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은 저항이다> 본문 초입에 나타나는 메시지. " 이 책은 누워서 읽기 바랍니다!"
갈라파고스
그는 가난 속에서 공부했고 투잡 쓰리잡을 불문하고 생존하고자 노동해왔다. 시를 썼고 신학을 전공했으며 결혼 뒤 아이를 출산했다. 그 와중에 생계를 잇기 위해 주 40시간 일하는 저임금 직장에 다니며 출근 아침마다 버스차창 너머 스쳐 지나가는 나무와 새를 바라보는 일에 안도를 느꼈다.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바람으로 살아가던 저자. 어느 날 그는 자신이 '피로의 유산'을 타고 태어났음을 가족으로부터 발견한다. 테러로 인해 난민이 되었던 할머니가 평화를 얻고자 눈을 감고 하루 30분~1시간가량 명상에 잠겼다는 이야기, 백인우월주의 극우 단체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권총을 앞치마에 숨긴 채 농장을 지켰던 증조할머니의 칠흑 같은 밤들의 역사를 알게 된다. 그리곤 삶을 전환한다.
저자의 할머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수천 명이 탈출한 1950년대에 미시시피주를 떠났다. 하루 종일 허리를 구부린 채 목화솜을 따는 흑인이 지천이었던 미시시피주는 흑인의 삶과 노예노동을 상징하는 대표 지역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옛 조상들이 견뎌온 불합리한 노동의 역사를 이 책에 복기한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 몸은 미국이 가진 최초의 자본이었고 그로 인해 휴식과 꿈의 공간을 끊임없이 탈취당했다."
나를 혹사하지 않아도 될 권리
시카고의 흑인 분리 지역에 살았던 저자의 부모는 1950년 민권 운동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다. 투표권을 획득하고 차별 철폐를 외쳤던 어른들을 보며 자라난 저자는 학창시절 성공하려면 "백인보다 열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라는 주문을 물처럼 마시며 자라났다.
한국 사회 특유의 강박과 닮은 모습이다. '흑수저'로 태어난 이상 기득권이라 불리는 '백수저'보다 열 배는 더 노력해야 성공한다는 신화는 클리셰 같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통용된다. <흑백요리사>를 비롯해 서바이벌 예능 프로에 숱하게 쓰인다.
좋은 대학과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 건실한 취미를 가지며, 일 분 일 초 시간이 아깝지 않게 살아야 헬조선에서 낙오되지 않는다는 불안의 심리는 차라리 한국 노동사회 전체가 습득한 무형의 계보에 가깝다. 과로하지 않으면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문화는, 성실한 사람으로 내가 오늘을 잘 버텨내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 저자는 반기를 든다.
"당신은 쉴 자격이 있다. (중략) 휴식은 내 몸이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사치, 특권, 보너스 따위가 아니다. 휴식을 특권으로 간주하는 신화를 무수히 접해온 나는 이 개념을 이해하면서도 강하게 반대한다. 휴식은 특권이 아니다. 현 체제가 어떻게 가르치든 간에 우리 몸은 여전히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휴식을 사치로 여길수록 과로문화의 체계적인 거짓말을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된다. 자본주의가 어떤 이론을 만들어 제시하든 우리 몸과 영은 자본주의의 것이 아니다."
- 트리샤 허시, <휴식은 저항이다> '들어가며' 중에서
'너는 하느님이 지명해 이 땅이 보낸 아이'라며 용기를 북돋아준 아버지에게서 저자는 어른 세대가 애써 숨겨 온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성실할 수밖에 없었던 어른들의 마음을 본다. 그의 아버지 내면에 "상상력과 창조성을 지닌 남자가 들었지만, 그 남자는 우리가 기계처럼 일하기를 바라는 과로 문화에 짓밟혀 있었"음을 아프게 고백한다.
저자는 "자신의 몸을 자동차와 전철에 가두고 자기 몸을 스스로 갉아먹지 않으면 적응할 수 없는 이 도시의 풍경(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 빗금을 낸다. 보통 사람들이 자기 의지대로 살아가려는 소망을 지금 실천해 보기를 촉구한다. 그 실천은 대단한 용기를 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만의 길을 내려고 하지만 도무지 길을 낼 수 없어 탈진한 사람들을 향해 '당신은 휴식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는지' 질문한다.
즉, 과로 문화에 세뇌당한 우리 신체가 어떠할 때 편한지, 편안한 상태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고 권한다. 나아가 편안할 때 나는 어떤 맛과 냄새를 느끼는지 상상해 보자고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