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당시
진실위 자료사진
여순사건은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발생했다. 사건 초기에 이승만 정권은 사안의 성격과 봉기 총책임자를 규정하는 일에서 거듭거듭 혼선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가가 총책임자로 몰려 희생을 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분의 독립운동을 단 한 번도 인정해 준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분을 여순사건 총책임자로는 잠시 인정했다. 이 '잠시 인정' 때문에 본인이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쓰고 희생을 당해야 했다.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5대 일간지 중 하나인 서울 소공동 <국제신문>의 그달 22일 자 보도에 따르면, 이범석 총리는 21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봉기군인 제14연대의 직전 연대장이 공산주의자 오동기였다면서 이렇게 발표했다.
"오동기는 여수에 가서 소위(所謂) 군대에서 행하고 있는 하사관 훈련의 기회를 포착하여 젊고도 단순한 하사관들을 선동하여 주의(主義)를 선전하는 일방, 극우진영 즉 국내에서 결합된 수많은 정객과 연결을 가지고 노국(露國) 10월혁명기념일 전후를 계기로 전국적인 반란을 책동한 것이다."
극우의 의미가 우리 시대와 다르게 사용됐음을 보여주는 이 기사는 사건 발생 직후의 이승만 정권이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전에 계획한 반란으로 규정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10월 19일 오전 7시에 육군본부로부터 제주 4·3 진압명령을 받은 장병들 중에서 약 2000명이 명령을 거부하면서 발생했다. 그렇지만 이범석 총리는 그레고리력에 따르면 11월 6일이고 러시아력에 따르면 10월 24일인 러시아혁명 기념일에 즈음해 공산주의자들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오동기는 7월 18일에 연대장으로 부임했지만, 이 사건 당시에는 감옥에 있었다. 미군정 경무국 수사과장이었다가 1946년 대구 10월사건(10월항쟁) 때 '이 사건은 불순세력의 준동이 아니라 친일청산이 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했다가 해임된 독립운동가 최능진 등과 함께 역모사건에 휘말려 있었다.
최능진은 1948년 5·10 총선 당시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단독 출마해 무투표로 '고고하게' 당선되고자 했던 이승만의 의도를 무너트리고자 출마를 시도했다. 그랬다가 선관위의 비협조와 서북청년단의 방해로 후보자 등록에 실패했다. 그런 뒤에 벌어진 것이 최능진이 오동기 등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는 혁명의용군 사건이다.
여순사건 보름 전에 발행된 10월 5일 자 <경향신문> '정부 파괴 혐의'는 최능진이 그달 1일 체포된 소식을 전하면서 "체포 이유는 작년 11월경부터 국군 소령 오동기 등과 공모하여 국방군 속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현 정부를 붕괘시키려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오동기는 9월 28일에 소환을 당하고 10월 1일에 구속심문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 놓인 오동기가 여순사건의 주역으로 포장됐던 것이다.
송욱이 독립운동가였음을 알려주는 표지
그랬다가 25일에는 14연대의 김지회 중위가 총책임자로 지목됐다. 2013년에 <전북사학> 제43호에 실린 역사학자 주철희의 논문 '여순사건 주도 인물에 관한 연구'는 그날 김백일 전투사령관이 사건 진상을 발표한 일을 언급하면서 "김백일은 반란의 주도 인물로 제14연대 소속 김지회 중위를 적군의 수괴로 지목하였다"고 설명했다.
김지회는 나중에는 훨씬 더 부각됐지만, 이 시점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다음날 나온 또 다른 발표에 의해 김지회는 잠잠해지고, 뜻밖에도 민간인인 독립운동가가 사건의 주역으로 급부상했다. 송욱 여수여중학교 교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봉기군이 여수를 완전히 빼앗긴 날에 발행된 10월 27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정일권 대령은 26일 기자회견에서 "반란군에 의하야 감금 중이든 여수 련대장 박승훈 중령은 호기를 어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야 작일(昨日) 목포에 도착하야 반란 당시의 실정을 보고"했다면서 오동기의 후임인 박승훈의 진술을 근거로 이렇게 발표했다.
"여수폭동 발생 시의 실정은 제14련대 내 반란자는 병영에서, 일부 경찰 급(及) 청년단은 경찰서 급 시내에서 동시 계획적으로 폭동을 이르켯음. 여수 총지휘 책임자는 여수여자중학교장이라 한다."
제14연대 장병들은 병영에서, 여수 현지의 경찰 및 청년들은 경찰서 및 시내에서 동시에 봉기했다면서 여수여자중학교장 송욱이 총책임자라고 알리는 발표였다. 교장 선생님이 시민군뿐 아니라 정부군까지 총지휘했다는 자연스럽지 않은 내용이 발표됐던 것이다.
사건 발생 이튿날인 10월 20일, 여수 중앙동 광장에서 여수군민 4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여수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6인 의장단이 선출됐다. 이때 독립운동가 박창래·이용기·박채영·유목윤과 함께 공동의장으로 추대된 인물이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는 33세의 송욱 교장이다.
송욱은 월간 <말>지가 창간 8주년 기념으로 실시한 제2회 5000만 원 고료 논픽션 공모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응모작의 주인공이다. 응모작의 저자는 1930년 나주에서 출생하고 순천중학교를 졸업한 뒤 여수동국민학교에서 교직원으로 재직한 다음에 농사일을 하면서 여순사건을 파헤친 반충남이다. 반충남은 '여수 14연대 반란과 송욱 교장'(<말> 1993년 6월호)이라는 응모작에서 송욱의 이력을 이렇게 서술한다.
"송욱은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일정 때 이북의 오산고보와 더불어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쌍벽을 이루던 고창고보를 거쳐 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을 졸업하고 서울의 상명여학교(상명여대의 전신)에서 교편을 잡다가 일제말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을 맞았다."
2004년에 강정구·서중석 교수 등의 심사로 성균관대에서 통과된 김득중 박사학위논문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도 1948년 당시의 <세계일보> 및 <동광신문> 보도를 근거로 송욱이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된 사실과 그로 인해 8·15 광복을 감옥에서 맞이한 사실을 기술한다. 이런 사실들은 송욱이 독립운동가였음을 알려주는 표지다.
역대 반공정권들이 감춘 여순사건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