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패션 위크가 시작되는 시점에 열린 패스트 패션 반대 시위 모습. 시위에 사용된 의류 폐기물 산은 가나에서 가장 큰 중고 의류 시장인 칸타만토 시장에서 가져온 것으로 구성었다.
Paul Lovis Wagner/GP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의 사정도 비슷하다. 블랙 프라이데이에 쏟아지는 마케팅에도 끝까지 팔리지 않은 옷들은 재고가 된다. 산더미처럼 쌓인 재고는 비밀스러운 과정을 통해 버려진다. 제품의 희소성을 지키거나, 세금 감면을 받기 위해서는 재고를 폐기하는 것이 기부나 재활용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BBC에서는 2017년, 버버리가 422억 원가량의 자사 명품을 불태워 없앴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의류업의 재고율은 29.7%에 달한다. 10벌 옷을 만들면 3벌은 재고가 된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폐기되는 옷의 양이 얼마인지 통계조차 없는 나라이지만, 30%에 가까운 재고율은 필요한 것보다 많은 옷이 생산되고 버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우리가 블랙프라이데이에 마주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이런 식이다. 우리는 수많은 옷을 만드는 세상에서 광고에 이끌려 옷을 사고, 광고는 다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산 옷은 보기 좋게 유행에 뒤처진 구린 것이 된다. 누군가는 선의로 그 옷을 헌 옷 수거함에 넣지만, 정작 환경 오염과 지역 주민의 고난을 선물하는 일로 이어진다. 이 시스템에서 선한 마음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이건 참 멋지지 않은 일이다.
어느새 패션은 안 멋져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패션을 열광한다. 패션은 보온이나 편의라는 옷의 기능적 면모를 넘어 나 자신을 보여주는 방법이 되었다. 멋진 옷을 입고 싶고, 옷에 자신의 가치관과 추구하는 삶을 반영하고 싶은 마음은 아주 특별한 욕구가 아니다. 패션을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죄가 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과연 옷을 통해 '자유롭게' 나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지 다시 고민해 볼 때이다.
수많은 콘텐츠들에서 사회생활의 예의가 화장을 하고, 어느 정도 값이 나가는 옷을 입는 것이라 주장한다. 체형을 부위 단위로 쪼개 어떤 옷을 피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정보성 콘텐츠도 늘었다. 조금 특이하지만 그다지 문제가 없는 옷을 입은 사람도 과도하게 많은 시선을 받게 되었다.
옷은 사람 대신 글을 쓰지도, 회의를 진행해 주지도, 전화를 대신 받아주지도 않지만, 외모와 옷은 때로 실력보다 더 많이 한 사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온 세상이 온 힘을 다해 옷이 나 대신 일해주고, 사랑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적당히 깔끔한 옷을 입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졌다.
어느새 패션은 멋지지 않아졌다. 그건 패션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패션 광고와 콘텐츠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 나를 맞추어 나가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옷을 사서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옷을 사는 행위 자체가 개성인 것처럼 포장될 때,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개성은 카드를 긁는 행위에서 멈춘다. 옷은 물건일 뿐, 나 자신이 될 수는 없다.
▲그린피스 서울사무소와 다시입다연구소, 빅웨이브 등의 단체가 함께 준비한 행사에서 중고 의류 교환을 체험하고 있는 참가자
Greenpeace
우리는 패션을 포기하기보다는 더 멋진 패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보아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는 패션 자체가 좀 더 가벼워지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관용과 인정은 필수이다. 옷을 개성과 가치관을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 정도로만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운동이 필요하다. 그건 좀 더 가볍게 심호흡하고 유행을 따라가는 일을 멈추는 것일 수 있다.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내 인생 자체가 구린 것으로 바뀌진 않을 것이다. 옷이 내가 아니고, 내가 나라면 유행에 뒤처지는 것은 또 다른 나만의 취향을 찾아가는 길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그게 지금도 옷이 쌓여 고통받고 있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과 동물들, 환경을 위한 길이 될지도 모른다.
한숨 돌렸으면, 이제 좀 더 가벼워진 패션에 개성과 가치관을 담아볼 때이다. 지역의 주민들과 웃으며 중고 의류를 나누어 보고, 나만의 기발한 수리법으로 옷을 리폼해 보고, 대안적인 소비를 해볼 수도 있다. 당신은 원래 선량한 사람이다. 모두를 망치는 패션 대신 모두를 위한 패션을 만드는 일에도 앞장설 수 있다. 패션은 원래 룰이 없다. 그럼 이제 더 나은 패션을 위한 준비운동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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