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6 17:19최종 업데이트 24.11.16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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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국제사회는 외교권을 빼앗긴 쪽이 아니라 빼앗은 쪽을 편들었다. 고종황제가 가장 크게 믿었던 미국은 가장 시원하게 한국을 배신했다.

<대한제국 멸망사>를 쓴 미국 감리교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은 자발적으로 일본의 보호통치를 수락하는 협정에 서명했다고 일본 정부는 워싱턴에 통고했으며, 미국 정부는 이와 같은 통고의 진부(眞否)에 관해 조선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일본의 주장을 정당화"했다고 증언했다.


그런 뒤 "(미국은) 즉시로 서울에 있는 공사관을 철수시킴과 때를 같이하여 앞으로 조선과의 외교 업무는 도쿄를 통해 다루어질 것이라고 워싱턴에 있는 조선 공사관에 통고했다"고 덧붙인다. 주한공관을 제일 먼저 철수한 미국은 을사늑약을 가장 먼저 응원하는 나라가 됐다.

고종 정부와 체스터 아서 행정부가 1882년에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한미수호통상조약) 제1조는 제3국이 조선이나 미국을 억압하거나 부당하게 대하면 다른 쪽이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해줘야 한다고 규정했다. 을사늑약 뒤에 고종은 이 약속에 희망을 걸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지만, 루스벨트는 공사관 철수 조치를 발표할 때까지 친서 접수를 '안 읽음' 상태로 미뤘다고 <대한제국 멸망사>는 기술한다.

일제에 순응한 선교사들, 한국 독립운동 도운 선교사들

1909년 내한 감리교 선교사들과 함께 한 엘머 케이블 선교사(앞줄 가운데)미국연합감리교회

비정한 태도는 미국인 선교사들에게서도 나타났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의 <파란 눈의 한국 혼 헐버트>는 "(을사늑약 당시) 선교사들 사이에 교회의 성장을 위해 일본을 자극하지 말고 정치와 멀리하자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라며 "선교사들은 이러한 암묵적 합의에 대해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의 교회 본부와 통신하면서 현실에 참여하는 헐버트를 비난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호머 헐버트처럼 일제를 비판한 미국인 선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독립유공자는 아니지만, 한국 선교뿐 아니라 한국 독립을 위해서도 열정을 바쳤다.

그중 하나인 엘머 케이블(Elmer M. Cable)은 미국이 조선과의 신미양요에서 패전한 지 3년 뒤인 1874년에 시카고 서쪽인 아이오와주에서 출생했다. 코넬대학을 졸업한 1899년에 감리교 집사목사가 된 그는 25세 때인 그해 9월 한국에 도착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자료 검색서비스>에 따르면, 기이부(奇怡富)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한 케이블은 처음에는 배재학당 교수로 일하다가 평양·인천·해주·연안·강화·시흥·부평·남양·공주 등지에서 활동했다. 집사목사에서 장로목사로 바뀐 것은 1902년이다.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은 소속 교단의 교세 확장을 우선시한 나머지, 자신들의 해외 선교가 자국 자본가들의 제국주의 팽창에 악용되는 현실을 간과하거나 외면했다. 자신들과 현지 정부의 마찰이 자국 군대에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고, 자신들의 서양 가치관 전파가 자국 자본가들의 아시아·아프리카 착취에 악용되는 현실을 그들은 모른 체 했다.

을사늑약을 목격한 선교사들 중에는 한술 더 뜨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조선·유구왕국(오키나와)·청나라에 제국주의적 압박을 가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팬들도 있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간 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의 선봉장에 대해 성직자들이 호감을 보였던 것이다. 류대영 한동대 교수의 <한 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하여 가졌던 태도는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그들의 기대 및 호감과 관련 있었다. 이토는 메이지정부 초대 수상을 시작으로 네 차례나 수상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일본 정치인으로서 서구인들 사이에서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선교본부의 행정가와 한국 주재 선교사들도 이토를 세련되고 품위 있는 신사, 탁월한 정치인으로 여겼다."

