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과 복싱을 병행하는 법을 터득해 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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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실직고할 게 있다. 복싱이 '건강에 최고'는 아니다. 복싱을 시작하고 관절 부상이 생겼다. 큰 고통이 느껴질 정도는 아니지만 무리라도 하는 날이면 팔목이랑 팔꿈치에 숨어있던 염증이 올라온다.
필자는 스파링을 정말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전력을 다하는 풀스파링을 종종 하기도 하는데 가끔은 다음날까지 두통이 있곤 한다. 가벼운 뇌진탕 증세일 수도 있지만, 승모근이나 목 근육이 뭉쳐서 생기는 통증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냉찜질과 마사지를 해준다.
그럴 때면 수많은 자아 중 하나가 '몸까지 망가뜨리며, 무슨 복싱에 집착하냐고, 미친 거 아니냐'라고 묻는다. 하지만 곧장 글러브 낀 또 다른 자아가 튀어나와 KO 주먹을 날린다. 당연히 복싱으로 훈련된 자아가 훨씬 강하지 않겠는가. 결국엔 '복서 자아'만 생각의 링에 남는다. 그래도 요즘은 건강을 고려해서 스파링 횟수나 강도를 조절하며 안전하게 복싱을 즐기려고 한다.
그럼에도 관절염과 두통이 생길 때면 '어떻게 복싱과 채식을 같이 하냐'는 질문은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무리하게 운동해서 생긴 증세임에도 내심 채식 때문이 아닐지 의심했다. 채식과 복싱을 병행하는 것이 건강에 해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나 보다.
"어떻게 하면 채식하면서 복싱까지 할 수 있을까?"
걱정 어린 질문이 수시로 주치의가 되어준다. 건강을 유지하며 채식과 복싱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자연스레 조금 더 식단에 신경을 쓰게 된다. 최대한 백미를 섭취하는 횟수를 줄이고 현미와 잡곡 식사 횟수를 늘린다. 한 가지 반찬만 준비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채소를 활용한다. 정제 밀가루는 되도록 지양한다.
복싱을 수련한 이후로는 단백질을 좀 더 챙겨 먹는다. 근육이 회복하는 데 단백질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즐겨 먹지 않았던 대체육을 비롯해 두부와 두유를 챙겨 먹고 잡곡에는 콩류를 반드시 넣는다.
채식과 복싱을 꾸준히 하면 몸은 어떻게 변할까
6년 만에 종합건강검진을 실시했다. 채식과 복싱이 만나면 어떤 몸이 될까. 대장 내시경과 위 내시경이 포함된 검진이어서 전날부터 화장실 전쟁을 치렀다. 실험을 위해 시작한 채식과 복싱은 아니지만, 건강 검진 결과가 궁금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건강 검진 결과가 나왔다.
채식과 복싱의 성적표를 받듯 긴장되는 마음으로 펼쳐봤다. 전체적으로 수치는 표준이었고 건강했다. 철분, 전해질(나트륨, 칼륨, 염소, 칼슘, 무기인) 등이 모두 정상 수치였다. 영양제를 먹지 않으면 철분을 비롯한 영양소 섭취가 어렵다는 '채식 괴담'의 공포도 이제는 사라졌다.
다만 당화혈색소가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평균보다 좀 높은 수준이었다. 평소 당이 든 두유와 이온음료를 자주 마셨기 때문인 것 같다. 음료수를 포기할 순 없고 '제로족'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가장 놀랐던 점은 키가 컸다. 삼십 대 중반에 키가 크다니. 10년 넘게 175cm였던 키가 176cm가 되었다. 두 달 전에 보건소에서 키를 재고 176cm이 나왔길래 잘못 측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키가 컸나보다. 줄넘기 때문에 닫힌 성장판이 열렸을 리는 없고, 아마도 복싱하기 전후로 꾸준히 해온 스트레칭 덕분 아닐까.

▲건강검진 인바디 측정 결과
이현우
근육량과 체지방량은 어떨까. 체지방량은 12.9%, 골격근량은 33.1kg으로 나왔다. 표준 이상이다. 육식인의 단백질 타령이 귀에서 맴도는데, 육식인들 앞에서 채식인의 육체미 소동이라도 벌여야 하나. 스스로도 단백질이 부족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지난날들이 있는데 이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생활복싱대회도 간간히 나갔고 출석하는 체육관에서도 주 1회 이상 스파링을 한다. 그런데 근력이나 체력으로 밀렸던 적은 많지 않다.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함께 운동하는 이들이 내 실력에는 갸우뚱할지라도 체력과 근력에는 놀라는 눈치다. 직업이 운동선수는 아니지만 복서의 심장을 지녔다고 믿는 필자는 이러한 반응이 내심 뿌듯했다.
필자의 사례가 이례적이진 않다. 잘 짜인 채식 위주의 식단이 운동 수행에 효과가 있다는 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고, 책 <채식하는 운동선수>에 세계적인 운동선수와 채식 이야기가 잘 정리되어 있다. 복서 중에는 대표적으로 세계 챔피언이었던 데이비드 헤이 선수가 있고, 누구나 아는 마이크 타이슨도 은퇴 후에 채식을 하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에는 한국 KBM 슈퍼웰터급 챔피언이었던 김용욱 선수도 비건 식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새로운 운동 슬로건, '건강 제일'에서 '재미 제일'
건강을 위해 복싱을 시작한 건 아니다. 복싱 운동 특성상 관절염과 두통을 얻었고, 지방은 적은 근육질 몸을 얻게 되었다. 오히려 복싱을 더 잘하고 싶어서 먹는 것도 신경 쓰게 되고 수면 습관도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숙면이 보약이라는 걸 복싱을 시작하고 절실히 깨닫고 있다. 복싱을 통해 내 몸을 돌아보게 된다.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강해지고 있는지. 어쩌다 보니 건강에도 신경 쓰고 있다.
사실 건강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운동만 찾는다면 몇 개 남지 않을 것이다. 재밌는 운동은 관절이나 근육에 평소보다 빈도는 많이, 부하는 더 크게 주기 마련이다. 약간은 위험하니까 재밌는 거다.
한 해가 50일도 남지 않았다. 연초에 가장 많이 세우는 목표 중 하나가 운동하기 아닐까. 운동 슬로건을 '건강제일'에서 '재미 제일'로 바꿔보면 어떨까. 건강해야만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재미를 추구하다 보면 어느새 운동에 미쳐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운동의 참맛을 느끼면 헤어 나올 수 없다. 한평생 목표인 다이어트라는 목표를 덤으로 달성할지도 모른다. 아직 복싱만큼 재밌는 운동을 찾지 못했지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자신이 찾은 보물 운동을 여기저기 소개해 주면 좋겠다. 건강을 위한 운동이나 살 뺀 운동 이야기 말고 재미있는 운동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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