통합과 국가정체성을 확립하는 마중물이자 지속 가능한 미래를 이끌어가는 국가의 핵심 기능"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재임 중 '독립·호국·민주'라는 보훈의 3대 가치 중 특히 민주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철저히 외면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 나라이다. '민주'가 보훈의 3대 가지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된 것도 바로 이 대목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일찍이 건국공로자로 인정받고 있는 4·19혁명 참여자만이 아니라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수난을 당한 사람들이 '5·18특별법'에 따라 민주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한일회담반대투쟁, 반유신투쟁, 부마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 등 다른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우리 사회 민주화에 기여했음에도 그 과정에서 수난을 당한 사람들은 아직도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형평성 문제도 해소할 겸 우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을 대상으로라도 민주유공자로 인정해서 국가가 감사의 표시를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민주유공자법안에 대한 박민식의 태도는 완강했다.

박민식은 재임 기간 중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같은 분을 민주유공자로 하자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야당안은 누가 그 대상인지 장관도 알 수 없는 깜깜이 법안이고, 엉뚱한 사람이 민주유공자가 될 수 있는 법안이어서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민주유공자법안의 심의 대상은 이미 공개되어 있고, 그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심사는 심사위원회에서 할 수 있다. 야당이 제안한 민주유공자법안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국가보훈부에서 별도의 법안을 정부 입법으로 제출해도 되지만, 박민식은 재임기간 내내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민주유공자법안 자체를 근본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읽힐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재임 기간 내내 독립·호국·민주라는 보훈의 3대 가치를 균형 있게 적용하여 국민통합과 국가정체성을 확립하고 확산하는 데 기여하기는커녕, 낡은 이념과 편향된 역사관에 기초하여 국민을 상대로 한 '이념전쟁·역사전쟁'을 벌이는 일에 골몰했던 박민식은 윤석열 대통령의 칭찬을 들었을지언정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국가보훈부 장관으로서는 '0점 장관'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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