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2 11:59최종 업데이트 24.11.22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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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아카데미극장 철거 현장원주시가 독단적으로 원주아카데미극장을 철거한 장소.정윤희

지방 권력이 바뀐 이후, 전임 시정에서 추진한 문화예술 사업이 충분한 검토와 토론 없이 중단되거나 훼손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강원도 원주는 그 전형적 사례다. 이곳 문화예술 활동가들에게 지난 2년은 지자체장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역 차원에서도 '블랙리스트'가 작동할 수 있음을 여실히 실감한 나날이었다.

정권 바뀌자마자 '전임 시정 지우기' 논란

지난 지방선거에서 12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한 원강수 원주시정은 출범할 때부터 문화예술계를 향한 칼바람을 예고했다. 시장직 인수위원회 보고서가 전임 시정 문화예술 사업 상당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재검토를 권고한 것이다. 하지만 전문성에 기반한 근거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주관적 판단에 치우친 서술이 주를 이뤘다. 보고서를 두고 "사실관계를 왜곡했다", "편향됐다", "전임 시정 색깔 지우기"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아카데미극장의 복원 사업은 원주 시민에게 공감대가 크게 형성되어 있지 않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시 재정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아카데미극장은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도 미비하며, 안전성 문제, 기대 이하의 활용도 등의 문제로 복원 필요성이 없어 보인다."
- 민선8기 원주시장직 인수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 중

원강수 시장은 인수위 의견을 "고스란히 판단 근거로 삼지 않았다"라고 밝혔으나, 결과적으로 인수위가 지적한 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용해 전임 시정 문화예술 사업 전반을 재검토했다. 그리고 실제로 '전임 시정 지우기'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대대적인 문화예술계 탄압이 펼쳐졌다. 그 대표 사례가 작년 원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슈가 된 아카데미극장 철거다.

아카데미극장 철거 강행한 원주시

1963년 원주 원도심에 문을 연 아카데미극장은 한국에서 원형을 간직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으로, 시민의 추억과 지역의 역사를 품은 기억유산으로 평가받았다.


2006년 폐관 후 방치됐으나 시민들이 벌인 적극적인 보존 운동의 결실로 2022년 1월 원주시가 극장을 매입하고 재생 사업을 추진한다. 극장을 안전하게 리모델링해 문화커뮤니티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청장상을 수상하고,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에 선정돼 국·도비 39억 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원주시 주민자치협의회와 전국 54개 영화문화단체가 지지할 만큼 공감대를 형성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원강수 시장은 '막대한 예산이 든다'는 이유로 순조롭던 재생 사업을 뒤집고 작년 4월 돌연 극장 철거를 발표한다. 그 자리엔 야외공연장과 주차장을 짓겠다고 했다. 이미 인근에 잘 활용되지 않는 야외공연장이 있고 대형주차타워 건립도 추진 중이었다는 점에서 의문부호가 달리는 결정이었다. 무엇보다 충분한 숙의를 거치겠다는 원 시장 말과 달리, 제대로 된 여론 수렴은 없었다.

원주시는 그 흔한 공청회 한 번 열지 않았다. 원강수 시장 스스로 약속한 여론조사도 말뿐이었다. 사실상 공무원만 있는 시정조정위원회를 통해 일방적으로 철거를 결정했다. 시민 수백 명이 조례에 따라 청구한 공개 토론은 법령 근거도 없는 서명부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며 반려했다.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하지 않다'는 국민권익위원회 권고마저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공무원과 시장 측근은 여론전에 앞장섰다. 주무부서 과장은 철거안을 강조한 자료를 극장 인근 상인들에게 배포했다. 철거 지지 성명과 집회를 주도한 인물 중엔 원강수 시장이 취임하고 6개월 동안 법인카드로 가장 많은 금액을 결제한 단골식당 주인이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시장 비서 측근 업체가 지시를 받고 조직적으로 철거 찬성 댓글을 쓰고 집회에 인력을 동원했다는 의혹이 전직 직원들의 폭로를 통해 제기되기도 했다.

행정 절차도 엉망이었다. 극장 용도를 보존에서 철거로 바꾸는 공유재산심의위원회 안건은 긴급하다는 이유로 서면 심의해 통과시켰다. 시의회에도 사전 공고 없이 철거안을 제출해 절차 위반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당초 6억 5000만 원이라던 철거 비용은 나중에 16억 5000만 원으로 대폭 늘어 철거 명분을 위해 의도적으로 낮게 책정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공사 도중 산업안전보건법, 석면안전관리법,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했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원주시가 졸속·불통으로 철거를 강행하려 하자, 극장을 지키려는 시민들은 '아카데미의 친구들(아친)'이란 이름으로 모였다. 극장 맞은편에 노란 텐트를 치고 시청 앞에 농성장을 꾸려 공개 토론으로 철거 여부를 결정하자고 거듭 요구했다. 영화계를 비롯한 전국 문화예술인·단체, 시민사회단체, 교수·연구진, 학술단체 등도 힘을 보탰다. 문화재청도 나서 원주시에 등록문화재 지정을 여러 차례 권고했다. 지역 안팎에서 보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음에도, 원주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리적 충돌까지 감수하며 공사를 밀어붙였다.

아카데미극장은 작년 10월 30일 결국 철거됐다. 원주시는 철거 반대에 나선 시민·영화인 20여 명을 업무방해 등 혐의로 고소·고발하며 탄압을 이어갔다.

