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제도개선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위원회 백서>에 따르면, 2014년 부산영화제가 '세월호 사건'과 정부 대응을 비판적으로 담은 영화 <다이빙벨>을 상영하는 것으로 알려지자,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을 필두로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부, 부산시 등이 광범위한 상영 중단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영화가 상영되자 청와대는 부산영화제에 대한 전면적 지원 배제 등을 지시했다. 문체부는 국내 영화제가 문제 영화를 상영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지원 축소 혹은 배제 방안을 마련하고, 2015년 부산영화제 지원을 전면 배제할 경우 생길 파장을 고려해 전년 대비 절반 수준의 보조금 삭감 방안을 청와대에 제안해 승인을 얻은 후 영화진흥위원회에 하달했다.
영진위는 2015년 글로벌국제영화제 지원 사업에서 심사위원 선정을 조작하고, '부산영화제에 지원금이 편중되어 있고, 영화제의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를 심사위원에게 제공해 결국 부산영화제 보조금을 전년 14억 6000만 원에서 8억 원으로 삭감했다. 더불어 부산시가 지도점검과 고소 등을 진행했고 이에 따라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사퇴 등도 영화제에서 문제 영화를 상영한 것에 따른 후속 조치임이 밝혀졌다.
부산영화제 사건은 영화제 검열로서도,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실행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서도 대표적인 사례다. 문재인 정부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를 발족해 사건을 조사하고, 제도개선안을 마련하고, 관련자를 징계하고 수사 의뢰를 정부에 요구한 것은 블랙리스트가 재발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에서 블랙리스트는 다시 작동하고 있으며, 영화제 블랙리스트는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발생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팔길이 원칙을 지켜나가겠다고 했지만, 대통령의 말과 실제 정책 실행은 달랐다. 윤석열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과거 정부 같지는 않고, 진화하는 방식으로 실행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정권 입장에 반하는 영화의 상영을 막기 위해 직접 영화제에 압박을 가했다. 말을 듣지 않자 보조금을 활용해 압박하고 길들이려 했다. 보조 사업에서 지원 배제가 헌법 위반으로 인정받자, 새로 등장한 보수 정부는 다른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개별 영화제를 대상으로 한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지원 사업 자체를 가지고 블랙리스트를 실행하는 것이다.
'특정한 영화제 예산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사업 예산을 줄이고 지원 영화제 수를 더 줄이면 영화제들은 지원 받기 위해 알아서 자기 검열할 것'이라는 가정 아래 실행된 지원 정책이 새로운 블랙리스트 수법이다. 예산과 지원 영화제 수를 줄이면 정부 정책에 반하는 영화를 상영할 가능성이 있는 영화제는 돈이 없어 개최되지 못할 수도 있다. 예산과 지원 개수의 축소는 자기 검열을 통한 길들이기와 함께 영화제 폐지를 이끌 수 있다. 두 가지 효과가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 변경된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언론을 동원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만들어진 문화자유행동은 대표적인 보수 문화단체다. 이 단체의 영화분과 위원인 김병재는 <중앙일보>에 영화제 수가 너무 많아서 문제이고 경제가 어려우니 국민의 혈세를 지원받는 영화제 규모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의 글을 기고했다. 이렇게 타당성을 스스로 얻고자 했다.
이런 언론 작업은 과거 부산영화제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도 동일하게 있었다. 앞서 영화제 예산 관련 언론 기고를 했던 김병재(윤석열 정부가 임명한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는 2016년에도 지역 언론과 중앙 언론에 기고하며 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리고 2016년에는 영진위의 국제영화제 지원 심사에 직접 참여하며 부산영화제 지원 배제에 가담하기도 했다. 똑같은 일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었다. 심지어 출연자도 동일하다.
서울독립영화제에 드리운 블랙리스트 그림자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이 5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열린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정부지원 삭감 관련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체부는 2025년 영화발전기금 계획안에서 서울독립영화제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서울독립영화제는 1975년 박정희 정권의 영화진흥공사가 만든 영화제로 지난 49년간 정부 단위에서 개최해 온 사업이다. 2001년부터는 민간 영화단체인 한국독립영화협회와 공동주최해 왔는데, 이런 변화로 서울독립영화제는 영진위의 민관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이 사업이 50년 만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2024년 영화제 지원 예산과 지원 개수의 축소, 2025년 서울독립영화제 예산의 폐지는 새로운 정책의 변화가 아니다. 영화를 대상으로 한 오래된 블랙리스트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우는 것이다.
제도를 변경한 블랙리스트는 혐의를 찾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서 명확하게 블랙리스트로 명명하기도 어렵다. 문체부는 사업이나 예산 변경이 블랙리스트가 아니라고 강변할 것이다. 정부의 주장대로 과거와 같은 블랙리스트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업과 예산 변경이 특정 종류의 영화나 단체, 그리고 인물을 배제하고 검열하기 위한 것이라면 역시나 블랙리스트가 될 것이다. 반헌법적인 블랙리스트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면 일방적인 정책 추진이 아니라 민간의 의견을 듣고 정당한 의견이면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람직한 협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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