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의 건설 과정
pixabay
1887년 2월 14일, 공사가 시작되자 마자, 일군의 예술가, 작가들(모파상, 알렉상드르 뒤마 아들, 샤를르 갸르니에 등)이 서명한 항의 문서가 신문에 실린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은 건설 기간 내내 이 낯선 건축물에 대한 거부감을 거칠게 드러냈다.
"우리 작가, 화가, 조각가, 건축가, 그리고 때묻지 않은 파리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애호가들은 (...) 위협 받고 있는 프랑스 예술과 역사의 이름으로, 우리 수도 한복판에 아무 쓸모도 없고 괴물 같은 모습의 에펠탑을 세우는 것에 대해 (...) 온 힘을 다해 분노하며 항의하고자 한다 " (1887년 2월 14일, 당시 일간지 Le Temps에 실린 항의서)
이에 대해 에펠은 이같이 답했다.
"나는 이 탑이 고유한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이 탑이 정밀한 계산에 따라 그려낼 네 개의 곡선이 (...) 힘과 아름다움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제공할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엔 일반적인 예술 이론이 거의 적용되지 않은 그만의 거대한 매력과 고유의 마력이 있을 것입니다"
에펠이 가진 자신감은 자신을 비롯한 수십 명의 엔지니어들이 수천 장의 도면에 그려낸 수학과 과학, 기술의 총아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었다. 숙련된 과학 기술이 빚어낸 결과물은 강하고 견고하며, 그것이 아름다움이란 보편적 가치를 결코 비켜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에펠탑에 새겨둔 과학자, 수학자들의 이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당대의 모든 사람들이 에펠이나 그의 프로젝트를 선택한 심사위원들의 의견에 공감하진 않았다. 수차례에 걸친 교각 설계로 완벽하게 마스터한 교각 건축의 원리를 300미터 높이의 수직적 건축물로 대담하게 확장하는 것이 에펠의 구상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누구도 본 적 없는, 따라서 상상할 수도 없는 규모이자 형태의 건축물이기도 했다.
이 구조물이 과연 안전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당연한 의문을 비롯, 그것이 과연 19세기 파리의 도시 미관을 해치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지, 그 어떤 실용적 쓸모도 없어 보이는 이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굳이 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각도의 의문과 비판은 공사를 마치는 날까지 제기되었다. 특히 작가들을 비롯한 당대의 지성인들은 "앙상한 탑의 뼈다귀" "크고 깡마른 철제 사다리 피라미드" "거대하고 흉측한 골격" 등 모욕적인 비난을 그치지 않았다.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780만 프랑(약 3500만 유로, 한화 약 520억 원)이 소요되는 이 건축물에 정부는 1/5에도 미치지 못하는 150만 프랑만을 지불할 수 있었다. 에펠은 건축에 소요되는 나머지 경비를 투자처를 찾아 스스로 조달하는 대신, 완공 이후, 20년간 에펠탑 관람 운영권을 갖는 조건 속에서 탑의 공사를 맡아야 했다. 악화되는 여론 속에서 한때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1층 공사 이후 공사를 이어갈 수 있을지 막연해지는 시기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탑이 완공되고, 그 거대한 위용이 모습을 드러내자, 압도적 존재감 앞에서, 이 모든 비난은 순식간에 꼬리를 감췄다. 1889년 만국박람회 기간 동안에만 200만 명이 에펠탑을 관람하는 등 에펠탑은 이후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에펠은 투자된 비용을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20년이 지난 후, 에펠탑에 대한 소유권은 파리시에 넘어갔지만 탑은 처음 그대로 에펠탑으로 불리게 된다. 그 누구도 탑이 완성되기까지 에펠이 감당했던 역할의 지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사망자 제로의 전설

▲귀스타브 에펠이 그린 에펠탑의 철골 구조물들. " La Tour de 300 metres", Ed. Lemercier, Paris 1900.
에펠탑 홈페이지
탑이 건설되는 데 7300톤에 이르는 1만 8038개의 철근 조각이 소요되었고, 5300개의 설계도가 그려졌으며, 여기에 참여한 엔지니어의 숫자만도 50명에 이르렀다. 약 300명의 노동자들이 에펠탑과 탑 위로 오르게 해주는 5개의 리프트를 만드는 데 함께 했다.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차질 없이 탑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한 치수로 그려진 18000개의 철제 부품이 사전 제작되어, 현장에선 4인 1조를 이룬 노동자들이 이것을 조립만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에펠탑은 공사 중 단 한 건의 인명 사고도 발생하지 않은 모범적 공사였다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아내에게 에펠탑을 자랑하고 싶었던 한 이탈리아 인부가 작업 시간 외에 아내를 데리고 와서 보여주다 발을 헛디뎌 사망한 사고가 유일한 인명 사고로 기록됐다.
각별히 안전망을 설치한 것도, 보험에 가입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밀하게 설계된 철근 조각들을 사전 제작하여 조립에 임했던 것처럼, 작업의 진행 과정에서도 안전과 효율을 고려해 철저히 계산된 동선과 과정을 통해 진행되도록 세심하게 계획했던 것이 무사고의 전설을 쓸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
에펠탑이 오늘까지 생존해온 비결

▲지난 7월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레이저가 하늘을 밝히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AFP/연합뉴스
처음엔 20년 뒤에 없애는 걸로 계획되었으나, 자신의 작품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에펠은 여러 과학적 실험들이 에펠탑에서 행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고, 1904년 군이 송신탑을 설치하여 실용적 용도를 입증하는 것으로, 에펠탑은 이후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서, 에펠탑은 독일군을 도청할 수 있는 송신탑이자, 군사 관측소로 이용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혁혁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2차 대전 때에도 에펠탑은 자신의 몫을 다했다. 파리를 순식간에 점령한 나치 점령군은 탑에 커다란 나치 깃발을 매달았으나, 2시간 만에 깃발은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승강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승강기를 타고 가장 높은 곳에서 파리를 내려다 보려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히틀러는 에펠탑을 포함, 파리의 주요 역사적 기념물들을 모두 폭격하라고 명했으나, 당시 파리지역을 다스리던 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이 그의 명령에 불복종하면서 에펠탑은 다시 한 번 위기를 모면한다. 그는 당시 이미 독일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포로가 될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며 히틀러의 명을 불이행했던 것이다.
7월 14일은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던 프랑스의 혁명기념일이고, 가장 큰 국경일인 그날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꽃놀이를 하며 모두가 축제를 벌인다. 그리고 모두가 다음날부터 약속이나 한듯 바캉스에 들어간다. 파리에서는 당연히 에펠탑이 그 축제가 벌어지는 장소다.
사람들에게 에펠탑은 지워지지 않는 혁명의 이정표다. 그저 더 높은 곳을 향해 쌓아 올리는 마천루 경쟁 속 하나가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무모히 나아갔던 시간들을 상기해 주는 상징물이다.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가 열리는 날, 운동장이 아닌 에펠탑 앞에서 축제를 펼쳤던 이유도 그들의 정체성이 가장 농축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학혁명을, 3.1운동을, 그리고 광주항쟁을 무엇으로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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