줄줄이 이어진 문화예술 사업 '뒤집기'

원주아카데미극장 위법 철거 규탄 시민대행진원주아카데미극장 위법 철거 규탄 시민대행진아카데미친구들

공교롭게도 아카데미극장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문화예술 사업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전임 시정에서 아카데미극장 관련 사업을 진행한 법정 문화도시는 작년 3월 사업 주체가 독립적인 센터에서 원주문화재단으로 바뀌었다. 재단은 원강수 시정 들어 정관을 바꿔 공개모집 없이 시장직 인수위원을 역임한 의료인을 대표이사로 선임하고, 이례적으로 원주시 5급 공무원을 사무처장으로 파견해 관의 영향력이 강해졌다는 평가를 받는 상태였다.

원주시는 법정 문화도시 사업에 대해 "시민주도형이라는 목표에 지나치게 매몰돼 방만하게 운영됐다"며 그동안 사업을 운영해 온 원주시 창의문화도시지원센터를 상대로 특정감사를 진행, 보조금 부적정 사용 등 혐의로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하지만 '총체적 부실이 있었다'던 원주시 주장과 달리, 정작 경찰은 거듭된 수사에서 연거푸 '혐의없음' 결정을 내린다. 문화도시 사업을 관의 통제 아래 놓고자 원주시가 '짜맞추기 감사'를 했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21년 전국 '최우수 도시'에 선정될 만큼 좋은 평가를 받던 원주 문화도시는, 파행을 겪으면서 2023년엔 낙제점인 '미흡' 평가를 받고 지정 취소 위기에 몰리고 만다.

극장 보존 운동 초창기부터 긴밀히 결합한 원주영상미디어센터는 작년 11월 수탁기관이 시장직 인수위 자문위원 출신 인사가 운영하는 업체로 바뀌었다. 해당 업체는 눈에 띄는 실적이 영화 제작 한 편뿐이라 전문성을 두고 논란이 일었고, 민간위탁 심사위원 중에 업체 대표와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활동한 인사가 있어 이해충돌 소지가 있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측근·보은 인사 논란에도 원주시는 '문제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원주영상미디어센터 주관 사업인 옥상영화제도 작년부터 존폐 위기에 빠졌다. '코로나가 끝났으니 야외영화제를 확대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원주시가 사업 공문을 승인하지 않아 이미 지원이 확정된 예산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당 영화제는 아카데미극장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한 바 있고, 사무국 구성원 상당수가 극장 보존 운동에 뜻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다이내믹댄싱카니발, 원주한지테마파크, 얼 광장 조성 사업 등 인수위 보고서가 문제 삼은 다른 문화예술 사업 역시 예산과 규모가 축소되거나 방향이 180도 바뀌는 곡절을 겪었다. 일부 사업은 무리하게 번복하는 바람에 담당 공무원이 강원도 감사위에서 훈계 처분을 받거나, 이미 지원받은 도비를 토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권력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생태계 고민

이렇듯, 원주에선 지역 문화예술계 전반을 향한 탄압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사실상 '전임 시정 지우기' 일환으로 멀쩡한 사업을 망가뜨리는 일이 연속해서 벌어진 것이다.

이는 결국 관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문화예술 사업은 언제든지 블랙리스트·화이트리스트에 휘둘리기 쉬운 구조적 한계를 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자체장의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기 어려울 만큼 지역 민주주의가 허약하고, 정책 결정 과정에 다양한 시민 목소리를 반영하는 공론장이 부재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문화예술 사업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지난 2년 동안 일련의 사태를 경험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지점이다.

단순히 특정 사업이 뒤집히고 말고의 문제를 넘어, 정권과 관계없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지역 문화예술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을 시작할 때다.

이런 문제의식을 토대로, 아카데미의 친구들은 작년 10월 30일 이후에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극장이 사라졌다고 끝이 아니라, 문화예술계를 향한 탄압이 지역 사회에 남긴 과제를 고민하면서 권력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우선,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잘못된 행정을 드러내고 기록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올해 5월 국민고발단을 모집해 원강수 시장과 관련 공무원들을 고발했고, 6월엔 정보공개청구로 새로 밝혀진 사실을 기자회견으로 알렸다. 철거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무너지지 않는다>를 제작해 전국에 원주 상황을 알리고 문제의식을 나누기도 했다.

지난 5월 16일 서울 경찰청 앞에서 열린 '아카데미극장 철거, 원주시의 위법 행정을 고발한다!' - 원주 아카데미극장 철거 국민고발단 기자회견 아카데미친구들

풀뿌리 민주주의를 다지고자 지역정치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시민의 목소리가 반영된 민주적인 정책 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시정·의정 모니터링, 예산안 감시, 공약 이행 점검 등을 꾸준히 이어갈 예정이다. 우리가 꿈꾸는 지역을 만들고자 다양한 의제를 논의하고 실험하는 공론장도 계획하고 있다. 동시에 동두천 성병관리소처럼 철거 위기에 놓인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연대에도 함께하고 있다.

원주 문화예술계는 전례 없는 탄압 속에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다. 수년간 쌓아 온 시민의 노력과 성취가 권력의 일방적 결정으로 한순간에 무너져 좌절도 크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지속가능한 문화예술 생태계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저항하고 실천하면서 '블랙리스트도 화이트리스트도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 시민이 주체가 되는, 진정한 문화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을 이제 조금씩 내딛는 중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전우재 아카데미의 친구들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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