을사늑약 이후로 일제 침략이 더욱 노골적이 되면서 서양 선교사들은 일본의 일왕(천황) 숭배가 자신들의 유일신 신앙과 충돌하는 현실을 체감하게 됐다. 그러기 전까지 선교사들은 서구 제국주의의 가치관을 한국에 확산시키는 이토 히로부미를 우군으로 생각했다.

일제의 만행 고발한 엘머 케이블 선교사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거리를 지나는 엘머 케이블 선교사(오른쪽)미국연합감리교회

엘머 케이블은 달랐다. 그는 이토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제의 한국 침략을 못 본 척 하지도 않았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위 검색서비스는 한국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케이블은 한국의 일제에 의한 국권 상실에 비분하였고, 한국인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한국인의 교육을 통한 실력 배양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1908년 3월 공주지방감리사로 재직할 때에는 친일 감독인 해리스(M.C. Harris)에게 항의한 적도 있고,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총살당하는 현장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한국인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하여 선교회 보고서에 첨부하기도 했다."

2008년에 <동서인문학(구 인문학연구)> 제41집에 실린 전재홍의 논문 '을사늑약 전후 시기의 재한 선교사들의 대응과 역할'은 "1908년 공주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케이블은 그의 연례 보고서에서 '박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일제의 학살을 보고했다"라며 그가 보고서에 이런 내용을 담았다고 알려준다.

"지난 가을 난리가 일어났을 때 목천에 있는 우리 신자들은 심한 고난을 받았다. 안내 병천에 있는 우리 교회가 일본군에 의해 전소되었고, 이곳에서 몇 리 밖에 있는 사자골에서는 3명의 신자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형을 당했다. 명령에 의하여 일본 병사들은 불행한 희생자들의 가슴을 겨냥하였다. 총성이 멎고 나서 병사들은 앞으로 나아가서 시체들을 총검으로 찔렀다."

케이블은 "비슷하고 아주 놀라운 일이 문위에서도 있었다"라며 일본군이 의병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부역 혐의를 씌워 총살시켰다고 보고했다.

"이곳에서는 총을 들이대고 강요하는 반란자·의병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죄목으로 14명이 일본군에게 잡혀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들 가운데 한 신실한 신자가 있었는데, 그의 결백하다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사람들과 같이 나무에 묶여서 총살형을 당했다."

케이블이 일제의 만행을 보고서에 담은 것은 감리교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위 논문은 "그러나 이 보고는 회의록에 부록으로 수록되었을 뿐, 친일적인 감독 해리스가 주재하는 회의에서는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다른 선교사들과는 확연히 달랐던 삶

한국전쟁을 계기로 기독교 교세가 크게 늘어났듯이, 유라시아 차원의 정치적 변화를 초래한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해서도 그런 현상이 있었다. 이는 선교사들이 그 직후의 을사늑약 때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이 됐다. 교세 확장의 호시기에 일제 당국과 충돌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케이블도 그 시기가 교세 확장의 호기임을 알고 있었다. 이정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의 저서 <3·1운동의 얼: 유관순>에도 케이블의 그런 인식이 언급됐다. 이 책은 "노블 감리사는 1904년 선교회의 제20차 연회 보고서에 지난해 늘어난 신자 수 3000명은 전체 신자의 42%이며, 이 중 약 90%가 러일전쟁 이후에 늘어났다고 기록했다"라며 이 시기에 케이블 선교사가 "우리는 지금, 우리 앞에 열려 있는 훌륭한 기회와 성공에 당황하고 있다"고 발언한 사실을 소개한다.

교세 확장의 필요성을 절감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외면했다. 반면, 케이블은 그런 필요성을 알면서도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미국인이 아니었다면 서대문형무소를 자주 들락거렸을 것이다.

케이블은 협성신학교 교수·교감·교장과 연희전문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일제강점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가 서양 선교사들을 추방한 1940년에 한국을 떠나게 됐다.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긴 한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에 희망을 걸고 미국에 구조를 요청했다. 미국 정부와 미국인 선교사 대부분은 이때 고개를 돌렸다. 이런 속에서 호머 헐버트와 마찬가지로 엘머 케이블은 제1조를 개인 차원에서라도 이행하고자 했던 몇 안 되는 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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