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바이저 부드바르 투어 입구. 케틀을 본떴다.
윤한샘
4시 정각. 기념품 숍 뒤에서 흰머리에 인상 좋은 60대 여성이 노란색 조끼를 들고 나타났다. 오늘 투어의 가이드였다. 그녀는 체코 억양이 담긴 영어로 환영 인사를 건네며 투어를 위해서는 안전 조끼를 입어야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원을 체크한 뒤, 황금색 구리 케틀로 우리를 안내했다.
황금색 구리 케틀은 다름 아닌 입구였다. 나에겐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들어간 나무 구멍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가자마자 중세 시대 양조장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맥즙을 끓이던 작은 솥과 나무 주걱들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옛 양조사들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애피타이저가 끝나자 드디어 부드바이저 부드바르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과거에 맥주를 날랐던 자동차와 진짜 양조에 사용된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장식장과 벽에는 비중계, 저울, 레시피, 병입기, 각종 문서와 사진들이 다닥다닥 놓여 있었다. 19세기, 부드바이저 부드바르가 본격적인 공장 형태를 갖추었을 시절의 물품들이었다.
버드와이저 분쟁 관련 문서들도 깨알같이 붙어 있었다. 안호이저-부시가 이곳에 와서 영감을 얻고 베껴갔다는 노골적인 증거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부드바르가 버드와이저보다 더 큰 스트레스와 위기감을 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부시 4세에게 매각했다면 이 맥주는 시나브로, 사부작사부작 사라졌겠지. 비로소 부드바르의 분노와 고통이 이해됐다.
양조장 속으로
이제 다시 현재로 돌아갈 시간. 문을 열고 야외로 나가자 멀리서 솔솔 맥즙 냄새가 흘러나왔다. 허브와 향신료 향이 섞인 걸 보니, 분명 홉을 넣고 끓이는 맥즙이었다. 가이드는 향의 진원지로 우리를 데려가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투어를 위한 볼거리도 흥미로웠다. 작은 홉 밭에서는 부드바르에 들어가는 사츠 홉을 직접 만질 수 있었고 지하 300미터에서 뽑아내는 물을 볼 수 있는 작은 사이드 글라스도 있었다. 물은 체코가 밝은색 라거를 인류 최초로 만들 수 있게 한 장본인이다.
체코에는 만 년 전 빙하에서 형성된 부드러운 물, 연수가 흐른다. 밝은색 맥주는 연수에서 태어났다. 경수가 풍부한 독일과 영국이 밝은색 맥주의 후발 주자가 됐던 이유다.

▲브루하우스 입구에 있는 양조 과정 드로잉
윤한샘
양조장 입구, 더 정확하게는 당화조와 끓임조가 있는 브루 하우스 입구에는 맥주가 탄생하는 과정을 설명한 간략한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체코 라거와 다른 나라 맥주에서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디콕션(Decoction)이었다.
디콕션은 열원이 부족하던 시절, 당화 온도를 올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섭씨 64~74도에서 진행되는 당화 과정은 순간적으로 온도를 높여야 한다. 이를 승온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64도에서 당화를 진행하다 72도로 빠른 시간 도달해야 원하는 당을 가진 맥즙을 얻을 수 있다.
18세기 석탄이 등장하기 전 유일한 열원은 나무였다. 짧은 시간 온도를 올리기에 나무는 너무 약했다. 양조사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다. 그 결과가 디콕션이다. 디코션은 맥즙 속에 있는 맥아의 일부를 빼 보일링 솥으로 옮겨 팔팔 끓인 뒤, 다시 맥즙에 넣어 온도를 높이는 과정을 말한다.

