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 터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김 여사가 관심을 표시한 사리구의 주인공들은 석가모니와 더불어 지공선사와 나옹선사다. 이들은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영향을 준 인물들이다. 조선 건국의 멘토인 무학대사가 스승으로 모신 스님들이다.
위 성명에 언급된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는 인도 승려인 지공선사가 고려 공민왕의 아버지인 충숙왕 때인 1328년에 건립했다. 이 해는 무학대사가 태어난 이듬해였다. 이 당시 고려에 체류한 지공선사가 대궐 같은 이 사찰을 건립했다.
훗날 이곳에 세워진 무학대사비에 따르면, 노비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17세 때 순천 송광사로 출가한 무학대사는 26세 때인 1353년에 몽골제국으로 유학가 3년간 공부했다. 이때 모신 지공선사와 나옹선사(고려인)는 영향력이 막강했다. 고려 불교계도 이 영향권하에 있었다. 지공의 제자인 나옹은 훗날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됐다. 이런 승려들의 제자가 된 것이 무학대사의 앞날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무학대사비에는 지공대사가 몽골제국에서 무학을 처음 만났을 때 했다는 한마디가 적혀 있다. 이에 따르면, 지공은 처음 만난 무학에게 "고려인 모두가 죽겠구나"라고 말했다. 대단한 제자가 들어왔다는 말을 그렇게 했다.
그 뒤에 만난 나옹선사도 무학에게 감탄했다. 남의 도움을 빌려 깨닫는 방식인 학(學)을 거부하고 자기 내면을 주체적 방식으로 성찰하는 방식인 무학(無學)을 추구하는 이 제자가 식사 공양도 거른 채 선정에 빠진 모습을 보고 나옹선사는 "너 죽었냐?"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29세 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무학은 36세 때 모교인 송광사의 주지가 됐다.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시대 초반에 나옹선사가 입적한 뒤로는 무학이 자연스럽게 고려 불교계 지도자로 떠올랐다.
우왕은 그에게 왕사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고사했다. 고려의 운명이 다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이 왕조와 깊은 인연을 맺지 않았다. 서산대사가 지은 <설봉산 석왕사기>에 따르면, 무학은 고려 멸망 8년 전인 1384년 이 사찰에서 이성계가 장차 왕이 되리라는 해몽을 했다. 왕이 되리라는 해석을 했다는 이유로 이 절은 석왕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런 뒤 무학은 조선왕조 창업의 길로 나아가고 한양 천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시간 걸리더라도 영구 반환 추진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