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투표를 마치고 투표완료 스티커를 가슴에 붙인 필자(좌). 경제와 전쟁에 대한 불만으로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알바니아계 택시기사(우).
전후석
11월 4일
전날 열린 <초선> 상영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LA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미시간공항으로 가기 위해 우버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알바니아 출신이었다. 그는 5년 전 알바니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올해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내일 처음으로 투표한다고 했다. 그의 선택은 당연히 트럼프였다.
이유를 묻자 그는 경제와 전쟁에 대한 불만을 들었다. "물가가 너무 비싸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내 고향 알바니아와 코소보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와 다시 긴장이 고조되고 있어요. 또 다른 전쟁이 날까 봐 두렵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는 미시간의 모든 알바니아 친구들 역시 트럼프에게 투표할 거라고 덧붙였다. 의회 점거 사건과 반민주적 권력화에 대해 묻자 그는 의회 점거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스라엘-가자지구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미국 내 다양한 소수민족들에게 최우선 이슈로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평화를 약속하는 정치인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오바마 역시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며 민주당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라 대통령에 당선된 기억이 있다. 트럼프가 '평화 대통령'이라는 모순적 타이틀을 스스로 내세우게 만든 민주당의 책임도 크다.
11월 5일
드디어 투표일이다. 필자가 LA에 온 이유는 영화 <초선>에 등장한 데이비드 김 후보(민주당)가 이번에 세 번째로 연방 하원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승리한다면 그 환희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이미 뉴욕에서 투표를 마쳤기에 미국 전역에서 투표가 한창 진행될 때 지인과 점심 약속을 잡았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이번에는 아르메니아 출신 기사였다. 그 역시 경제난과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트럼프의 당선을 바란다고 했다. "이민자 추방이나 소수자 탄압에 대해 우려가 되지 않냐"는 질문에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먼저 온 이민자가 후발 이민자들을 배척하는 태도를 보이는 현상이 현 시대의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는 택시기사뿐 아니라 호텔 직원, LA 한인타운의 어르신들까지 여러 곳에서 이어졌다. 많은 이들이 경제 회복을 위해 트럼프의 재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후 8시 투표 종료 전 데이비드 김의 마지막 유세 현장을 촬영하고 나서 선거 마무리 파티가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지난 1년간 그의 선거를 위해 헌신한 1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 자리였다.
첫 번째 개표 소식에 모두 이목을 집중했다. 데이비드 김 후보는 개표율 30% 상태에서 약 1만 표 차이로 뒤처지고 있었다. 그의 승리를 기대하며 지지자들과 함께 환희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을 느꼈다. 상대 현역 의원은 기업들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정치 자금을 받는 4선 의원이었고, 데이비드는 풀뿌리 선거로 도전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필자와 카메라팀은 수시로 핸드폰을 통해 미국 대선 결과도 체크했다. 지인들에게서 오는 문자는 트럼프의 선전에 비관적인 반응 일색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펜실베이니아 등 경합주들에서 트럼프의 승리가 점쳐졌고, 심지어 전국 득표수에서도 그가 앞서고 있었다.
밤 11시가 지나면서 지지자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추가 개표가 발표될 때마다 안타깝게도 데이비드는 조금씩 더 뒤처지게 되었다. 동시에 트럼프와 해리스의 격차도 점점 벌어지며 민주당 지지자들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자정이 넘어가면서 트럼프의 압도적인 승리가 확정되었다.
11월 6일
전날 밤의 실망감이 무색하게 남가주의 날씨는 밝고 쾌청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주위 모든 이들의 삶은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트럼프 시대가 다시 온다고? 우리는 이미 4년간 트럼프 행정부 1기의 혼란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의 과격한 발언과 이민자·소수자에 대한 악마화, 언론 탄압, 팬데믹 대처 실패, 두 차례의 탄핵, 기후변화 부정, 백악관 주요 직책에 친인척 임명, 그리고 2020년 대선 불복과 의회 점거 선동까지 트럼프의 첫 임기는 논란으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든-해리스가 트럼프에게 다시 패배했다.
해리스가 실패한 이유, 그리고

▲11월 6일(현지시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워싱턴 하워드대학교 캠퍼스에서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바이든 정부 기간에 인플레이션, 국경 관리 실패, 그리고 두 차례의 전쟁을 둘러싼 불안정한 외교 정책은 유권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지나치게 강조된 정치적 올바름(PC), 여성의 낙태권, 성소수자 권리 보호는 보수층에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는 분석도 있다.
특히 바이든의 재선에 대한 집착은 민주당 내 경선 기회를 차단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기회를 놓쳤다. 스스로 "전환적 대통령"이 되겠다는 약속을 무색하게 만든 것은 물론, 그는 해리스를 후계자로 지지하며 정부 연장에 힘을 실었다.
해리스 또한 근래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존재감이 희미했던 부통령 중 한 명이었다. 바이든 정부와 차별화를 보일 역량이 부족했으며, 전당대회에서 잠시 지지율이 상승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연임에 성공한 오바마나 선거인단에서 졌지만 국민 득표수에서는 승리했던 힐러리 클린턴의 대중적 인기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해리스가 지닌 한계는 그녀의 개인적 문제만이 아니다. 2020년 바이든은 부통령을 선택할 때 자신의 나이를 고려해 성장 가능성을 보고 후계자를 임명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정체성 정치에 기반해 해리스가 지닌 상징적 대변성에 중점을 두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역사상 첫 흑인 여성 부통령이 되었으나 차기 대통령직에는 역부족임이 드러났다.
민주당의 여러 실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들은 민주주의 제도를 훼손하지 않았다. 기후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멈추지 않았고, 소수자를 위해 우호적인 정책과 서사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IRA(인플레이션감축법)와 칩스법(Chips Act) 같은 경제 회복 정책을 통해 미국의 인프라 복구, 의료비용 절감, 기술 인력 양성 등으로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 국민들은 여전히 높은 인플레이션과 경기 둔화에 대한 불안 속에서 민주주의 제도 수호보다 '미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우선시하는 선택을 했다. 이들은 또한 이스라엘-가자지구 및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신속한 종식, 서류 미비자 추방과 기업 규제 완화, 고소득층의 감세 등을 약속한, 아마도 미국 역사상 가장 괴팍하고 논란적 인물일 트럼프를 지지했다.
앞으로 4년 동안 미국 내부와 세계 질서는 트럼프의 고립주의적 포지셔닝으로 인해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오직 시간이 알려줄 것이다.
▲전후석 / 재미 영화감독
전후석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전후석은 뉴욕에 거주하는 재미 한인 영화감독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와 <초선>을 연출했고 <당신의 수식어>라는 저서가 있습니다. 세 창작물 모두 재외동포들의 이야기와 디아스포라적 사유라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스토리텔러가 되기 전에는 뉴욕 변호사로도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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