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아카데미극장 철거 현장원주시가 독단적으로 원주아카데미극장을 철거한 장소.
정윤희
지방 권력이 바뀐 이후, 전임 시정에서 추진한 문화예술 사업이 충분한 검토와 토론 없이 중단되거나 훼손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강원도 원주는 그 전형적 사례다. 이곳 문화예술 활동가들에게 지난 2년은 지자체장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역 차원에서도 '블랙리스트'가 작동할 수 있음을 여실히 실감한 나날이었다.
정권 바뀌자마자 '전임 시정 지우기' 논란
지난 지방선거에서 12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한 원강수 원주시정은 출범할 때부터 문화예술계를 향한 칼바람을 예고했다. 시장직 인수위원회 보고서가 전임 시정 문화예술 사업 상당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재검토를 권고한 것이다. 하지만 전문성에 기반한 근거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주관적 판단에 치우친 서술이 주를 이뤘다. 보고서를 두고 "사실관계를 왜곡했다", "편향됐다", "전임 시정 색깔 지우기"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아카데미극장의 복원 사업은 원주 시민에게 공감대가 크게 형성되어 있지 않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시 재정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아카데미극장은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도 미비하며, 안전성 문제, 기대 이하의 활용도 등의 문제로 복원 필요성이 없어 보인다."
- 민선8기 원주시장직 인수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 중
원강수 시장은 인수위 의견을 "고스란히 판단 근거로 삼지 않았다"라고 밝혔으나, 결과적으로 인수위가 지적한 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용해 전임 시정 문화예술 사업 전반을 재검토했다. 그리고 실제로 '전임 시정 지우기'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대대적인 문화예술계 탄압이 펼쳐졌다. 그 대표 사례가 작년 원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슈가 된 아카데미극장 철거다.
아카데미극장 철거 강행한 원주시
1963년 원주 원도심에 문을 연 아카데미극장은 한국에서 원형을 간직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으로, 시민의 추억과 지역의 역사를 품은 기억유산으로 평가받았다.
2006년 폐관 후 방치됐으나 시민들이 벌인 적극적인 보존 운동의 결실로 2022년 1월 원주시가 극장을 매입하고 재생 사업을 추진한다. 극장을 안전하게 리모델링해 문화커뮤니티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청장상을 수상하고,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에 선정돼 국·도비 39억 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원주시 주민자치협의회와 전국 54개 영화문화단체가 지지할 만큼 공감대를 형성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원강수 시장은 '막대한 예산이 든다'는 이유로 순조롭던 재생 사업을 뒤집고 작년 4월 돌연 극장 철거를 발표한다. 그 자리엔 야외공연장과 주차장을 짓겠다고 했다. 이미 인근에 잘 활용되지 않는 야외공연장이 있고 대형주차타워 건립도 추진 중이었다는 점에서 의문부호가 달리는 결정이었다. 무엇보다 충분한 숙의를 거치겠다는 원 시장 말과 달리, 제대로 된 여론 수렴은 없었다.
원주시는 그 흔한 공청회 한 번 열지 않았다. 원강수 시장 스스로 약속한 여론조사도 말뿐이었다. 사실상 공무원만 있는 시정조정위원회를 통해 일방적으로 철거를 결정했다. 시민 수백 명이 조례에 따라 청구한 공개 토론은 법령 근거도 없는 서명부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며 반려했다.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하지 않다'는 국민권익위원회 권고마저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공무원과 시장 측근은 여론전에 앞장섰다. 주무부서 과장은 철거안을 강조한 자료를 극장 인근 상인들에게 배포했다. 철거 지지 성명과 집회를 주도한 인물 중엔 원강수 시장이 취임하고 6개월 동안 법인카드로 가장 많은 금액을 결제한 단골식당 주인이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시장 비서 측근 업체가 지시를 받고 조직적으로 철거 찬성 댓글을 쓰고 집회에 인력을 동원했다는 의혹이 전직 직원들의 폭로를 통해 제기되기도 했다.
행정 절차도 엉망이었다. 극장 용도를 보존에서 철거로 바꾸는 공유재산심의위원회 안건은 긴급하다는 이유로 서면 심의해 통과시켰다. 시의회에도 사전 공고 없이 철거안을 제출해 절차 위반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당초 6억 5000만 원이라던 철거 비용은 나중에 16억 5000만 원으로 대폭 늘어 철거 명분을 위해 의도적으로 낮게 책정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공사 도중 산업안전보건법, 석면안전관리법,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했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원주시가 졸속·불통으로 철거를 강행하려 하자, 극장을 지키려는 시민들은 '아카데미의 친구들(아친)'이란 이름으로 모였다. 극장 맞은편에 노란 텐트를 치고 시청 앞에 농성장을 꾸려 공개 토론으로 철거 여부를 결정하자고 거듭 요구했다. 영화계를 비롯한 전국 문화예술인·단체, 시민사회단체, 교수·연구진, 학술단체 등도 힘을 보탰다. 문화재청도 나서 원주시에 등록문화재 지정을 여러 차례 권고했다. 지역 안팎에서 보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음에도, 원주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리적 충돌까지 감수하며 공사를 밀어붙였다.
아카데미극장은 작년 10월 30일 결국 철거됐다. 원주시는 철거 반대에 나선 시민·영화인 20여 명을 업무방해 등 혐의로 고소·고발하며 탄압을 이어갔다.
줄줄이 이어진 문화예술 사업 '뒤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