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3 17:56최종 업데이트 24.11.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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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8월에 동아시아를 들썩인 이벤트가 있다. 7월에 미국을 출발한 동양시찰단이 필리핀·중국·한국·일본을 순방하는 행사였다. 상·하원 의원 42명과 가족들로 구성된 시찰단에 대한 동아시아인들의 관심은 일본의 반응에서도 느껴진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그해 8월 8일 자에서 "미국 의원단 일행은 오난 19일 봉텬·경셩을 것쳐셔 하관(下關)에 도챡"한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만주 펑텐과 서울을 거쳐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미 의원들을 영접하기 위해 일본 국회의 귀족원·중의원 서기관들이 펑톈까지 마중을 나가고 귀·중 양원 의원들이 서울까지 나간다고 썼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막판인 1917년에 참전해 독일의 패전을 이끌어낸 미국은 1920년 1월에 창립된 국제연맹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연맹 창립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런 미국의 정치인들이 대규모로 순방하게 됐으니 동아시아가 들썩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20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그해 8월 25일 자 <동아일보>는 미국 의원단이 펑텐에서 "미국은 극동에 대하여 일점의 영토적 야심을 포(抱)치 아니하고 오즉 정의와 인도를 위하여 아세아의 인문진보 외(外) 상공업·교육·위생 기타 정치·경제에 긍(亘)하야 그 촉진·발전에 대한 원조를 불석(不惜)하노니"라고 발언한 사실을 보도했다.

박정희 형인 박상희를 포함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이듬해부터 대구 10월항쟁 등의 방법으로 미군정과 싸웠다. 1945년 9월에 미국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모습을 목격한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1920년 당시만 해도 한국인들은 미국을 한없이 동경했다. 미국은 극동을 침략할 생각이 없고 이 지역 정치·경제와 관련된 원조를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의원단 대표의 발언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위 기사의 작성자는 "동양을 방문하여 오인(吾人)에게 친히 그 고상하고 순결한 이상을 전함은 실로 유쾌한 바라"라며 미국을 칭송했다.

그해에 미국 의원들의 방한을 활용해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퍼트리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김상옥 열사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한 김동순이다.

김상옥은 1923년 1월 12일 일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열흘 뒤 지금의 서울 종로5가역 부근에서 일본 군경 1000명 이상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스스로 순국했다. 그 김상옥이 3년 전인 서른한 살 때도 대규모 거사를 준비했고, 이때 독립운동가 김동순이 그의 곁에 있었다.

보훈부 독립 유공자 명단에 없는 김동순

국가보훈부가 인정하는 독립 유공자 중에 김동순이 세 분 있다. 1892년에 태어났고 경기도 개성이 본적인 김동순(金東純)은 1920년 당시 멕시코에 있었고, 1894년에 태어났고 본적인 함북 청진인 김동순(金東純)은 1920년에 북로군정서 총재 비서 강철구와 협력해 군자금 모집을 하다가 10월에 체포됐다. 1918년에 태어난 김동순(金東舜)은 1920년에는 독립운동을 할 나이가 아니었다.

이 글의 주인공인 김동순(金東淳)은 1899년에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다. 이 김동순은 보훈부 독립 유공자 명단에 없다.

보훈부의 전신인 원호처 산하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4권: 의열투쟁사자료집>은 "김동순은 1918년 12월 중 범죄 후 만주 길림으로 도피하여 이듬해 2월 개성지방법원지청에서 기소중지처분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개성에서 살다가 19세 때 만주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 직후 그는 김좌진의 길림군정부(조선독립군정사)와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에 들어갔다. 그런 다음, 군정서 재무원 및 외교과장 자격으로 서울(경성)에 잠입했다. 자료집은 이때가 "음력 3월 10일경"이라고 알려준다. 고종의 아들인 23세의 영친왕이 일본 왕족 이방자와 강제 결혼을 한 양력 4월 28일쯤의 일이다.

서울에 숨어든 김동순은 독립운동가 윤익중(1896~1963)의 소개로 김상옥을 소개받는다. 뒤이어 이들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79권에 실린 김영범 대구대 교수의 논문은 "음력 5월경에 김상옥·김동순·윤익중 3인이 실천 행동을 위한 조직으로 암살단을 발족시켰다"고 말한다.

제목이 '1920년 서울, 암살단의 결성과 의열투쟁 기획'인 위 논문은 윤익중이 외교부장, 김화룡이 교통계, 신화수가 서기, 이돈구가 수금계를 맡고 김동순은 단장, 김상옥은 탐정부장 겸 배달부장 책임을 맡았다고 알려준다.

