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5월 13일 이승만 대통령이 레이시 주한 미국대사의 신임장제정식을 마치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국정책방송원
레이시는 1953년 필리핀 대선을 앞둔 1952년부터 필리핀 대리대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미국이 필리핀에 대해 희망한 것은, 1946년 자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사실상 신식민지 상태에 놓인 이 나라를 보다 안정적으로 관리할 대리인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는 자국의 제국주의적 간섭에 저항하는 인민해방군(항일세력 출신)의 저항을 손쉽게 분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 의도로 미국은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보다 온건한 이미지를 풍기는 친미파 라몬 막사이사이를 급부상시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1989년 4월 <경제와 사회>에 실린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논문 '필리핀과 미국: 온정적 제국주의와 자선적 동화정책의 실상'은 "(미국은) 만약 막사이사이가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쿠데타를 감행할 목적으로 마닐라 앞바다에 미 구축함을 대기시키고 비상상태에 들어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미국이 필리핀 대리인을 교체하고자 노골적인 공작을 펴던 기간에 현지에서 활약한 인물이 레이시다. 3선 개헌으로 또다시 대형사고를 친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하필이면 레이시가 후임 대사로 거론되는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다. 2007년에 <정신문화연구> 제30권 제2호에 실린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논문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관계에 관한 연구'는 "레이시가 3대 대사로 부임하자 '미국이 이 박사를 물러나게 하기 위해 한국에 파견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온 레이시는 필리핀에서처럼 활약을 하지 못했다. 한국에 들어온 첫날부터 그는 자신을 밀어내는 거대한 힘을 맞닥트려야 했다. 1978년 6월 14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가 입국하던 날 한국 외무부의 박동진 의전국장은 레이시 일행이 한강 인도교를 건널 때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공항이 아닌 한강 다리 위에서 한국 외교부 당국자가 미국 대사를 영접했던 것이다. 시간이 어긋나 생긴 일이라는 해명이 있었지만, 외교적 불상사인 것은 분명했다.
레이시의 고초는 계속됐다. 한국 관료들은 그를 기피했다. 그래서 정치담당참사관이 그의 역할을 대신했다. 어느 정치인은 그에게 너무 노골적인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귀하는 이 박사를 물러나게 하기 위해 한국에 부임했다는데 사실이냐"라는 질문까지 있었다고 위 기사는 말한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은 레이시를 정신없이 만들 대형 폭탄을 준비했다. 레이시 부임 2개월 뒤에 그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기업들에 세금 폭탄을 때렸다. 레이시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데 여념이 없도록 만든 것이다. 위 이완범 논문은 이것이 레이시 부임에 대한 그의 항의였다고 설명한다. 결국 레이시는 그해 10월 '위장병 신음'을 이유로 대사직을 사임했다.
이승만은 자신을 제거할 계획을 갖고 왔을지도 모르는 레이시를 압박해 부임 5개월 만에 내쫓았다. 이는 외형상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승리로 비칠 수도 있지만, 실상은 미국에 대한 그의 의존도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승만이 국내 기반이 든든해 믿는 구석이 있었다면 미국이 의심을 받을 만한 대사를 보내기도 힘들었겠지만, 이승만 자신도 그렇게까지 반응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위장 약한 레이시의 신경과민을 자극한 이승만의 행동은 그가 민심보다 동맹에 더 의존했음을 유별나게 증명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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