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4일 한강 작가가 신작 '흰' 출간 기념 및 맨부커상 수상 관련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모습.
권우성
쓰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쓰는 게 온당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지난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로 나는 줄곧 도파민 분비 과다 상태였다. 말을 얹고 싶은데, 얹을 말이 없어 괜히 손가락이 허공을 헤맸다.
다들 직간접적으로 한강의 자장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 무슨 말이건 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2007년 대학 새내기 국문학 수업 시간에 그의 소설 <몽고반점>을 처음 접했고, 문학회에서 <채식주의자>로 토론을 했다. 그 해 '국문인의 밤' 연사로 그를 섭외하려던 일도 생각난다. 2018년부터 2년가량 <서울신문>에서 문학 기자를 할 때는 강연에서 세 번 그를 만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전화를 걸었다(연결은 잘 되지 않았다).
가장 오래 본 것은, 한국이 아닌 스웨덴의 도시 예테보리에서였다. 2019년 9월, 한강은 그곳에서 열린 국제도서전에 참석했다. 그가 연사로 나선 세미나는 이틀에 걸쳐 모두 매진이 됐다. 스웨덴의 독자들은 근작인 <흰>(2018)에 관한 질문을 주로 던졌고, 스웨덴에 번역 출간된 <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흰>을 모두 읽었다는 이도 꽤 됐다.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부커상 수상자의 위용과 함께,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그리 먼 일만은 아니겠다는 체감을 했다.
말을 얹고 싶어서 선택한 길은, 그의 책을 다시 읽는 것이다. 분명 전에 <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내 여자의 열매><바람이 분다, 가라><희랍어 시간><작별하지 않는다> 등을 읽었었는데 이상하게 글을 쓰려고 했더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는 소설 쓰는 과정을 두고 '쓰다 말고 잠깐 골목을 걸을 때, 어항 밖으로 감고 있던 한 눈을 뜬 것처럼 아슴아슴 눈동자가 시릴 때가 있다' (산문 <기억의 바깥>)라고 했는데, 그의 소설을 읽는 내 모습이 항상 그랬다. 고시원에 살며 첫 사회생활을 하던 때, 다시 취업 준비를 하던 시기 각박한 현실을 잊기 위해 폭식하듯이 읽었기 때문에 더욱 아득하게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근데 그냥, 한강을 읽고 나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네' 하는 원초적인 이기심에 입각한 안도감이 들어서 하루를 더 살게 했다. 사실 내 인생이 여유로울 때는 소설 속에서 세상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이들이 부담스러웠고, 인생이 팍팍할 때에야 훨씬 와닿는 레퍼런스가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랬다.
'붉은 닻'처럼 녹슬며 버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