암살단은 독립전쟁과 친일파 처단 등을 위해 대일전단 등을 준비하는 한편, 북한산 깊숙한 데서 사격 훈련을 실시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는 "사격의 명수인 장일진"이 교관이었다고 알려준다.

3년 뒤 김상옥이 일본 군경과 1대 1000의 총격전을 벌인 비결 중 하나는 여기에 있었다. 위 책은 "김 의사가 후일 삼판통 전투와 효제동 전투에서 거의 백발백중의 사격 전과(戰果)를 거둘 수 있는 것도 이때의 조련이 크게 유효하였던 것이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김상옥의 아버지가 포수였다는 점도 함께 알려준다.

민중의 열망을 구체화시키고자 했지만 거사 직전 실패

암살단은 자금 모집도 대담하게 진행했다. 거물급 친일파의 집도 과감히 방문했다. 위 김영범 논문은 "김상옥이 박영효를 찾아가 요청하니 서슴없이 3천 원을 내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경기도 연천군수로 부역한 친일파 김연상이 받은 최고 연봉은 2000원이다. 이완용과 더불어 친일의 양대 산맥을 이룬 철종 사위 박영효가 즉석에서 꽤 많은 돈을 기부했던 것이다.

암살단장 김동순은 미국 의원단의 한국 방문에 맞춰 거사를 계획했다. 위 <독립운동사> 제7권은 "모든 준비를 진행하면서 대거 행동할 적당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그해 8월 24일 미국 의원단 40명(42명의 오기)이 내한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고 말한다. 암살단의 작전계획을 이 책은 이렇게 소개한다.

"미국 의원단이 남대문역(서울역)에서 하차하여 구외로 나오는 것을 맞이하는 환영 인파 중에 대원들이 섞여 있다가 행동을 개시, 전단 살포와 만세 시위를 일으키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각 관공서를 습격하며 종로에서는 집총대를 배치하였다가 제지하려 드는 일본 군경과 총격전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이 열렬히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는 실정을 미국 의원단에게 직접 보여주어 한국 문제를 국제 여론에 크게 부각시키자는 것이 계획의 목표였다."

자금과 무기도 확보하고 사격 훈련까지 받은 조직이 서울 시가전 계획을 세웠으므로, 이들의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면 핵폭탄급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 직전에 발각됐다. 미국 의원단 순방을 계기로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는 것에 주목한 일제 당국이 서울 시내에서 약 1천 명을 상대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벌인 결과였다. 일제 경찰은 거사 당일인 8월 24일에 무기 은닉처를 찾아냈다.

김동순은 9월 8일 저녁 서울 종묘에서 체포됐고, 체포를 모면한 김상옥은 다음 달 상하이로 망명했다. 재판에 넘겨진 암살단원 중에서 김동순은 징역 10년, 한우석은 8년, 박문용은 7년, 이돈구는 6년을 받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3년에서 6월을 받았다. 윤익중은 2년을 받았다.

1920년 8월 25일 자 <조선일보>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들의 거사 계획은 실패했지만, 또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의원단의 도착에 맞춰 항일시위를 벌이는 데 성공했다. 그해 8월 25일 자 <조선일보>는 "작일 오후 9시 10분 황금졍 사거리로부터 종로에 이르기까지 만여 명의 군중이 위집하야 또 만세를 고창하얏더라"라고 보도했다. 기사 원문의 '만(萬)'은 다소 희미하게 표기돼 있지만, 글자 형태는 만(萬)에 가깝다. 백(百)이나 천(千)은 분명히 아니고, 군중이라고 했으므로 십(十)도 명확히 아니다.

3·1운동 이듬해라 일제의 감시가 심할 때였다. 그런데도 을지로 사거리와 종로 사이를 1만 이상의 군중이 채웠다. 대한독립에 대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고 싶어 하는 것이 독립운동가들만의 열망이 아니라 한국 민중의 보편적 열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순과 김상옥은 그런 열망을 구체화시키고자 했지만 거사 직전에 실패했다.

미국은 실제로는 신뢰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지만 이 시기 한국인들은 미국의 도움이라도 받아서 독립을 성취하고 싶어 했다. 3·1운동 때 일제 헌병의 총칼에 짓눌렸던 한국인들이 불과 1년 반 뒤에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것은 식민지배하에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던 한국인들의 답답한 심정을 보여준다. 김동순은 그런 열망에 부응하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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