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2 17:19최종 업데이트 24.11.1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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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은 정부를 구성하는 요소 중 정책의 의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내용이다. 따라서 특정한 정책 대상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예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요소와 달리 예산의 경우 블랙리스트가 곧 화이트리스트의 논리가 된다는 점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강에서 근처 논에 물을 댄다고 생각해 보자. 강줄기와 모든 논이 직렬되는 것이 아니라면 물은 불가피하게 논과 논을 경유해 흐르게 된다. 블랙리스트는 이렇게 연결된 물의 흐름에서 특정한 논을 빼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있는 것을 없애면 블랙리스트는 명확하게 확인된다.


하지만 그렇게 빼낸 물을 다른 논과 연결시키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블랙리스트인가 아니면 정책 변화인가. 이를 구분하는 방법은 정책의 원래 대상이 가지고 있던 정책목표의 달성 여부와 변화의 타당성을 평가함으로써 정책 변화가 내외적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진단하는 것이다.

즉 정책목표가 달성되지도 않았는데도, 그리고 그 정책목표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간주되는데도 특정한 사업 경로 내의 개인과 단체를 배제하기 위해 해당 사업을 다른 사업으로 대체한다면 이는 블랙리스트의 목적을 가지고 정책 변화가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특징은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를 불러온다. 이를테면 이렇게 자의적으로 정책 변화가 가능한 환경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왜 예술 지원의 제도 수준이 이렇게 취약한가. 만약 정부 정책의 실현을 위한 공공 재정을 통해 블랙리스트가 가능하다면 역으로 화이트리스트도 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특정한 이들을 배제하기 위한 예산의 사용이 아니라 특정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의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은 좀 더 근본적인 예술지원정책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글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문화예술지원 예산이 가진 특징을 진단하고 기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작동되었던 블랙리스트와 다른 윤석열 정부의 블랙리스트 작동 방식을 진단한다. 그리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당사자들이 말해온 '블랙리스트도 화이트리스트도 없는 세상'을 위한 방안을 제안한다.

이권 카르텔? 형평성 문제? : 사업에 딱지 붙이기

2023년 8월 2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4년 예산안 및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 상세브리핑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2023년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은 6조 7408억 원이었는데 2024년에는 6조 9545억 원으로 3.2% 증가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5년 예산안은 7조 1214억 원으로 다시 2.4% 정도의 증액이 이루어졌다.

같은 시기 정부의 총예산 기준으로 보면 2023년에는 1.04% 수준에서 2024년 1.05% 그리고 2025년 예산안 기준으로는 1.04%로 정부의 총예산 증가 수준만큼은 증액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다시 16개 분야의 재정지출 현황으로 보면 문화 및 관광 분야는 2022년 9.1조 원에서 2023년 8.6조 원 그리고 2024년에는 8.7조 원을 보였다.

2022년에서 2023년 사이 사회복지 11조 원, 교육 12조 원이 증가한 반면 산업중소기업 및 에너지 분야에서 5조 원, 교통 및 물류에 2조 원이 줄어든 것과 비교하면 물가 상승 등의 구조적 요인이 있는 분야의 경우에는 증액이 확인되지만 전반적으로 정책적 의지에 의해 집행하는 정책사업 분야에선 공통적으로 감액이 확인된다. 특히 예비비가 기존 3.9조 원에서 2023년 4.6조 원 그리고 2024년 4.2조 원으로 확대되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긴축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경향성을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2024년 예산 국면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연구개발(R&D) 사업의 감액이었다. 이는 정부가 민간으로 사업비를 이전하는 민간 보조금 사업에 대한 직접적인 구조조정이라 할 수 있다. 2024년 예산안을 다룬 제410회 제2차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결산심사소위원회에서 강훈식 의원은 "저희가 R&D와 보조금 사업 관련 일체에 대해서는 별도로 따로 뽑아서 양당 간사 간 협의로 보류해서, 넘겨서 처리하는 게 속도가 나겠다, 이런 것 한가지하고요"라고 언급했다.

이는 결산 과정에서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한 정부부처에서 민간보조사업 성격의 사업을 임의로 불용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이것이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자 아예 해당 사업에 대해서는 분리해서 다루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당 간 합의를 해서 각 부처의 R&D와 보조금 사업에 대해 따로 살펴보기로 하고 해당 논의 과정은 2024년 예산안 편성 과정에 반영된다. 실제로 예산을 제출하면서 문화체육관광부는 이권 카르텔 요소, 형평성의 문제, 집행상의 비효율성 등을 언급했다.

