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1월 3일 <경향신문> 기사 "오늘 개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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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인들은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생각하지만, 1948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음력 10월 3일에 발행된 그해 11월 3일 자 <경향신문>에 '오늘 개천절'이란 기사가 나왔다. 이때만 해도 음력 10월 3일이 개천절이었던 것이다.
2015년에 <천문학논총> 제30권 제1호에 실린 박창범 고등과학원 교수의 논문 '개천절 일자(日字)와 단군조선 개국년도 문제 고찰과 제언'은 "민간과 종교집단에서는 적어도 구한말 때 이미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고" 의식을 거행했다고 말한다.
그랬던 것이 1949년에 달라졌다. 그해 10월 3일 자 <경향신문> 기사는 '오늘은 개천절'이다. 1년 전에는 11월 3일에 '오늘 개천절'이라고 보도했다가, 이때는 10월 3일에 '오늘은 개천절'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이 기사가 나오기 이틀 전인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국경일법)'이 제정됐다.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환산해서 개천절 날짜를 정하자'는 의견이 다수결에 의해 묵살되고,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인정하는 어처구니없는 법률이 국회를 통과한 결과다. 위 박창범 논문에 따르면, 양력 10월 3일을 주장한 쪽은 '반만년 전의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바꿀 만큼 지금 상황이 한가롭지 않다', '양력 10월이 날씨도 좋고 풍요롭다'는 점 등을 근거로 내세웠다.
단군조선의 건국 시점이 다수결에 의해 '대충' 규정된 일은 단군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애착이 그만큼 약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애착이 약해졌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것은 개천절과 짝을 이뤘던 행사가 현대 한국에서는 낯선 일이 되었다는 점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은 하늘에서 파견된 환웅의 아들로 태어나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신선의 세계로 올라갔다. 이를 근거로 대종교 교조인 독립운동가 나철이 구한말에 제정한 것이 '단군 등선(登仙)일'이다. 나철은 단군이 개국한 날과 더불어, 단군이 이 나라를 떠나 승천한 날도 기념했다. 이미지상으로 대비되는 개천절 행사와 단군 등선일 행사를 함께 운용했던 것이다.
단군 등선일이나 단군 승천일보다 어천절(御天節)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된 이 행사에 관해 1910년 4월 16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단군교에셔난 음(陰) 본월 15일이 즉 단군등선일이라 하야 기념식을 거행할 차(次)로 준비 중이라더라"고 보도했다. 대종교라는 명칭은 대한제국 멸망 직후에 나왔다. 멸망 4개월 전에 나온 이 보도에서는 단군교(대종교)가 준비하는 행사로 보도됐다.
4월 16일 자 신문에 적힌 "음 본월 15일"이란 표현 때문에 "음력 4월 15일"을 잘못 떠올릴 수도 있다. 1895년까지 음력이 쓰였으므로 이 시기 사람들은 아직은 음력에 익숙했다. 이 신문이 발행된 4월 16일이 음력 3월 7일이므로, 이 당시 독자들은 '음'이란 표현을 보고 양력 달력이 아닌 음력 달력을 떠올리게 되어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예고된 어천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뒤에 이 행사는 '대한민국의 공식 행사'가 됐다. 국내외의 대종교 신도들뿐 아니라 1919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서도 어천절 의식이 거행됐다.
일례로, 1921년 4월 22일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어천절 의식이 거행됐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그해 4월 30일 자 <독립신문>은 "지난 4월 22일(음력 3월 15일)은 우리 단군 대황조(大皇祖)께옵셔 어천하옵신 날임으로 그 하라바님의 자손 되는 상해에 재류하는 우리들은 동일 하오 3시에 기념식을 아(我) 의정원 의장(議場) 내에서 개(開)하다"라고 보도했다.
'우리 한민족은 단군 할아버님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고 '상하이의 우리들은 단군 할아버님의 자손'이라고 했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단군조선에 뒀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문구다. 단군을 임시정부의 할아버님으로 떠받들면서 어천절을 기념했으니, 이 행사의 권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다.
초대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사유 중 하나는 무단 결근이다. 6년간의 재임기간 중에서 상하이에 체류한 기간은 6개월밖에 안 된다. 1920년 12월 13일 첫 출근했고 반년 뒤 상하이를 떠났다. 그 사이에 1921년 어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도 위 행사에 참석했다. 그 6개월 동안에도 툭하면 상하이 밖으로 관광을 떠났던 이승만이다. 그런 그도 '할아버님 승천일' 행사만큼은 피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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