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5월 10일 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김기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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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진은 아버지도 친일파였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기진 편은 "아버지 김홍규는 합병 후 충청북도 황간군수와 제천군수를 거쳐 1913년 5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영동군수를 지냈다"라고 알려준다. 이 사전의 김홍규 편은 김홍규가 1927년까지 군수로 부역하면서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해 일제의 토지 침탈에 기여하고 내지시찰단 일원으로 일본 여행을 다녀오고 훈6등 서보장을 훈장으로 받고 요시히토 및 히로히토 일왕(천황)의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컸는데도 김기진은 운동권 쪽으로 기울어갔다. 영동공립보통학교와 배재고등보통학교(중퇴)를 거쳐 1921년 릿쿄대학 영문학부 예과(고교급)에 들어간 그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진보적 정치운동에 매료됐다. <친일인명사전>은 "학교 공부보다 노동운동가였던 아소 히사시를 찾는 등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런 경향이 카프문학으로 이어지게 됐다.
배재고보를 마치지 않고 그만둔 그는 릿쿄대도 중도에 그만두고 20세 때인 1923년에 귀국했다. 그런 뒤 백조동인 등의 문학 활동을 하는 한편, 1924년 10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발행사인 매일신보사에 기자로 입사한다. 이 자체를 친일행위로 볼 수는 없지만, 반제국주의 성향을 보이던 진보적 지식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이때 그의 아버지가 충북 진천군수였으니 생계가 막막해 그랬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1927년에 군국주의 정권이 도쿄에 들어선 뒤인 1931년과 1934년, 조선총독부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들을 검거하는 제1차 및 제2차 카프 검거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김기진은 1931년에는 종로경찰서에서 10일간, 1934년에는 전주경찰부와 남원경찰서에서 70일간 조사받았다.
매일신보사에 입사하는 묘한 행적도 남겼지만 반제국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문학 활동을 하고 카프 사건으로 두 차례나 고초를 겪었던 그였다. 그런 그가 35세 때인 1938년부터 친일보수의 완장을 찼다. 이 해에 그는 지방 시찰을 나선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을 수행하면서 총독의 선정과 황민화 정책을 찬양하는 글들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판 뉴라이트가 됐던 것이다.
친일보수로 전향한 그는 문인답지 않게 '붓을 던지라' 같은 표현을 친일 작품 속에 많이 넣었다. 1943년 11월 6일 자 <매일신보> 1면에 실린 '가라! 군기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라는 시에서는 "대동아전쟁은 침략의 전쟁이 아니다"라고 한 뒤 "철필을 던지고 총검을 잡으라"고 학생들을 선동했다. 새해의 무운을 기원한다며 이듬해 1월 <춘추>에 쓴 '연두무운송(年頭武運頌)'에서는 "조선의 동생들도 철필을 내던지고 다수히 내달았사오니/ 오오 금년의 결전이야말로 적의 숨통을 끊을 것이로소이다"라고 읊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나오라'고도 외쳤다. 1943년 8월 1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에서는 "반도의 아우야, 아들아 나오라/ 님께서 부르신다"고 한 뒤 "죽음 속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문이 열리었구나"라고 선동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섬뜩할 만한 표현도 사용했다. 위의 '가라! 군기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에서는 "학창을 열고 너희를 부르니 즐거울지로다"라고 읊었다. 제국주의가 교실 창문을 열고 학생들에게 손짓하는 듯한 이미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 시기 학생들은 학병이나 지원병으로 끌려가지 않더라도 일제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일제는 군사교육을 시키고 금주·금연을 강요하는 등의 방법으로 학생들을 들들 볶았다.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에 충성하도록 만들고자 금주·금연을 유별나게 강조하는 일들이 있었다.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특임연구원의 <식민지 비망록 3>은 "조선인 학교에 대한 군사교련의 실시와 배속장교의 배치가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은 1934년 하반기"라고 한 뒤 "한창 조선인 학교에 대한 교련교육의 실시를 강화하던 바로 그 시기와 맞물려 '미성년자에 대한 금주금연'을 대단히 강조하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이를 법제화하여 제재를 가한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곧잘 신문지상에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그런 시기에 카프문학의 기수였던 사람이 "학창을 열고 너희를 부르니 즐거울지로다"라며 학업 전념이 아닌 전쟁 전념을 독려했다. 1950년에 서울시민들이 카프 출신의 친일 전향자란 이유로 사형을 선고한 것은 그의 그런 모습이 식민지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