"우선 예산편성 과정에서 방만한 보조금 운영, 낭비적 요소, 이권 카르텔적 요소를 점검하고 모든 예산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불공정, 비합리, 비효율을 제거했다. 특히, 재정지원사업 선정 과정에서 전문성 또는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되거나, 집행상의 비효율성이 중대한 사업에 대해서는 분야를 막론하고 폐지, 삭감 등 과감한 조치를 단행했다. 이처럼 문체부는 면밀한 검토와 혁신을 통해 보조금 총 2442억 원을 삭감하고 …" - 2024년 문화부 예산안 보도자료

문화예술 분야에서 대표적으로 언급된 것은 지역 동네서점 지원 사업 중 하나로 한국작가회의를 통해서 지원하던 활성화 사업이다. 해당 사업은 작가와 지역 동네서점을 연계하여 서점을 이용하는 사람을 늘리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사업의 효과를 보면 만족도가 낮지 않다.

그런데 결산 과정에서 특정한 단체가 반복적으로 보조금을 수혜한다는 이야기가 강조된다. 즉 사업의 효과나 성과가 아니라 '한국작가회의가 3년 이상 연속적으로 지원을 받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질문과 그것이 문제라는 문화체육관광부 간의 합의가 확인된다.

해당 사업은 한국작가회의를 지원하기 위한 사업이 아니라 지역 동네서점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고 이를 위해 작가를 매개로 하는 독자 방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면 해당 사업은 민간보조사업의 형식을 띠지만 사업 목적에 있어서 예술인 지원사업이라기보다 동네서점 진흥 정책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와 국회는 해당 사업의 전달체계에 있는 예술단체를 지목했다. 이와 같은 현상이 R&D 사업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즉 보조금을 특정한 대상에게 반복적으로 주는 것이 '이권 카르텔'이고 이는 '형평성의 문제'를 일으킨다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관료 독재의 징후들 : 사유화되는 재정

지난 9월 11일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은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2025년 예산 복원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학교예술강사의 생계를 위협하고 아이들의 문화예술교육 기회를 빼앗는 윤석열 정부를 규탄한다”고 밝혔다.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예산 편성 과정에서 기존 사업에 대한 지출구조 개선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국가의 재정은 시민들의 조세 납부를 통해 형성될 뿐 국가 자체가 생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세가 입장권이나 벌금이 아니라면 조세의 정당성은 적어도 납세의 자발성과 정당성에 의존해야 한다.

관료들은 예산이나 집행 등 재정 과정을 대행하는 자들이지 공공 재정에 대한 처분권을 독점하고 있는 이들이 아니다. 선출된 권력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 재정이 선거로 선출된 이들의 전리품이 아니라면, 적어도 정부 정책 방향의 변화를 설명하고 이를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민들은 예측가능한 정부의 정책 방향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이런 절차가 없었다. 선출된 특정 당파와 정부 관료 간의 담합으로 기존의 정부 재정 운용 방식을 일방적으로 변경한 것이다. 특히 보조사업의 비중이 많은 문화예술 정책의 경우 특정 사업 하나하나가 특정 예술인들에게 창작의 가능성을 보장해 주는 사업임에도 이를 일방적으로 정리했다.

이런 촌극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2025년 예산안에서 사라진 예술강사지원 사업이다. 해당 사업은 초기 문화예술에 대한 관객개발이라는 목적이 있었지만 현재는 문화예술인 일자리사업이다. 정책 대상이 문화예술이라면 이에 대한 정책 책임은 문화체육관광부에 있다.

2025년 예산안은 80억 원에 불과한데 2024년에는 287억 원이었다. 일자리가 12개월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예산 감소는 사실상 사업의 폐지라 할 수 있다. 이 배경에는 해당 사업예산을 지역교육청이 담당해야 한다는 재정 당국의 의지가 있다. 기획재정부는 법적으로 정률 할당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 남는다는 인식 하에 학교에서 진행하는 학교예술강사 사업비를 지역교육청이 맡아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예산 배정의 합리성이라는 측면에서 타당할지 모르지만 사업의 구조와 목적 그리고 정책 대상의 정합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합리적이라 하기 힘들다. 오히려 문화예술인에 대한 공공일자리 사업으로서 학교예술강사 사업을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임의로 폐지했다는 것이 더 큰 쟁점이다. 당사자인 학교 현장이나 예술강사들의 의견, 해당 사업을 위탁 운영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결정이다.

