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1층에 '이승만 하야'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때 연설 장면이다.
윤성효
1960년 4월 19일·21일·26일, 월터 매카너기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를 찾아가 사태를 논의했다. 1995년 2월 3일자 <경향신문> 주말매거진 2면에 공개된 대화록에 따르면, 19일 밤중에 관저를 찾아간 매카너기 대사가 "비극적 사태에 대한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라고 말하자, 이승만은 "모든 사태가 정부의 전복과 혼란을 노리는 소수 선동자들 때문에 일어난 거요"라고 답했다. 그런 뒤 "오늘 오후부터 단호한 조치가 취해졌으니 이제 재발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매카너기는 "그렇지 않습니다"라며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대사, 민심은 나한테 있어요"라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되기 전에 폭도들을 통제할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를 잘했어요"라며 학생과 시민들에 대한 발포를 합리화했다. 그런 뒤 이렇게 말했다.
"좌우간 오늘 학생들이 죽은 것은 슬픈 일입니다. 몇 명이나 죽었죠?"
이승만은 국회 본회의 같은 데서 "다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비쳤지만, "너는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는 한국전쟁 전후의 수많은 민간인 학살뿐 아니라 측근 살상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해방 직후의 서북청년단 활동가인 김성주는 백범 김구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았을 정도로 이승만과 긴밀했다. 그러나 그가 이승만의 정적인 조봉암의 선거운동을 돕고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을 비판하자, 이승만은 그를 재판에 넘긴 뒤 은밀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군사재판이 막바지에 다다른 1954년 5월 김성주에게 징역 7년이 구형되자, 형량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은 헌병사령관 원용덕에게 '그냥 죽일 것'을 지시했다. 1991년 3월 29일자 <한겨레>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63: 김성주' 편에 따르면, 4·19 뒤에 원용덕 집에서 발견된 이승만의 영문 밀서에는 "너는 잔말 말고 즉시 내 명령대로 처단하라"는 살해 지시가 적혀 있었다.
이승만은 위선의 눈물을 얼마든지 흘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을 의롭게 포장하는 변명의 논리를 퍼트리고자 윤석열 정권이 10억 이상을 들여 국방부 간행물을 일선 부대에 배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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