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마산중앙부두 김주열열사 시신인양지에 세워진 '김주열 열사 동상'의 설명판.
윤성효
'3·15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났다'는 통념이 3·15의거를 저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마산에서 시위를 벌인 17세 김주열이 실종되고(3월 15일) 그의 주검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상태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고(4월 11일) 이로 인해 격발된 전국적 시위가 이승만 하야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우리 사회는 알고 있다. 그 전체 과정을 4·19로 압축해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통념에 문제점이 많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 통념은 1960년 봄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4월, 대학생, 서울'로 좁히는 측면이 있다. 항쟁이 4월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벌어졌고, 대학생뿐 아니라 10대 학생과 일반 시민들도 대거 참여했으며,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부지불식간에 '4월, 대학생, 서울'에 빠지게 만든다.
이와 관련해 유명철 경북대 사범대 교수는 2018년에 <사회과 교육> 제57권 제1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현재, 4월 혁명은 '4월 19일', '서울', '대학생'의 의미가 과대 대표되고 있다"고 한 뒤 "4·19라는 명칭은 1960년 봄에 전개된 혁명운동의 연속적인 흐름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승만 정권은 '이승만'을 찍은 투표용지를 투표함 속에 두둑이 채워놓고 3월 15일을 맞이했다. 국민이 두렵지도 않고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2014년에 발행된 장덕환 당시 4·19혁명정신선양회 공동대표의 저서 <한국의 4월혁명>은 선거 당일에 마산 유권자들이 목격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투표가 시작되는 시각인 오전 7시, 사전투표 작태를 이미 간파하고 있던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이 투표소 입구를 막고 서서 완강히 저지하는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뛰어들어가 '4할 사전투표'가 이미 실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사전투표가 광범위하게 자행됐으므로 투표 통지표를 못 받은 국민들도 많았다. 이런 유권자들의 항의 시위가 그날 아침 마산에서 일어났다. "투표 용지를 받지 못한 또 다른 유권자 수백 명이 당사 앞 도로에 몰려와 '내 표를 찾아달라!'면서 아우성을 쳤다"라고 위 책은 기술한다. 민주당 당사 앞에서 벌어진 이런 상황에 힘입어 오전 10시 30분에 민주당 마산시당이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오후 1시 30분에 경남도당이 선거무효를 선언하는 긴박한 상황이 이어지게 됐다.
이날 마산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폭발했다. 이승만 정권은 최루탄뿐 아니라 발포까지 하면서 시위대에 맞섰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략 1만 명 정도가 시위에 가담했다. 이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동시에, 이승만 정권이 군대 동원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을 낳았다.
AP통신 보도를 소개한 3월 16일 자 <동아일보> 'AP의 마산사건 보도'는 "합동통신은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서울서 250리(250킬로미터의 오기인 듯) 떨어진 마산에서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마산의 투표 본부로 밀려갔다고 말하였다"라며 "정부는 수가 부족한 경찰을 돕기 위해 대규모적인 육군의 증원을 명령할는지도 모른다고 추측이 떠돌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이승만 정권이 경찰력이나 웬만한 군대로는 진압하기 힘든 민중봉기가 일어났기에 그런 추측까지 나돌게 됐다.
9명이 희생되고 80여 명이 다친 이날 시위는 밤 11시 반경에 진압됐다. 이날 시위가 전국 각지의 국민들을 자극해 '1960년의 봄'을 일으켰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이 이승만 정권을 얼마나 당황시켰는지는 군대 동원 풍문이 나돈 것 외에 레드 콤플렉스가 표출된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
3월 16일 자 <조선일보> 톱기사에 따르면, 최인규 내무부장관은 이날 오전 0시 30분 담화에서 "마산은 밀수선 등을 이용하여 공산당이 침입·도량(跳梁)한다는 정보도 있어 애국동포들은 신중을 기하기 바란다"고 경고했다. 마산은 밀수가 많은 지역이라 공산당이 침입해 마구 날뛴다는 정보도 있다면서 3·15의거를 공산주의나 북한과 연계시키려 했던 것이다.
3·15 시위는 전국적인 연쇄 시위를 추동했고, 1개월 뒤의 4·11 마산 시위도 4월 19일의 절정에 달한 전국 대규모 시위, 4월 26일의 이승만 하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결정적이고 인상적인 역할을 했다. 전체적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에너지가 계속 발산되도록 만들었다.
6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4·19와 함께 김주열과 마산이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같은 역사적 맥락이 정확히 전달되려면 역사교과서에서 3·15의거가 제대로 기술돼야 한다는 게 최근 경남에서 계속 나오는 목소리다.
역사교과서에 담겨야 할 '이승만 하야'의 전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