▲맥즙을 끓이고 있는 모습
윤한샘
사실 온도 조절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요즘은 많이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다. 시간과 비용이 더 든다. 반면 장점도 있다. 선명한 황금색과 짙은 캐러멜라이즈드 향을 맥주에 녹여낼 수 있다. 체코를 대표하는 부드바이저 부드바르와 필스너 우르켈은 여전히 디콕션을 고수하고 있다. 전통 방식을 지켜 맥주가 가진 고유한 향미와 정체성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다.
부드바이저 부드바르는 디콕션을 두 번 진행하는 더블 디콕션을 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당화 중 맥아를 당화 보일러로 이송해서 끓인 후, 다시 당화조로 끌어와 승온을 한다고 설명했다. 부드바르의 깊은 향미의 원천이 여기 있었다.
브루 하우스로 들어서자 더운 공기가 후끈 밀려왔다. 정말 양조 중이었다. 눈앞에는 거대한 구리 당화조와 끓임조가 펼쳐 있었다. 열기의 근원은 왼쪽 하단에 있는 끓임조였다. 열려있는 입구 틈으로 팔팔 끓고 있는 맥즙이 보였다. 와, 이걸 볼 수 있다니. 양조를 하는 입장에서 경이롭고 감사한 풍경이었다.

▲건조 홉이 보인다
윤한샘
또 하나 눈에 들어온 것은 홉이었다. 대부분 맥주에는 분쇄한 홉을 동결 건조시킨 홉 팰릿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홉 송이를 그대로 말린 '건조 홉'이 놓여있었다. 체코 라거의 영혼, 사츠 홉을 산지에서 직송한다는 증거였다. 신선도 측면에서 홉 펠릿은 이것과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양조 환경이 마냥 부러울 따름이었다.
필터링하지 않은 생맥주의 맛

▲지하 숙성조에서 맥주를 따르는 모습
윤한샘
브루 하우스를 나와서 지하 숙성조로 갈 순서. 이번 투어의 하이라이트다. 1876년 냉장 시설이 발명되기 전까지 라거는 지하 땅굴에서 만들어졌다. 많은 양조장이 현대화되며 지상으로 장비를 옮겼지만 부드바르는 여전히 땅 밑에서 맥주를 숙성하고 있었다.
브루 하우스가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면 지하는 찬 공기로 가득했다. 통로 사이사이 거대한 원통 숙성조가 보였다. 몇몇 양조사들은 맥주를 이송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가이드는 통로 끝에 있는 방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안에는 거대한 원통 숙성조가 두 줄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젊은 여성 양조사가 우리 도착에 맞춰 맥주를 뽑아내고 있었다. 모두 사막에서 물을 갈구하듯 우리는 그녀가 건네는 비어머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언필터드(unfiltered) 부드바르라. 한국에서 마시는 부드바르는 당연히 필터링이 된 맥주다. 아니 한국뿐만 아니라 현지 레스토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언필터드 라거는 상대적으로 상미기한이 짧아 유통하기 힘들다.
▲언필터드 오리지널 부드바이저 부드바르
윤한샘
양조사를 떠난 맥주는 가이드를 타고 내 손으로 전달됐다. 살짝 불투명한 황금색, 분명 필터링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천천히 한 모금 입안에 넣어본다. 와, 이게 뭐지? 그동안 내가 마셨던 부드바르와 다른 느낌 아닌가.
사츠 홉에서 나오는 향긋한 허브와 섬세한 풀 향이 입안 곳곳을 물들였다. 옅은 캐라멜 향과 자잘한 탄산이 배경에서 느껴졌다. 맥주는 살아있었다, 이 표현이 정확했다. 한국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생동감이었다.
모두가 맥주에 빠져 말을 잊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어설픈 발음으로 소리쳤다. '건배!' 현지 양조사의 건배 소리가 우리를 현실로 소환했다. 그제야 모두 건배를 외치며 진짜 부드바르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좋은 인생의 호사가 있을까.
한국에서도 오리지널 부드바이저 부드바르를 마실 수 있다. 아, 부드바이저 부드바르가 아니라 부데요비체 부드바르다. 이름이 어렵다면 그냥 부드바르만 기억하자. 그리고 만약 마트 선반에서 버드와이저 옆에 있는 부드바르를 본다면 응원의 말을 건네 보자. 네가 애쓴다. 파이팅!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