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에서 좌파로 명명한 문화예술 현장을 탄압하기 위해 생산한 문건의 표지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책임심의관제 통제를 바탕으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실행된 사례로 강하게 의심되는 경우는 대표적으로 2015년 공연예술발표공간 사업을 꼽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문재인 정부 시기에 진행된 진상조사 과정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 직원이 순조롭게 문제 사업들을 배제하기 위해 두 명의 심의위원을 만나 블랙리스트를 공유하고 배제 방법을 협의했다는 진술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책임심의관제 통제를 바탕으로 한 블랙리스트 실행은 마냥 순조롭지 않았다. 가령 청와대와 문체부가 2015년 2월까지 진행될 예정이었던 문학창작기금 사업의 2차 심사 통과 102명 명단 중 6명을 배제할 것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지시했던 경우가 그렇다. 왜냐하면 이 지시에 따라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 직원이 문학분야 심의위원들에게 청와대, 문체부가 배제하라고 한 인물들을 제외하고 3차 심의 진행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2015년 6월에는 공연예술창작산실-우수작품제작지원 사업의 심사위원들이 청와대, 문체부의 지시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 직원의 타협을 빙자한 협박성 대리검열을 거부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책임심의관제를 완벽히 통제할 수 없었던 탓인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15년 8월부터 기존의 책임심의제도를 심의위원 후보단 제도로 변경하기에 이른다. 청와대, 국정원, 문체부의 감독 하에 2016년 7월 즈음 마무리된 이 후보단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구성한 후 위원장이 선정하는 방식을 보였다.
이러한 심의 제도 변화에 따른 검열 사례로는 2016년 1월부터 진행된 공연예술행사지원 사업 심사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사업에 대한 심사에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 직원이 심사위원에게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업의 번호를 구두로 은밀히 전달하면 해당 사업이 낮은 점수를 받는 방식으로 블랙리스트가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공정성, 개방성에 주목한 심의제도로 이행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반성과 혁신이 요구되는 과정에서 심의제도 역시 변화를 맞이했다. 이에 따라서 2017년부터 시작된 제도가 심의위원 후보자 공개추천 제도다. 이 제도는 직전의 심의제도와 마찬가지로 심의 후보단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문화·예술 현장이 심의위원 후보자를 공개 추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공정성, 개방성, 투명성을 높였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영향으로 더 이상 사무처 직원이 문예진흥기금 사업의 심사위원이 될 수 없음을 대전제로 한 심의제도이기도 하다. 심의위원 후보자 공개추천 제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개선을 이어나가 문예진흥기금 공모 사업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대부분의 사업에 적용된 첫째 방식은 심의위원 후보단 내에서 담당 사무처와 위원이 2배수 이상 심의위원 후보 명단을 구성한 후 감사부 입회 하에 무작위 추첨으로 최종 심의위원을 확정하는 적격자 지정 방식이다.
둘째는 더욱 전문성이 요구되는 사업이나 평가 방식의 일관성이 필요한 일부 사업에 한해서 심의위원 후보단 외에서도 심의위원을 위촉할 수 있도록 하는 전담심의위원 방식이다. 셋째는 심의위원 후보단 안에서 더 다양한 심의위원이 문예진흥기금 심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감사부 입회 하에 심의위원을 무작위 추첨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문화·예술 현장으로부터의 신뢰를 회복하며 공정성과 개방성을 높이기 위해 개선을 이어나간 제도이지만, 심의위원 구성의 적절성, 심의결과의 수용성을 담보할 평가문의 부실, 심의위원 후보단 운영 방식의 체계화 등의 문제는 여전히 획기적으로 해소될 수 없었다.
책임심의관제의 졸속 재탕
앞서 이야기했듯 어떤 심의제도이든지 간에 공모사업에 접근하는 이들의 불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즉, 유일하면서도 완벽한 대안으로서의 심의제도는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중장기적 관점으로 문화·예술 현장의 신뢰를 꾸준히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진 심의제도는 있을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지점에서 유인촌 장관이 14년 전의 책임심의관제를 만능키로 여기며 그대로 반복한 것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본다. 과거의 책임심의관제가 그대로 재도입된 측면은 특히 유인촌 장관이 문화·예술 현장 전문가들에 대한 불신을 내세우며 공공기관 직원들이 책임심의관으로 참여해야 공정성을 높이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도 차단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 지점에서 잘 드러난다.
책임심의관제 자체는 악마화될 제도가 아니기에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시 도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시기에 책임심의관제가 국가폭력과 연결되며 왜곡되었던 전례가 있는 상황에서 과거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유인촌 장관의 게으른 집착이거나 다시 국가검열을 재가동하겠다는 의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인촌 장관이 문화·예술 현장의 신뢰를 축적할 수 있는 방식의 책임심의관제를 도입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면 최소한 공공기관 직원들이 심의위원으로 참여할 수 없도록 해야 했다. 그 이유는 앞서 살펴봤듯이 박근혜 정부 시기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직원들이 국가검열의 말단 실행자로서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되뇌면 쉽게 도출된다.
그래서 영화진흥위원회의 경우에는 유인촌 장관의 성급한 책임심의관제 강요와 관련하여 현재 영진위 직원들이 심의위원으로 들어갈 만큼 전문성이 없다는 문제와 블랙리스트 사건의 트라우마로 직원이 심의위원을 맡는 것에 대한 우려가 높음을 정기회의 속기록을 통해서 공개하기도 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경우는 2023년 말에 열린 전체회의에서 사무처 직원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문제에 대한 우려가 논의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관련 논의가 있었던 속기록 부분이 비공개 처리되어 확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