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김백일의 묘, 서울현충원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김종훈
이곳 묘비 하단의 석판은 3·1운동 2년 전인 1917년 북간도 옌지현(연길현)에서 출생한 김백일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한다. 석판은 "만주 간도 연길에서 태어났다"라며 "일찍이 군사학을 닦아 해방된 조국에 환국하여 곧 군문에 들어가 육사 교장을 거쳐 지리산 및 용천지구 전투사령관을 역임"했다고 기술한다.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은 그가 빨치산과 싸울 때의 직함이다. 한국 빨치산의 주류가 지리산에 있었을 때, 그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이었다. 토벌 군경의 수뇌부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 시기인 1949년 10월 18일, 사령부 장교들을 대동한 그는 전북 남원에 있는 지리산 기슭의 여관에서 동아일보사 최흥조 기자와 좌담회를 가졌다. 이 상황을 정리한 그달 22일자 <동아일보> 기사 '소탕 전야의 지리산 답사기'는 빨치산 문제의 본질이 좌우 대결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절 신문에는 등장인물의 성명을 한번에 밝히지 않고 본문에서는 성만 밝힌 뒤 괄호에서 성명을 다 밝히는 기사들이 많았다. 위 기사는 좌담회에 모인 장교들의 이름을 그런 방식으로 소개한다.
"전투 지휘복장 그대로 모인 장교들은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 김(김백일) 대령을 비롯하여 공(공국진) 소령, 함(함준호) 대령, 박(박승일) 중령, 김(김용기) 소령, 김(김기용) 대위, 조(조재미) 중령, 이(이관식) 중위, 박(박종길) 대위, 오(오익경) 소령들이다."
위 기사는 간부들의 이름을 소개한 직후, 그들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1년 전 여수·순천 진압 작전에 참가하였던 이들은 자못 감개무량한 듯 당시의 정형을 무한한 감회에 잠기어 술회하였다"고 말한다. 여수·순천 주민들과 국군 제14연대가 일으킨 여순사건(여순항쟁)을 진압한 장교들이 빨치산 진압부대인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의 중핵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해방 이후의 빨치산 형성이 여순사건과 관련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최홍조는 김백일 등이 들려준 내용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했다. 최흥조는 그것을 기초로 지리산 빨치산 대원들의 출신 성분을 분류했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지리산 빨치산은 무장반도와 비무장반도로 양분했다. 그는 무장반도들을 이렇게 요약했다.
"무장반도: 국군 제14연대 반란군 잔존부대와 민간 출신 무장폭도 및 야산대."
최흥조는 빨치산 대원들의 출신성분을 설명하면서 여수 제14연대를 가장 먼저, 가장 비중 있게 언급했다. 이는 그에게 현지 상황을 들려준 김백일 등이 여순사건과 빨치산의 연속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위 기사에도 언급됐듯이 이들은 여순사건 1주년 전날인 10월 18일에 모임을 가졌다. 이 역시 최홍조와 김백일 등이 여순사건과 빨치산을 연결지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주민들과 제14연대가 궐기한 것은 제14연대에 내려진 제주 4·3 진압명령이 부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출신들과 함께 항쟁에 나선 이들은 분단정부는 수립되지 말아야 하며 친일청산은 훼방받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래서 진정한 해방을 이뤄야 한다는 심정으로 제주도민들을 응원했다. 동일한 심정으로 4·3항쟁에 나선 제주도민들이 옳았다는 판단하에 그들은 여순사건을 일으키고 뒤이어 빨치산 투쟁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단순히 좌파가 좋고 진보가 좋아서 지리산에 들어간 게 아니라, 분단을 반대하고 친일청산을 촉구하고자 그렇게 했다는 점은 빨치산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타당하지 않음을 웅변한다. 이 문제가 빨치산 대 군경, 빨치산 대 우익의 대결이 아니라 독립운동세력 대 친일세력의 대결, 통일운동세력 대 분단세력의 대결이라는 특성을 띠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독립운동세력 대 친일세력의 대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