만약 학교에서 벌어지는 사업은 교육재정이 담당해야 한다면, 2024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늘봄학교 사업 역시 교육재정으로 부담해야 타당하다. 하지만 현재 늘봄학교에 문화체육관광부는 직접 지원을 확대하는 중이다. 학교예술강사 사업의 폐지와 늘봄학교의 신규 시행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기존 학교예술강사들을 배제한다는 구체적인 효과를 가질 뿐이다.

이런 현상은 문화도시 사업에서도 확인된다. 기존 문화도시 사업이 2025년 이후 일몰된다. 그런데 다시 대한민국 문화도시라는 사업이 다시 시작된다. 기존의 문화도시 사업이 지역문화의 격차를 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었으나 이런 정책목표가 사실상 실패했기 때문에 '광역형 선도도시' 개념으로 새롭게 개편하여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업의 추진 방식은 거의 변함이 없다. 달라진 것이라면 기존의 문화도시 정책을 주도했던 지역 내 문화기획자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 문화도시 사업은 민간과 행정 간의 협력사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지방정부가 직접 문화시설을 추가로 설치하는 것으로 개편했다. 즉 해당 사업의 경로에서 민간 문화예술인들을 우회하려는 의도가 확인된다.

이런 현상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주요한 사업들이 지방이양 혹은 지역분권이라는 명목으로 조정되고 있는데 대부분 지방정부나 지방공공기관에 이전되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즉 전달체계 상 기존 문화예술인이나 문화예술단체가 있었던 경로를 모두 공공기관 중심으로 재편한 것이다.

이는 과거의 몇몇 문화예술인들을 특정해 배제했던 리스트 방식의 블랙리스트가 아예 사업 전달 체계에서 예술인 당사자를 배제하는 전달체계 방식의 블랙리스트로 작동하는 것이다. 전달체계 개편이 왜 블랙리스트냐고, 지출구조 개선을 위해 불가피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애당초 민간보조사업 구조에 의존하고 있는 기존 문화예술지원 체계에서 보조사업의 사업구조 개편은 구조적 지원 배제의 효과를 낸다.

문화재정 되찾아오기

10월 28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 정책이야기 '문화왔수다Ⅱ'에서 직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개별 사업들로 보면 여전히 사업의 조정 과정에서 미세하게 지원과 배제의 맥락을 쫓을 수 있다. 하지만 큰 틀에서 윤석열 정부의 문화재정 변화는 명확하게 기존 민간보조금 형태의 문화예술진흥 정책이 구조적으로 파산했음을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이후 관료 체제에 의한 미시적 배제와 지원은 확인하기 어렵고 더욱 은밀하게 진행된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정책 당사자로서 예술인 집단 자체를 정책 수립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는 과거보다 더욱 폐쇄적인 논의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회의가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예술인 당사자들이 초대받더라도 회의자료가 사전에 공유되지도 않고 배포된 자료는 회의 종료 후 바로 회수된다. 대표성을 발휘하려면 해당 사안에 대해 어떤 형식으로든 공론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거버넌스는 문화예술지원정책 과정에서 형식적인 알리바이를 충족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는 작년도 올해도 예산편성 과정에서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확인했느냐는 질문을 남긴다. 유인촌 장관이 각종 현장에 나가 정책간담회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형태는 과거 관치 시절에 동을 순회하는 관료들이 구태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디에 문화적 감수성과 예술인의 특수성이 반영되고 있는가.

그래서 블랙리스트 이후의 과제에 대해 좀 더 본질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현재의 진흥체계를 그대로 둔 채 블랙리스트가 화이트리스트로 변해가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국가가 예술인들이 바라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이 예술친화적 정책이라면 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예술인들을 배제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지원체계는 문화예술을 구조적으로 제도 정치의 당파성에 종속시킨다. 이 과정에서 근본적으로 중앙부처로서 문화부 자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애당초 중앙집권 정부 운영 원리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중앙부처로서 문화 담당 부처가 있다는 건 하향식의 정책 전달체계 밖에 있는 대안을 고민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문화재정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옮겨와야 한다. 문화부가 없어진다고 문화재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재정에 대한 예술을 하는 시민들의 주권을 고민해 볼 시점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김상철 문화정책리뷰 편집위원, 나라살림연구소 정책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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